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것(방위에 따라서 존상을 배치하는 것-옮긴이)은 특별히 불교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기독교 등에도 비슷한 종류가 보인다. 대략 16~17세기 즈음까지 기독교의 회당(會堂)은 동서남북의 위치를 어지럽히지 않고 건설되었다.
중세시대 본당에서는 서방이 언제나 정면이 아니었던 적이 없다. 오지여래와 굉장히 비슷한 것으로서, 기독교와 사복음서의 저자를 상징한 오체도(五體圖)가 있다. 예수가 중앙이며, 또 천사(마태), 사자(마가), 소(누가)와 독수리(요한)가 사방에 배치되어 있는데, 정히 그 위치가 정해져 있다.
어째서 불교에서는 아미타불이 서방에 계신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을까. 누구든 유추할 수 있듯이, 서쪽은 태양이 지는 방위다. 아니, 지는 그 방향을 서쪽이라 이름붙인 것이다. ‘지다’라는 것은 끝이며, 사라져 버리는 것이며, 죽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이 죽어서 가는 방위를 서쪽으로 생각한 것은 필연적인 연상에 근거한다. 따라서 내세는 서방에 있다. 또 우리들을 맞이하는 아미타불도 서방에 계시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토를 굳이 서쪽이라 규정한다든지, 마음대로 서쪽으로 정했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필연적인 사고방식에 따른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결코 동양인의 사고방식만은 아니다.
서양에서 발달한 기독교도 비슷한 사고방식으로 이끌렸다. 최후의 심판 광경은 언제나 서쪽 벽에 그려져 있다. 죽으려는 찰나, 향하는 곳은 서쪽을 가리키는 것이다. 유럽에서 볼 수 있는 중세기의 대사원이 언제나 서향으로 세워져 있다는 것은 앞에서도 말하였는데, 운명의 법륜을 굴리는 로즈 윈도우(Rose window, 華窓)는 높이 서쪽벽 중앙에 자리하고 있다. 지는 태양 빛이 로즈 윈도우의 여러 가지 색의 유리에 비칠 때, 신자들은 신의 나라의 영광을 떠올려 보는 것이다. 그 서방에 있는 내세의 나라를 응시하고, 천국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다.
정토를 서방에서 발견하는 것은 이렇게 인간의 심리적인 필연에 의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인간이 왕생을 이루어 안정을 찾을 수 있는 곳, 부처님의 내영(來迎)에 의지하여 환희를 느낄 수 있는 곳이 서쪽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지 않은가. 서방이 있고 거기에 정토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야만 할 정토의 위치를 임시로 서방이라 불렀던 것으로 보아도 좋다. 서방에 정토가 있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점도 있으나, 정토의 위치를 서방이라 부른 것으로 보면 어떨까. 꼭 서쪽으로 태양이 져서가 아니라 태양이 지는 쪽을 서쪽이라 부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단어는 나중에 온 임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 해도 정토를 서쪽이라는 방위에다 위치시키는 것은 어째서일까? 방위, 즉 공간에서 불국토를 보는 것은 참으로 깊은 견해라 할 것이다. 이러한 의심을 누구라도 품는다는 것은 무언가 거기에 이성(理智)에 반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성을 넘어선 내용이 있다면, 그것을 고정된 개념에 가두는 것이 오히려 모순일 것이다. 적어도 방위를 정해버린다든가, 공간에 정토를 그린다든가 하게 되면, 여러 가지 이유에 맞지 않는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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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불교사연구소 번역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