고암 스님[하]
고암 스님[하]
  • 법보신문
  • 승인 2012.08.14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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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스님이 책 태운 건 집착 말란 경책”
▲스님은 후학들에게 일반학문에도 관심을 가지라고 당부했다.

고암은 법문을 하고 보시를 받으면 경전을 인쇄하거나 염주 또는 단주를 사서 불자들에게 나눠줬다. 병든 스님들 병원비로 보태기도 했다. 시주의 무서움을 몸으로 보여준 것으로 늘상 단월의 시주를 잘못 쓰면 과보가 따른다는 점을 강조했다. 제자들에게도 불사를 할 때 설판제자가 되어 거금을 내겠다는 시주자가 텅빈 자리에서 시주하지 않으면 절대 받지 말라고 했다. 자칫 시주자나 시주를 받은 스님에게 애착심이 생겨나 스스로 인과의 고초를 받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고암은 90세에 달하는 나이까지도 건장을 잘 유지했다. 그래서 동남아 11개국을 순례할 때도 자정이 지나면 일어나 2시간 동안 참선을 한 후, 염불주력 1시간, 피로를 해소하는 운동 1시간, 이어 다시 앉아 30분 정도 지나 포행정진을 했다. 이는 고암의 평생 일과이기도 했다.


마음은 물론 몸까지 완벽하게 관리했던 고암의 수행자 면목은 종정 자리에 앉았을 때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종정을 지낸 일을 물으면 “어쩌다 하게 된 것이지. 종정 그것 별거 아니네. 잠깐 꿈꾼 것이야. 깨고 나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그러니 자네 일이나 부지런히 잘 보소”라며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하고 자기 할 일에 충실하라고 일렀다. 그런가하면 종정이 된 후에도 직접 불공 올리는 예식을 했고 요령을 흔들며 사다라니를 염송하기도 했다.


고암은 종정 재임 중에 총화, 수행, 창조의 세 가지를 종책 강령으로 삼았다. 세 가지 종책 강령의 실천이 불조의 유촉을 구현하는 것이요, 사부대중과 국민의 뜻을 받들어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는 것이며, 민족사적 당위의 명제를 성취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 주안점을 둔 것이 포교서적 출판이었다. 지방사찰의 임야 개발 및 관람료 수입 일부를 부과금으로 해서 전폭적으로 포교활동에 기울이도록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고 대내외에 공표하기도 했다.


고암은 당시 포교 일선에 나선 스님들이 사무를 맡은 스님들보다 격하되는 풍토부터 일소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아가 종단의 생명이 포교에 달려 있고, 불교의 흥망성쇠가 포교에 있다면서 포교원 독립과 포교사 양성 기관의 상설화 필요성을 역설했다. 더불어 종단 살림이 빈약해도 포교 업무를 보는 이들에게 재정 지원을 하고, 자격 기준도 없이 포교를 경시해서는 안 된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종정을 역임할 정도로 수행에 철저했던 고암이지만 경전과 문자를 소홀히 하지 않도록 지도했다. 출재가를 막론하고 자신의 책을 먼저 가져가는 사람이 임자라며 내 주었던 고암은 책을 멀리하는 수행자들에게 “옛 스님이 ‘금강경소’나 ‘벽암록’을 태운 것은 언어문자에 집착하지 말라는 경책이지, 언어문자 자체를 배격한 것은 아니”라고 경책했다. “진실로 묘한 뜻은 말이 끊어졌으나 글과 말을 빌어서 그 뜻을 말하고, 참 종지가 그 모양은 아니나 이름과 모양을 빌어서 그 종지를 표방한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출가자들이 경율론을 부지런히 배워 익히고, 현대사회와 시대에 비춰 새로운 일반 학문에도 관심을 갖고 섭렵해야 한다며 책 읽고 공부하기를 적극적으로 권했다. 스님들에게 강원교육과 사회 일반학문을 조화롭게 익히도록 권했던 고암은 언제 어디서나 사부대중 모두에게 “신심만 돈독하면 된다”며 불퇴전의 믿음이 계행청정과 자비실현의 근간이 될 수 있음을 역설하기도 했다. 그리고 1988년 10월25일 오후 8시 가야산 해인사 용탑선원에서 “조심해서 살거라. 인과응보는 분명하니라”라는 말을 남기고 열반에 들었다.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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