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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석굴 탑당굴의 완성과 서양 성당과의 비교

기자명 법보신문

예배인파로 마당 넓어져…기독교에 영향

재가자 회중 늘어나
탑당굴 규모도 커져
석굴 닮은 성당 건축
천정·회랑 유사해

 

▲ 1. 탑당굴 전실 베란다에서 앞마당의 발달.

 

인도 석굴 탑당굴은 완성된다. 그 특징은 장방형 종축의 말굽형 평면이고, 제일 깊은 속에 스투파를 모시며, 기둥들이 스투파를 감싸면서 양 벽쪽으로 기둥이 죽 늘어서 회랑을 형성한다. 원래의 원형 탑돌이 의례가 홀 쪽으로 연장되어 기둥을 따라 진입에서부터 퇴장까지의 선회 행진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가운데 주 출입구와 좌우 한 개씩 총 세 개의 입구가 있다. 주인공들은 홀 중심 스투파 앞 예배를 위하여 정 가운데로 출입했을 것이고, 행렬 탑돌이 예배를 위해서는 태양회전방향인 왼쪽 개구부로 들어가서 스투파를 돈 후 오른쪽 개구부로 나왔을 것이다. 대부분 천정은 아치 궁륭이다. 반드시 전실 베란다 공간이 있다.

 

 

▲ 2. 엘로라 10굴. 둘러싸인 앞마당.

 


석굴 입구 베란다 전실 공간이 점차 확장 된다. 대부분의 초기 석굴들은 암벽 전면이 무너져 원래 모습은 잘 알 수 없지만 중기 이후로는 그대로 잘 남아 있다. 앞에서 보면 높은 외부 기둥 안쪽 공간이 점점 넓어지게 된다(그림1). 대도시 뿌네 인근 베드사 석굴에서 굴 안 전실 베란다가 확장되고 뭄바이의 칸헤리 석굴에서 앞마당이 넓어지다가 급기야 엘로라 10굴처럼 탑당굴 앞마당이 널찍하게 사방이 둘러싸인 안마당처럼 발달한다(그림2).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처음에는 석굴 사원은 오로지 출가 스님들의 수행처였다. 승가 집단 규모가 커졌다고 해도 석굴이 그리 클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재가신자 회중들이 늘어나 수용할 수 있도록 규모가 커졌을 것이다. 탑당굴 안에서 스투파 예배가 진행되는 동안 대중들은 앞마당에 가득 모여 기다리거나 바깥 예배에 참석했을 것이다.

 

▲3. 중세 성당 성아폴리나레 누오보, 이탈리아 라벤나. 6세기.

인도는 종교의 나라다. 오늘날도 인도 전국의 힌두 사원을 찾아가다 보면 예배 인파에 부딪치게 되는데 장난이 아니다. 어쩌다 행사 인파 속에 휩쓸리게 되었는데, 생전 처음 엄청난 군중의 숫자 자체에 압도되어 무서웠었다. 지금도 넘어져 밟혀 죽는 사고가 뉴스에 심심치 않게 흘러나온다. 스투파를 모신 탑당굴은 수많은 재가 대중들을 위하여 석굴 앞마당이 점점 더 발달하여 완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그런데 인도 불교 석굴의 모습은 서양 중세를 풍미했던 기독교 성당과 아주 유사하다. 우선 똑같이 말굽형 평면이다(그림3). 또 예배 홀이 좌우 기둥열에 의해 세부분으로 나뉘어, 본 홀과 좌우 회랑이 있는 것도 똑같다. 기둥들이 죽 늘어서 지성소 까지 깊이를 더해주는 것도 같다. 천정이 아치 궁륭 구조로 되어 있는 것도 똑같다. 100년 전 우리 땅에 들어온 서양의 기독교 전주 진동성당도 같은 모양이다(그림4). 성당은 제일 속 깊이 들어가면 스투파 대신 지성소가 있는데 끝이 불교 석굴과 같이 반원형으로 마감된다. 석굴은 원형의 스투파를 돌기 위해 반원형이 되었는데 성당은 반드시 반원형으로 되어야할 이유는 없다. 기존 공식 학설은 불교와 기독교의 예배당이 비슷하게 생긴 것은 서로 무관한 우연이라고 한다. 그러나 필자 생각은 다르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똑같다.

 

인도 불교 석굴 조성은 B.C.2세기에 시작되어 A.D.6세기경 끝난다. 서양 기독교 성당은 로마에서 공인받은 4세기에 시작되어 중세 성당형으로 정착되는 것은 6세기 이후의 일이다. 공식적으로는 성당 형태는 로마의 공회당 바실리카에서 왔다고 하나 별로 설득력이 없다. 알고 보면 동서양 문명은 지리적으로 서로 연결되어있다. 인도에서 페르샤 한 다리만 건너면 바로 그리스 서양이 된다. 불교 석굴의 예배 공간이 참조되지 않고서는 후세의 기독교 성당이 이렇게 닮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성당에서 앱스(apse)라고 부르는 반원형 지성소까지 말이다.

 

 

▲ 4. 전주 진동성당. 홀과 기둥열 뒤 양쪽 회랑. 궁륭 천정, 제일 속 반원형 지성소.(좌) 5. 석굴암 좌우 문지기 금강역사. 일제시대 수리 전 사진.(우)

 


우리가 잘 모르는 사실, 불교와 기독교가 얼마나 서로 밀접히 연결되어있는가를 석굴암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석굴암 본존불 굴로 들어가기 직전 좌우 문지기 금강역사를 ‘아훔’이라 부른다(그림5). 한쪽 팔은 위로 치키고 또 한 쪽 팔은 아래로 내린 마치 태껸 자세로 서있다. 왼쪽 분은 입을 벌리고 있는 소리의 시작 ‘아’이고 오른쪽 분은 입을 다물고 있는 소리의 끝 ‘훔’이라 하여 합쳐서 바로 인도 신비의 소리 ‘옴’이 된다. 절에 가면 범어 ‘옴’자가 천정에, 문짝에, 범종에도 새겨져 있다(그림6). TV 왕건 드라마에서 궁예가 주술 ‘옴마니반메훔’을 열심히 읊었던 바로 그 ‘옴’이다.

 

 

▲ 6. 범어 ‘옴’자. 7. 회랑 부분 비교. 전주 성당, 준나르 석굴.

 


한편 기독교 교회에서 ‘알파’와 ‘오메가’가 바로 세상의 시작과 끝을 말하는 중요 상징이다. 기독교 성서 요한계시록에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끝이니라”하는 구절이 나온다. 교회 입구 양쪽 벽에 알파와 오메가 ‘A Ω’ 기호가 마치 금강역사처럼 지키고 있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다만 목사님들이 그게 불교의 금강역사 ‘아훔’과 같다는 것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인도 문명이 그리스로 들어가서 기독교와 하나가 되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인류 문명에서 누가 더 원조인지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을 지도 모른다.

 

▲이희봉 교수
다른 점은 기둥 뒤 회랑 부분이 성당에서는 예배를 볼 수 있을 정도의 좁지만 넓은 공간이다. 그러나 석굴에서는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아주 좁은 공간이며 기둥이 빽빽이 늘어서 있어서 홀 쪽이 겨우 보일 정도이다(그림7). 다시 말해 석굴 기둥 뒤 회랑은 오로지 일렬로 행진하기 위해서만 만들어진 공간이다. 다음호에서는 석굴 변화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즉 불상이 등장하기 전까지 승원굴 거주 석굴이 예배 사당으로 변해나가는 과정을 보도록 한다. 


이희봉 중앙대 건축학부 이희봉 교수 hblee@ca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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