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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석굴에 드디어 불상이 들어오다

붓다의 인물 형상 숭배 요구 높아져

부처님 그리는 건 불경
처음엔 빈 옥좌만 표현
석굴 속 불상은 획기적


석굴에 드디어 불교 역사상 최대사건, 부처의 형상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초기 석굴들은 인도탑 즉 스투파 모신 탑당굴 중심의 무장식 단순 형태의 석굴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스투파 숭배 자체도 석가모니께서 자신을 비롯해 아무것도 숭배하지 말라는 가르침에 위배된다. 석가모니는 오늘날 힌두교의 전신인 창조주를 숭배하는 기존 바라문교의 관습을 타파한 다름 아닌 정신적 철학적 개혁 사상가였었다. 오늘날 불교에서 채식을 하는 식습관도 살생을 금한다는 자비에 바탕을 두었다고 되어있으나 알고 보면 바라문 시대 창조주 프라자파티와 베다 제 신들에게 엄청난 수의 가축을 잡아서 바치는 피의 희생제 의례에 석가모니가 반기를 든 데서 비롯된다.

 

 

▲1. 귀한 몸을 감히 그리지 않은 빈 옥좌. 인도 델리 박물관.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재가신자들이 스승을 기리기 위하여 분신으로서 사리를 경건히 모시는 것으로 시작된 스투파 숭배가 워낙 유행하다 보니 옆에서 지켜보던 출가자들도 할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되어 스투파는 승가 집단의 주 숭배물로 정착되게 된다. 당시 무한히 존경스러운 부처님 형상을 감히 그리는 것 자체가 불경스러운 짓이어서 무색의 종교 불교에서 처음에는 부처의 상이 없는 빈 옥좌만 그렸었다(그림1). 조선시대 정밀한 기록화로서의 왕이 참가했던 행사 그림에 감히 용안을 그리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동아시아 불상의 시조로서 미술, 역사 교과서에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간다라 불상이 기원 이라고 되어있다. 간다라 지역은 그리스 알렉산더 왕이 침입하여 수백년 지배하며 그리스 영향을 받은 것도 사실이고 또 중국으로 전파되는 길목의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나 인도의 불상이 간다라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현재 인도인들이 별로 인정하지 않는 식민시대 서양인 우월주의에 불과하다. 인도에는 자기네 여러 신의 상을 만들어 숭배하는 전통이 이미 죽 있어 왔다. 금욕 고행 명상을 통해 수행하던 초기 불교가 스투파라는 추상적 형상을 숭배하다가 이제는 구체적 인물 형상을 숭배하게 된다. 일반 대중들의 요구에 따른 결과일 것이다. 인도 불교는 불상을 도입하게 된 대승불교로 바뀌게 되며 점차 형상 숭배를 위주로 하는 힌두교를 닮아가다가 결국 시대가 더 나아가면 힌두에 흡수되어 10세기경 대륙에서 소멸되게 된다.


석굴에서 시주한 인물상, 또는 바라문의 신들의 조각은 더러 있었으나 부처의 형상이 들어온 것은 정말 획기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불상은 대략 불멸 7백년도 더 지난 후, 석굴을 조성하기 시작하여 5백년 더 지난 시기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조용했던 스투파 중심의 검소한 석굴에 인물 상 조각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며 요란스러워 졌다.


초기 소승 무불상, 후기 대승 불상의 시대 구분을 공식으로서 알고 있었으나 그리 단순 하지는 않다. 사실 인도에 가기 전 교과서적 상식, 동남아의 소승불교는(Hinayana) 자기 한 몸 해탈을 위한 그릇이 작은 대신 우리의 대승불교는(Mahayana) 중생 구제 이타행의 통이 큰 불교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 알고 보니 초기 불교 석가모니 제자들은 전부 소승이었다. 불멸후 교리와 계율상 분열된 부파불교 시대에 점차 다수를 차지하는 재가 집단을 아우르고자 하는 대중부에서 경멸하는 의미로 붙여준 명칭이 소승이었다. 소승은 자신 스스로를 소승이라 부른 적이 없는 지어낸 말이다. 상좌부(上座部) 즉 테라바다(theravada) 불교라 부른다. 잘못 알고 있듯이 소승은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어느 면에서 석가모니 정통파라 할 수 있다.

 

 

2. 판두레나 불상굴 16굴

 


지지난 18편 나식의 판두레나 석굴로부터 시작 하자. 인도 석굴은 B.C. 2세기부터 A.D. 3세기 정도까지의 초기 1차 파도가 지나간 후 5~6세기의 불상 시대의 2차 파도가 휩쓸게 된다. 전 편의 쿠다 석굴과 마찬가지로 판두레나 석굴도 B.C. 1세기~A.D. 2세기까지의 원래 무장식 단순 석굴에 두 번째 파도의 불상이 들어왔다.

 

 

3. 군위 석굴암.

 


불상만 모신 굴, 즉 앞에 넓은 예배 공간은 따로 없고 그냥 움푹 파서 속에 불상만 모신 굴이 몇 있다. 16굴은 삼면에 불상 조각을 앉혀 두었다. 인도 전역 석굴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무릎세워 앉은상’(pralambapadasana)이다(그림2). 우리의 가부좌 틀고 앉는 것과는 달리 의자식 생활에서 나온 것이다. 설법하는 전법륜상(轉法輪相)이다. 각 3면의 세 불상 좌우에 파리쫓개, 한자 번역 불자(拂子)를 어깨에 걸친 협시가 옹위하고 있다. 석굴 분위기가 우리 경주 석굴암의 원초형인 군위 석굴암과 아주 비슷하다(그림3). 군위 석굴암은 아도(阿道)의 수행처로 알려져 있다. 아도는 삼국유사나 해동고승전에 인도인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시커먼 오랑캐’ 묵호자(墨胡子)와 구분되지 않아 인도 석굴과 직접 연관성이 있을 지도 모른다.

 

 

▲ 4. 판두레나 20굴.

 


불상만 있던 작은 이런 굴이 독방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승원굴 속으로 들어가서 결국 ‘사당 승원굴’이 된다. 전전 18편에서 본대로 승원굴이 예배굴로 바뀌는 첫 단계로서, 스투파가 거주 승원굴로 들어와 ‘스투파 사당굴’이 되고, 이제는 한술 더 떠 스투파 대신 그 자리를 불상이 본격적으로 차지하여 거주굴이 ‘불상 사당굴’이 된다. 판두레나 20굴을 보면 3면 거주 독방렬 안쪽 정 중앙에 독방 대신 사당 공간을 움푹 파고 그 안에 불상을 모시게 된다(그림4).

 

▲5. 판두레나 20굴.
상징적 기둥 2개를 통과하면 전실이 있고 양 벽면에 문지기 보살 조각상들이 있고 그 안의 사당방 속에 불상을 모신다. 역시 ‘무릎세워 앉은 상’이다. 승원굴 공간 안에 다시 안 사당 공간을 만드는 방식이다(그림5).


기존 인도 미술사 건축사 정설은 원래 거주 승원굴이었는데 나중에 불상 사당을 더 파서 만들었다고 되어있으나 필자 생각은 다르다. 인도 석굴의 불상 조각은 처음 굴 팔 때부터 계획하여 같이 팠는가 나중에 부가하였는가 여부는 기준 벽면선을 보면 된다. 자세히 보면 사당 두 기둥이 벽면선에서 튀어나와 있고, 바닥 기단 모양 역시 앞으로 나와 있고, 무엇보다 기둥 위치가 만약 독방이 먼저 있었다면 출입구 중앙에 딱 걸리게 되는 점으로 보아 석굴 개창 처음부터 사당을 계획하지 않았다면 지금 같은 모양은 불가능하다.


그림의 사당 앞 평평한 바닥에 돋운 사각 단에 주목하기 바란다. 우리가 제사지낼 때 앞에 까는 돗자리인 셈이다. 힌두교 신전의 지성소 앞에 반드시 ‘만다파’라는 돋운 단 공간을 만들어 노래와 춤의 경배를 드린다. 이렇게 승원굴 속에 불상 사당을 움푹 파 만들고 그 앞에 만다파 경배공간을 만드는 방식은 유명한 세계문화유산 아잔타 석굴에서 불상 사당을 속에 모신 승원굴로 그대로 계승된다.

 

▲이희봉 교수

사당 앞 안마당 한 가운데 네 기둥으로 둘러싸인 정규 만다파 공간으로 굳어진다. 다음 호에서 자세히 보도록 하자.


이희봉 중앙대 건축학부 교수 hblee@ca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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