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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무업, 고개를 돌리다

기자명 성재헌

‘잘 모르겠다’는 그 마음이 바로 부처

무업, 마조 덕분에 한 생각 바꿔
강의 파하고 평생 조용히 살아

 

제 그림자에 놀람은 망상 때문
내달리지만 말고 반조도 해야
 

 

 

▲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인터넷을 뒤지다 ‘산이조아’라는 분의 글을 읽고 한바탕 크게 웃었다.


“6개월에 걸쳐 ‘장자’를 읽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소박하게 살아라.’ 두 마디로 요약하면 ‘나대지 말고 소박하게 살아라.’ 세 마디로 요약하면 ‘설치지 말고 나대지 말고 소박하게 살아라.’”

동감이다. 긴 시간 부처님 말씀과 조사들의 어록을 읽은 소감을 밝히자면 나 역시 이렇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조용히 살자.”
두 마디로 요약하면 “헛짓거리 하지 말고 조용히 살자.”
세 마디로 요약하면 “헛소리 하지 말고 헛짓거리 하지 말고 조용히 살자.”
네 마디로 요약하면 “헛생각 하지 말고 헛소리 하지 말고 헛짓거리 하지 말고 조용히 살자.”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이해한 나만의 소감일까? 다행히도 이런 소회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사례들이 사서(史書)에 수두룩하니, 결코 편벽된 태도라 치부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분주 무업(汾州無業)선사 역시 조용한 삶을 선택한 이들에게 귀감이 되는 분이다.


공중에서 “잠시 쉬어 갑시다” 하는 소리를 듣고서 어머니가 그를 잉태하였고, 태어나는 날 저녁에는 신비로운 빛이 방에 가득했으며, 귀밑머리를 딸 무렵부터 걸을 때는 반드시 앞만 보고 앉을 때는 반드시 가부좌를 틀었다고 하니, 그분은 전생에도 수행자였나 보다. 스님은 아홉 살에 개원사(開元寺)로 출가하여 경전을 배웠는데 다섯 줄을 동시에 읽으면서 한 글자도 빠트리지 않고 외웠고, 열두 살에 머리를 깎고 스무 살에 양주(襄州)의 유(幽) 율사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이후 ‘대열반경(大涅槃經)’을 강의하자 사방에서 학인들이 구름처럼 몰려 강의가 중단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마조대사의 선문(禪門)이 번창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강의를 중단하고 특별히 그를 찾아갔다. 마조는 그의 용모가 기이하고 음성이 종소리처럼 웅장한 것을 보고 말했다. “우뚝한 불당이지만 그 안에 부처는 없구나.”


대사가 절을 하고 꿇어앉아 물었다.

 

“3승의 가르침은 대충이나마 그 취지를 궁구해 보았습니다. 선문에서는 마음이 곧 부처라 한다는 소리를 늘 들었는데, 그 뜻은 정말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마조가 말했다. “잘 모르겠다는 그 마음이 바로 그것일 뿐, 다시 다른 물건은 없다.”


대승(大乘)에서 거론하는 ‘부처님’은 인도에서 잠시 살다간 ‘붓다’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단어로 해석된다. 특히 ‘열반경’에서는 영원하고[常], 행복하고[樂], 참된 본체이고[我], 맑고 깨끗한[淨] 한 궁극의 존재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수행자들에게 있어 부처님은 구현하고 싶은 이상이자 성취해야 할 목표로 제시된다. 지금 이대로, 덧없기 그지없고[無常] 힘들고 괴로우며[苦] 이랬다저랬다 확고한 주관도 없고[無我] 못나고 부족한 것 투성이[不淨]인 이 마음, 떨쳐버리고 싶은 이것이 꿈에도 그리던 그것이라니, 기가 찰 노릇이다. 궁금증이 해소되기는커녕 분분한 생각들로 머릿속이 뿌옇게 흐려졌을 게다. 한참을 묵묵히 이맛살만 찌푸리던 무업이 겨우 한 마디 꺼냈다.


“무엇이 달마가 서쪽에서 오셔서 비밀히 전했다는 심인(心印)입니까?”


질문이 대화의 맥을 빗나갔으니, 간곡히 대답해 준들 그의 마음에 닿을 수 있을까? 구두 신고 발가락 긁는 것만큼이나 소용없는 짓이다. 쩝 하니 입을 다신 마조가 손사래 쳤다.


“대덕의 마음이 지금 매우 소란스러우니, 갔다가 다른 때 오라.”


부끄러움과 혼란스러움이 범벅인 얼굴로 어정쩡하게 물러나 문을 나서려던 참이었다. 뒤통수에서 끌끌 혀를 차던 마조가 갑자기 큰 소리로 그를 불러 세웠다.


“대덕.”


무업이 고개를 돌리자, 마조가 물었다.


“이게 뭔가?”


그 순간, 무업은 마조의 뜻을 문득 깨달았다. 무업이 뛸 듯이 기뻐하며 절을 올리자 마조가 말했다.


“이 둔한 친구야, 절은 해서 무엇 하겠는가?”


회광반조(廻光返照), 선가에서 자주 사용하는 표어이다. 돌아본다는 것은 곧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눈앞의 현상들이 ‘어떻게’ 일어나는 것인가, 그 구조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영사기를 통해 투영된 그림자란 것을 아는 사람은 스크린 속 여인을 두고 “미인이다” “추녀다”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그런 그녀를 흠모하며 밤잠을 설치거나 다시 만날까 겁내하지도 않는다. 마찬가지로 지금 한 생각이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 바로 이해한 사람에게는 한 생각을 좇아 치달릴 일도 한 생각에 시달리며 울고불고할 일도 없다.


마조 덕분에 한 생각을 돌이킨 무업은 이후 강석을 파하고 평생을 조용히 살아갔다. 소리 소문 없이 덕의 향기가 퍼져 낙양의 스님들이 양가대덕(兩街大德)으로 천거했지만 뜻이 없다며 조용히 몸을 숨겼고, 상당(上黨)에서 본색이 드러나 절도사 이포진(李抱眞)이 아침저녁 문안을 드리자 다시 포복산(抱腹山)으로 떠났고, 서하(西河)의 개원정사(開元精舍)에서 살 무렵 헌종(憲宗)이 여러 차례 초청했지만 모두 병을 핑계로 거절하였고, 목종(穆宗)이 즉위해 꼭 한번 뵙기를 소원하며 조서를 내리자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음을 알고는 목욕하고 머리를 깎고는 조용히 앉아 열반에 들었다.


무업(無業),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이것저것 묻는 학인들에게 그는 늘 씽긋이 웃으며 한 마디만 했다고 한다.


“망상 떨지 마라.”


이 가지를 놓고 저 가지를 잡느라 분주한 원숭이처럼, 자기 그림자가 두렵고 자기 발자국이 싫어 도망치느라 숨이 턱까지 찬 사람처럼,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취하고 버리느라 분주한 우리들에게 이보다 유익한 말씀이 있을까?


천동산(天童山)에 주석하셨던 굉지 정각(宏智正覺)선사께서도 말씀하셨다.


“길을 돌린 돌덩어리 말이라야 조롱을 벗어난다.”


야들야들한 풀밭을 찾아 사방팔방 끝없이 내달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릴 일이다. 돌덩어리 말은 원래 주린 법이 없으니, 소란 떨지 말고 조용히 살 일이다.


성재헌 tjdwogj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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