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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원지, 삶과 죽음을 말하지 않다

기자명 법보신문

삶은 한조각 구름 일어났다 흩어지는 것

무엇을 두고 ‘살아있다’하고
삶과 죽음 경계선은 무엇인가

 

한자루 촛불 타다 꺼짐과 같아
있다·없다는 모양과 공능일뿐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강남성모병원 중환자실. 하루 20분만 허용되는 면회시간을 맞춰 조카를 만나러 갔다. 비닐 옷을 입고 세정제를 듬뿍 바른 손에 다시 비닐장갑을 끼고 들어선 병실. 그곳에 백혈병으로 십년의 유형생활을 한 스무 살 조카가 누워있었다.


열 살 어린아이 몸집에 머리카락 한 올 없이 얼룩덜룩 검버섯이 핀 여든 노인의 얼굴, 수족관 물고기처럼 두툼하게 낀 백태에 시력마저 잃고 그 가녀린 목구멍에는 수도관보다 굵은 호흡기가 꽂혀 있었다. 삑~삑~ 심장과 혈관에 연결시켜 놓은 기계음과 숫자만이 “저 아직 살아있어요”라며 울부짖고 있었다. 애써 담담한 척, 어금니를 악물었다. 십년동안 너무나 흔하게 보았을 눈물 대신 환한 웃음으로 조카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싶었다. 너와의 만남은 나에게 더없는 기쁨이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민재야, 작은 아빠 왔다.”


보이지도 않을 눈동자가 흔들리고 손가락 끝이 가늘게 떨렸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리라던 결심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뒤돌아섰다. 행여 울음을 들킬까 싶어 두 손으로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그렇게 그 귀한 20분을 온통 숨죽이는 데만 쓰다가 쫓기듯 병실을 나왔다. 자판기 커피를 한잔씩 뽑아들고 마주한 형과 형수, 서로 말을 잊었다. 그 커피 잔도 바닥날 무렵, 형수가 겨우 한마디 꺼냈다.


“죽으면 어디로 가나요? 도련님은 불교공부를 많이 했으니 알 것 아니에요?”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가방 메고 재잘거리며 학교로 나서는 또래들을 유리창 너머로 바라보며 십년을 보낸 아이에게, TV에서 줄기차게 광고하는 피자와 통닭 대신 매 끼니 항생제를 한 움큼씩 삼켜야했던 아이에게, 아이의 장래 희망과 기대는커녕 자다가도 놀라 아이의 숨소리부터 확인해야 했던 엄마에게, 흐르던 눈물도 마르고 치밀던 분노마저 사그라져 멍한 눈동자로 먼 산만 바라보는 아빠에게 도대체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애꿎은 종이컵만 구겨버리고 자리를 일어섰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청소년기 때 열병처럼 앓았던 의문이 되살아났다.


“삶이란 무엇이고, 죽음이란 무엇일까?”


‘경덕전등록’에 다음 이야기가 전한다.


점원 중흥(漸源仲興)선사가 도오 원지(道吾圓智)선사 회상에서 전좌(典座) 소임을 맡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점원이 원지선사를 따라 단월(檀越) 집에 조상(弔喪)을 가게 되었다. 위의와 격식을 갖춰 조문을 하던 차에 중흥 스님이 갑자기 앞으로 나가더니 손으로 관을 문지르면서 원지 스님에게 물었다.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그러자 원지 스님이 말했다.
“살았다고 말하지 않겠다. 죽었다고도 말하지 않겠다.”
“어째서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말하지 않겠다. 말하지 않겠다.”
그렇게 조문을 마치고 함께 돌아오던 길에 중흥이 갑자기 스승의 앞을 가로막고 물었다.
“오늘은 화상께서 반드시 저에게 말씀해 주셔야겠습니다. 말씀해 주지 않으면 때리겠습니다.”


오죽 답답했으면 그랬겠나. 궁금한 걸 물으면 속 시원히 한마디 일러주면 좋으련만, 평소 원지 스님이 뭘 물어도 “말하지 않겠다”는 소리만 하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기 일쑤였으니 화가 날만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원지 스님은 조금도 언짢아하지 않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때리고 싶으면 네 맘대로 때려라. 하지만 살았다고도 말하지 않고, 죽었다고도 말하지 않겠다.”
얌체처럼 저만 알고 남에겐 가르쳐주지 않는다고 생각한 중흥은 진짜로 원지 스님을 주먹으로 때렸다. 제자에게 두들겨 맞는 수모를 겪으면서까지 왜 원지 스님은 “살았다고도 말하지 않고, 죽었다고도 말하지 않겠다”고 했을까? 곰곰이 살펴볼 일이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두고 ‘살아있다’고 하는 걸까? 과연 우리는 무엇을 두고 ‘죽었다’고 하는 걸까?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선은 과연 무엇일까? 삶과 죽음의 경계선, 그 이전엔 있다가 그 이후에는 없는 결정적인 ‘무엇’이란 과연 무엇일까?


옛 선사들은 끊임없이 말씀하셨다. 삶이란 한조각 구름이 일어났다가 흩어지는 것과 같고, 한 자루 촛불이 타다 꺼지는 것과 같다고. 있다가 없는 그 ‘무엇’을 곰곰이 따져보면 모양[相]과 공능[用]일 뿐이다. 꺼진 촛불에선 타원형의 불꽃과 밤을 밝히는 환한 빛을 더 이상 볼 수 없다.

그럼 타원형의 불꽃[相]과 환한 빛[用]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사라지는 걸까? 찬찬히 살펴보면 인연 따라 나타났다 인연 따라 사라질 뿐이다. 게다가 그 모습[相]과 공능[用]은 비슷한 현상의 연속일 뿐 거기엔 지속적인 어떤 존재도 없다. 엄밀히 따지면 한 찰라 이전의 촛불은 한 찰라 이후의 촛불이 아니고, 모든 불꽃을 소유한 ‘초’는 따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관찰했을 때, 과연 무엇을 두고 살았다고 하고 무엇을 두고 죽었다고 할 것인가? ‘오등회원’에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현명한 일곱 여인이 시체를 버리는 숲을 거닐다가 한 여인이 시체를 가리키며 물었다.


“시체는 여기 있는데 죽은 사람은 어디로 갔을까?”


이 말에 여인들은 그 시체를 관찰하고 각자 깨달음을 얻었다. 이에 감동한 제석천이 꽃을 뿌리며 찬탄하였다.


“성스러운 여인들이여, 필요한 것이 있으면 제가 평생 공급하겠습니다.”
그러자, 여인들이 말하였다.


“저희 집엔 옷도 음식도 풍족하고 보물도 넘쳐납니다. 하지만 딱 세 가지 물건이 없습니다.”
제석천이 그 세 가지를 묻자 여인들이 말하였다.


“첫째는 뿌리 없는 나무 한 그루, 둘째는 그늘도 볕도 없는 땅 한 조각, 셋째는 소리쳐도 메아리치지 않는 골짜기 하나입니다.”


이제, 조카에게 끝내 나누지 못했던 마지막 인사를 해야겠다.


잎도 꽃도 피우지 못한 채 시들어버린 뿌리 없는 나무 민재야, 아무리 소리쳐 불러도 메아리 없는 계곡으로 돌아가 웃음도 눈물도 없는 한 조각 땅에서 고이 쉬려무나. 

 

성재헌 tjdwogj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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