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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선덕여왕의 지혜

기자명 법보신문

황룡사구층탑 세우고 덕화로 신라 다스려

54년 왕위 머물던 진평왕의 딸
여자 몸으로 왕위 오른 첫 사례

백제·고구려 공격에 위기처하자
하늘 뜻 미리 알아 적절히 대처

 

 

 

▲ 황룡사지 목탑지(위). 분황사 석탑(아래). 모두 선덕여왕이 창건한 사찰들이다.

 

 

자장(慈藏)이 당나라 오대산의 문수보살에게 기도하여 감응을 받았을 때다. 문수보살이 말했다.


“너희 나라 왕은 천축 찰리종족(刹利種族)의 왕인데, 이미 부처님의 수기(授記)를 받았으므로 따로 인연이 있어서 동이(東夷) 야만의 종족과는 다르다.”


찰리종 혹은 찰제리종(刹帝利種)은 인도 사성계급 중의 두 번째인 크샤트리아, 즉 무사계급을 의미한다. 그리고 부처님의 종족인 석가족은 바로 크샤트리아계급에 해당했다. 따라서 신라 국왕이 찰리종이라고 하는 것은 신라 왕족이 인도의 석가족과 같다는 의미다. 신라 왕실에서는 석가의 권위를 빌려 왕권을 강화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왕족의 여러 이름을 불교로부터 따왔던 경우가 그 구체적인 예다. 전륜성왕(轉輪聖王)을 꿈꾸던 진흥왕은 두 왕자의 이름을 금륜(金輪)과 동륜(銅輪)으로 지었다. 금륜이 왕위를 계승하여 진지왕이 되고, 동륜의 아들 백정(白淨)이 그 뒤를 이어 진평왕이 되었다. 백정은 석가모니의 아버지 이름인 정반왕(淨飯王)으로부터 따온 것이고, 진평왕의 왕비 마야부인(摩耶夫人)은 석가모니 어머니의 이름으로부터 가져온 것이었다.

진평왕의 두 동생 백반(伯飯)과 국반(國飯)도 석가모니 숙부의 이름으로부터 유래한 것이었다. 진평왕의 딸 덕만도(德曼)도, 국반갈문왕의 딸 승만도(勝曼)도 모두 불교의 경전으로부터 가져온 이름이었다. 덕만은 ‘열반경’의 덕만우바이(德曼優婆夷)에서 따 온 것 같다. 경에 의하면, 덕만우바이는 많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일부러 여자의 몸으로 태어났다고 한다.


54년 동안이나 왕위에 머물렀던 진평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왕이 세상을 떠나자 나라 사람들은 그의 맏딸 덕만(德曼)을 왕으로 세웠는데, 곧 632년 정월 왕위에 오른 선덕왕(善德王)이다. 이렇게 신라는 처음으로 여왕이 등장하게 되었다. 덕만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총명하고 민첩했다고 하지만, 그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성골(聖骨)이라고 하는 특수한 왕족의식에 힘입은 바 컸다. 신라 왕족이 인도의 석가족과 같다는 찰제리종설은 불교라는 종교의 신성성에 의탁하여 신라 왕족이 신성한 혈통, 즉 성골이라고 강조하는 토대였다. 덕만은 비록 여자였지만,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찰리종이었기에 가능했다. 선덕여왕이 위기에 처하게 되자 자장은 문수보살의 입을 빌려 신라 왕권의 신성함을 다시 한 번 강조했던 것이다.


신라 최초의 여왕, 그 여왕 즉위의 정당성을 그가 찰리종왕이라는 이유만으로 설득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선덕여왕 지기삼사(知幾三事) 설화다. 여왕은 미리 예견한 일이 세 가지나 될 정도로 매우 지혜롭고 총명했다는 것이다.


당나라 태종이 모란꽃 그림과 그 씨를 보내 온 일이 있었는데, 그 그림을 본 왕은 이 꽃에는 향기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씨를 심어서 핀 꽃에는 과연 왕의 말과 같이 향기가 없었다고 한다.


영묘사 옥문지(玉門池)에 겨울인데도 많은 개구리가 모여 3~4일 동안 울어 댄 일이 있었다. 나라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왕에게 물었다. 왕은 급히 각간 알천(閼川)과 필탄(弼呑) 등에게 명하여 정병 2000명을 뽑아서 속히 서쪽 교외 여근곡(女根谷)을 찾아 가서 적병을 모두 죽이라고 했다. 두 각간이 군사를 거느리고 서쪽 교외 부산(富山) 아래에 이르니, 과연 여근곡이 있고, 그곳에 백제 장군 우소(于召)가 군사 500명을 이끌고 숨어 있었다. 이에 알천 등은 이들을 습격하여 모두 죽였다.


왕이 아무 병도 없을 때 여러 신하들에게 일렀다.


“나는 아무 해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利天)에 장사지내도록 하라.”


신하들이 그곳을 알 수 없어서 묻자 왕이 말하였다.


“낭산(狼山) 남쪽이다.


그 날이 되자 왕은 과연 죽었고, 신하들은 낭산 양지에 장사지냈다. 10여 년이 지난 뒤 문무왕이 왕의 능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웠다. 불교에서는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利天)이 있다고 했으니 그때야 왕의 성스러움을 알게 되었다.


왕이 돌아가기 전에 신하들이 왕에게 아뢰었다.


“어떻게 해서 모란꽃에 향기가 없고, 개구리 우는 것으로 변이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까.”


왕이 대답했다.


“꽃을 그렸는데 나비가 없으므로 그 향기가 없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이것은 당나라 임금이 나에게 짝이 없는 것을 희롱한 것이다. 또 개구리가 성난 모양을 하는 것은 병사(兵士)의 형상이요. 옥문(玉門)이란 곧 여자의 음부(陰部)이다. 여자는 음이고 그 빛은 흰데 흰빛은 서쪽을 뜻하므로 군사가 서쪽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 남근(男根)은 여근(女根)에 들어가면 죽는 법이니 그래서 잡기가 쉽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선덕은 선덕우바이에서 따온 이름
선덕바라문은 전륜성왕 수기 받아

불교 진흥으로 왕실 권위 높이고
분황사 등 많은 사찰 후대에 남겨


이상이 선덕여왕 지기삼사(知幾三事) 설화다. 지기(知幾)는 일의 기미를 미리 아는 것이다. 기(幾)란 이미 싹텄으나 아직 드러나지는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 움직이기는 했으나 아직 그 형체가 이루어지지는 않은 상태다. 이것이 기(幾)이고 기미(幾微)다. 미세하게 움트는 기미를 보통 사람은 알아보기 어렵다. 지혜로운 자만이 눈치 채는 것이다. 기미를 미리 알고 이에 대처하는 사람, 그는 신명(神明)한 덕의 소유자다. 세 가지 일이나 미리 예견할 정도로 지혜로운 선덕여왕은 만기(萬機), 즉 정사를 잘 살필 수 있는 인물이라고 이 설화는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천문(天文)을 보아 시대의 변화를 살핀다.”


‘주역’의 이 구절은 주목해야 한다. 특히 제왕의 천문 관측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모든 권력의 원천인 천기(天機)를 살펴 하늘의 의지를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선덕여왕 시절에 첨성대(瞻星臺)도 쌓았다. 첨성대는 천기, 즉 하늘의 뜻을 살피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 조형물이이고, 여기에는 선덕여왕은 천기를 살펴서 아는 국왕이란 것을 널리 알리고자 한 목적이 투영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선덕여왕 11년(642) 7월 백제의 공격을 받아 신라는 서쪽 40여 성을 빼앗겼고, 8월에는 대야성이 함락당하고 도독 품석(品釋)도 죽었다. 이 해 겨울 김춘추가 고구려로 가서 군사를 청했으나 실패했다. 이 무렵 신라는 국가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백제의 침략으로 위기감이 팽배했고, 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여왕 통치에 대한 비판도 비등했다. 선덕여왕은 12년에 당나라에 유학하고 있는 자장의 귀국을 요청했고, 자장은 이 해 3월에 서둘러 귀국했다.


자장은 여왕을 만나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자고 제의했다.


“제가 오대산의 태화지(太和池) 가를 지나고 있을 때 문득 신인(神人)이 나타나 저에게 물었습니다.”
“그대 나라에 무슨 어려움이 있습니까?”
“저는 말했습니다.”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가 번갈아 변경을 침범하는 등 이웃의 구적이 횡행하니, 이것이 백성들의 걱정입니다.”
“신인이 말했습니다.”
“지금 그대 나라는 여자로 임금을 삼았기 때문에 덕은 있으나 위엄이 없으므로 이웃나라가 침략을 도모하니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면 장차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신인이 말했습니다.”
“본국에 돌아가서 황룡사 안에 9층탑을 이룩하면 이웃나라는 항복하고 구한(九韓)이 와서 조공하여 왕업이 길이 편안할 것입니다.”


여왕은 위엄이 없다. 그래서 이웃나라가 침략해 온다. 이는 당시의 국내외적인 여론이었다.
당 태종까지도 이렇게 말했다.


“신라는 여자를 임금으로 삼았기에 이웃 나라의 업신여김을 받는 것이다.”


군사 원조를 청하러 간 신라 사신에게 던진 당 태종의 이 말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래도 자장은 여왕의 면전에서 이런 여론을 전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신인의 입을 빌려 자신의 생각을 전했던 것이다. 땅에 떨어진 국왕의 권위를 높은 탑처럼 일으켜 세우고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탑의 신성으로 왕실의 존엄을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였다. 선덕여왕 14년 3월에 시작된 구층탑 건립의 공사는 이듬해에 완공할 수 있었다.


선덕여왕 16년(647) 정월, 비담과 염종 등이 기어이 난을 일으켰다. 여왕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는 이유였다. 공격과 방어가 계속되는 중인 8일에 왕이 죽었다. 17일에야 난을 진압하고 비담을 처형할 수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선덕(善德)을 시호라고 했지만, ‘신당서’ 및 ‘구당서’에는 생존 시의 왕호(王號)라고 했다. 선덕도 ‘열반경’에 나오는 선덕우바이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대방등무상경(大方等無想經)’에 의하면, 선덕바라문은 석가모니에 의해 전륜성왕이 되리라는 예언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선덕여왕은 그 이름과 같이 많은 불사(佛事)를 닦았다.

 

▲김상현 교수

자장을 대국통으로 삼아서 불법을 크게 보호하고 일으켰고, 3년에는 분황사를, 4년에는 영묘사를 창건했으며, 5년(635)에는 황룡사에서 백고좌회(百高座會)를 개최했다. 신라 말의 최치원(崔致遠)은 선덕여왕을 중생에게 복덕을 준다는 여신 길상천녀에 비견하여 평했다.

 

“우리 선덕여왕은 흡사 길상천녀(吉祥天女)의 거룩한 덕화와도 같아서 동방의 임금이 되어서 서방의 덕을 사모하여 우러러 보았다.”


김상현 교수 sanghyun@dongguk.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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