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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단하, 목불을 태우다

기자명 성재헌

나무 불상을 태워서 사리 얻을 수 있는가

목불 태운 단하의 파격 행보
부처님 가르침인 공 깨달음

 

가변적 이름과 형상 얽매여
혐오하고 공경하는 짓 말라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파격(破格), 선종(禪宗)을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는 단어다. 선종의 특징이 ‘파격’으로 분류되는 까닭은 동북아시아가 긴 시간동안 명분(名分)과 격식(格式)을 중시하는 유교문화권을 형성한 탓도 있을 것이다. 서로 상반된 요소가 서로를 두드러지게 만든 격이니, 일종의 보색대비 효과다. 그럼, 유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불교만의 독특한 색깔은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바로 공(空)이다. 선가(禪家)에서 파격의 대명사처럼 거론되는 이가 있으니, 바로 단하 천연(丹霞天然, 739~824) 선사다.


‘오등회원’에 다음 이야기가 전한다.


단하선사는 본래 유학을 공부한 사람이었다. 유학을 공부하는 이들의 목적은 입신양명(立身揚名), 즉 관리에 발탁되어 공(功)을 세우고 그 이름[名]을 만세에 드날리는 것이다. 그 역시 출세의 등용문인 장안(長安)으로 향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관에서 쉬다가 홀연히 흰 광명이 방 안에 가득 차는 꿈을 꾸었다. 하도 신기해 점쟁이를 찾아가 묻자 점쟁이가 뜻밖의 말을 하였다.


“공(空)을 깨달을 꿈입니다.”


그는 그 길로 청운의 꿈을 접고 부처가 되기 위해 길을 나섰다. 그 총명한 머리와 유창한 말솜씨를 몽땅 던져버리고 방앗간과 마구간에서 허드렛일이나 하며 꼬박 3년을 보내고는 석두(石頭)에게서 머리를 깎고, 마조(馬祖)에게서 천연(天然)이란 이름을 얻었다. 이후로 지팡이 하나 들고 천하를 주유하면서 선지식들을 참방하였고, 천태산(天台山) 화정봉(華頂峰)에서 3년을 살았으며, 다시 낙양으로 들어와 용문(龍門) 향산(香山)의 복우(伏牛) 화상과 막역한 벗으로 지냈다. 그 후 다시 나그네가 되어 잠시 혜림사(慧林寺)에 머물 때였다.


몹시도 추운 어느 겨울날이었다. 행색도 초라하고 몰골도 볼품없고 별난 말재주도 삼갔으니, 나그네 대접도 시원찮았나보다. 방안에 성애가 허연데도 아궁이에 불도 넣어주지 않았나 보다. 때 아닌 도끼질 소리에 놀라 허겁지겁 객방으로 달려간 주지는 뒤로 까무러질 뻔하였다. 불꽃이 이글거리는 아궁이 앞에는 조각난 나무불상이 뒹굴고 있었다. 주지는 노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내 불상을 왜 당신 마음대로 태우는가?”

불 앞에 쭈그려 앉아 손을 녹이던 단하는 지팡이로 재를 뒤적거리면서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화장해서 사리를 거두려고요.”
“목불에 무슨 사리가 있겠는가.”


지팡이를 던지고 일어선 단하는 손을 털며 말했다. “그럼 양쪽에 있는 두 보살상도 마저 가져다 때야겠군.”
승려가 하늘이자 아버지이자 스승이신 부처님의 존상을 훼손했으니, 가히 천인이 공노할 죄이다. 단하 스님은 왜 이런 미치광이 짓을 했을까? 곰곰이 살펴볼 일이다.


불가를 흔히 공문(空門)이라 일컫는다. 공으로 들어가는 문, 공을 가르치는 집안이란 뜻이다. 공(空)이란 무엇인가? 공은 술어이고, 무(無)와도 일맥상통하는 단어이다. 즉 간단히 말하면 ‘없다’는 뜻이다. 그럼 불가에서는 무엇이 없다고 부정하는가? 우리가 개별적 존재[有]라고 여기고 있는 그것, 그 존재만이 소유하고 다른 존재는 소유할 수 없는 고유한 명칭[名]과 특성[相]은 ‘공하다’ 즉 ‘없다’고 가르친다.


예를 들어보자. 어느 솜씨 좋은 예술가가 진흙을 재료로 뱀과 부처님을 만들어 집안에 놓아두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 솜씨가 하도 기막혀 얼핏 봐선 진짜로 착각할 정도였다고 가정해 보자. 그 예술가 집에 어느 날 친구가 놀러왔다.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서던 친구는 깜짝 놀라 물러서며 두려워하였고, 조금 있다가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어딘가로 다가가 공손히 예를 올렸다. 그걸 본 예술가가 물었다.


“너, 왜 그래?” “응, 저기 뱀이 있고, 여기 부처님이 계시잖아.”


그 예술가는 깔깔거리며 말하였다. “이 바보야, 이거나 그거나 다 진흙이야.”


이것이 공(空)이다. 자기 손으로 직접 만들었는데 형상에 차이가 있다는 걸 그 예술가인들 왜 모르겠는가? 그 예술가가 “이거나 저거나 똑 같아”라고 말한 뜻은 형상에 따라 다른 이름을 붙이고는 본질까지 다른 존재로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가변적이고 일시적인 이름과 형상에 얽매여 하나는 혐오하고 하나는 공경하는 까닭 없는 짓거리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단하 스님도 마찬가지다. 총망 받던 유생에 당대 최고의 선지식인 마조와 석두 회상에서 참학한 단하가 어찌 예의와 격식을 몰랐겠는가. 그 형상을 통해 부처님에 대한 존경심을 일으키고 그 가르침을 되새기게 된다는 것을 어찌 몰랐겠나. 그런 단하가 이런 파격(破格)을 보인 까닭은 그가 그리도 존경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공(空)을 깨달았기 때문이고, 절집이 바로 공문(空門)이기 때문이었다.


나와 너를 가르고, 능력과 솜씨로 우열을 가르고, 명예와 이익으로 성공과 실패를 논하는 것은 세간(世間)의 일이다. 절집이란 출세간(出世間), 즉 공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나와 너란 구분이 어리석음에 기인한 까닭 없는 분별이고, 능력과 솜씨란 똑같은 수증기가 여름에는 비로 겨울에는 눈으로 내리는 것처럼 인연의 화합일 뿐이며, 성공과 실패란 달이 차고 기우는 것만큼이나 덧없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곳이 절집이다.


그 가르침으로 신분과 지위와 성별 등 갖가지 차별로 인해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하고, 우열을 겨루며 다투는 이들을 쉬게 하고, 성공과 실패를 논하는 자들의 흥분과 눈물을 씻어주는 곳이 바로 절집이다.


헌데 그런 절집에서 서열을 나누어 누구는 절절 끓는 방바닥에 살을 대이고 누구는 손발이 얼어 터졌으니, 세간의 공명을 버리고 절집으로 들어온 단하는 속이 터졌을 게다. 커다란 나무토막에 황금을 떡칠하고 온갖 산해진미를 올리며 허리를 굽실거리면서 구멍이 숭숭 뚫린 옷에 식은 밥 한 덩이가 아쉬운 사람은 헛기침에 곁눈질로 깔아보았으니, 공을 깨달은 단하는 기가 막혔을 게다.


주지랍시고 남들에겐 “나와 나의 것은 본래 없다”고 밤낮없이 떠들면서 ‘내 절’ ‘내 불상’ 운운하며 득실을 셈하였으니, 오직 진실만을 소중히 여기는 단하는 속이 까맣게 탔을 게다. 차별보다 평등에 주목해 세간의 병통을 치유할 출세간에서 세간보다 더 명예와 이익을 탐하였으니, 공문의 제자 단하는 속이 문드러졌을 게다.


해서 태워버렸을 것이다. 나와 너, 높고 낮음, 이익과 손해를 훨훨 태워버리고 공문의 진면목을 구현하고 싶었을 게다.


성재헌 tjdwogj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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