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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법상, 확신하다

기자명 법보신문

제행무상·제법무아도 본래 그랬던 사실일 뿐

선사는 밤하늘 별보다 다양한
희로애락을 한마음으로 규합

 

 

▲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늘 검사를 받으며 살아왔다. 어린 시절에는 엄마 아빠가 시험관이었다.


“때치, 하지마.”
“어이쿠, 내 새끼 잘했어.”


그 덕분에 궁금증으로 덥석덥석 달려들던 버릇은 어느새 엄마 아빠의 눈치를 보는 버릇으로 바뀌었다.


“엄마, 이거 해도 돼?”
“아빠, 어떻게 해야 돼?”


학교를 다니고부터는 선생님이 시험관이었다. 선생님이 동그라미를 치면 옳은 것이고, 선생님이 가위표를 치면 틀린 것이었다. 즉 오답의 결정권자는 선생님이니, 문제의 답은 문제 자체보다 그 문제를 낸 선생님의 머릿속에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칠판에 밑줄을 긋는 구절을 보면, 그 학기 시험지의 내용을 대충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국사 시간이면 시대의 생활상과 질곡에 관심을 가지기보다 태정태세문단세~를 외우기에 바빴다.


어른이 되고도 검사를 받는 버릇은 좀체 줄어들지 않았다. 나의 능력과 실력은 상관과 동료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내 인생의 성패여부는 친구와 선후배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내 가정의 화목여부는 밥상을 마주한 아내의 표정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래서였을까? 상관 앞에서는 늘 ‘할 수 있다’는 말이 앞섰고, 동료 앞에서는 ‘모른다’는 소리를 삼갔고, 타는 차와 직장과 직함이 거론되는 동창회는 슬그머니 빠졌고, 전화기 너머로 아내가 헛기침만 해도 ‘내가 뭘 잘못한 걸까?’ 의기소침해 하였다.


이리저리 눈치만 보고 살다보니, 이젠 “제가 이런 걸 좋아해도 될까요” 하고 타인의 허락을 기다리고, “제가 지금 행복한가요, 불행한가요?” 하고 타인의 판결을 기다릴 지경에 이르렀으니, 눈치보고 검사받던 버릇이 골수에 사무친 병이 된 듯싶다. 그래서일까? 확신에 찬 생각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이들을 보면 저어기 부러워진다. ‘경덕전등록’에 다음 이야기가 전한다.


제자 법상(法常)이 대매산(大梅山)에 숨어살고 있었다는 소식을 듣고, 스승 마조는 똑똑한 학인을 한 명 골라 그곳으로 보내며 이렇게 묻게 하였다.


“화상께서 마조를 뵙고 무엇을 얻었기에 이 산에 사십니까?”
그러자 법상이 대답했다.
“마조 스님에게서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씀을 듣고, 나는 곧바로 이곳에 와 살았다.”
그러자 스님이 말하였다.
“마조 대사께서는 요즘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다른데?”
“요즘은 또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법상이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그 늙은이가 사람 속이기를 그칠 날이 없네. 너는 네 맘대로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라고 해라. 나는 그저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하겠다.”


그 스님이 돌아가 마조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자, 마조가 말하였다.


“대중이여, 매실[梅子:法常]이 익었구나.”


이때부터 그의 명성이 널리 퍼져 사방의 납자들이 그를 찾았다고 한다.

 

확신은 사실 수긍했을 때 발생
확인받을 깨달음이면 “멀었다”


1633년, 교황청 종교재판에서 천동설을 인정했던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재판장을 나서면서 혼자 구시렁거렸다고 한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주장했다고 해서 그날부터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 것도 아니고, 억압에 못 이겨 지동설을 포기했다고 해서 태양이 다시 지구 주위를 돈 것도 아니다. 이러쿵저러쿵 하거나 말거나 지구는 늘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 갈릴레이는 스스로 명백한[自明] 그 사실을 발견했을 뿐이다. 과학자들이 물질의 세계에서 펼쳐지고 있는 자명한 법칙[物理]을 설명했다면, 부처님과 선사들은 마음의 세계에서 펼쳐지고 있는 자명한 법칙[心理]을 설명한 분들이다.


부처님께서 “만들어진 모든 것은 반드시 파괴된다”고 말씀하셨다고 해서 그날부터 제행(諸行)이 무상(無常)하게 된 것이 아니고, “만물 어디에도 나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고 말씀하셨다고 해서 그날부터 제법(諸法)이 무아(無我)가 된 것이 아니다. 그건 본래 그랬고, 늘 그랬던 자명(自明)한 사실이다. 부처님은 너무나 명백한 이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았을 뿐이다. 선사들은 밤하늘의 별들보다 다양하게 구성된 인생사 희로애락(喜怒哀樂)을 하나의 마음[心]에서 일어난 현상으로 규합하고, 그 마음의 근원을 궁구해 나도 없고 너도 없고 옳고 그름도 없고, 얻음도 없고 잃음도 없고 성공 실패도 없음을 규명하신 분들이다. 깨닫고 나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본래 그렇다는 사실을 수긍했을 뿐이다. 그럼, 스스로 자명한 사실을 규명했는지 여부는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걸출한 납자인 협산(夾山)과 정산(定山)이 법상선사를 찾아가던 길에 말씨름이 벌어졌다. 정산이 말했다.

“삶과 죽음 가운데 본래 부처라고 할 만한 것도 없다. 그러니, 삶과 죽음이라 할 것도 없다.”

그러자 협산이 말했다. 

“살건 죽건 그대로가 부처다. 그러니 삶과 죽음에 미혹하지 않는다.”
대매산에 도착해 절을 올리는 자리에서 협산이 이 이야기를 꺼내고 물었다.

 “두 사람의 견해 중 어느 쪽이 스님의 견해에 가깝습니까?”
그러자 법상선사가 말씀하셨다.

“한 사람은 가깝고, 한 사람은 멀었다.”
협산이 물었다.

“어느 쪽이 가깝습니까?”


잠시 침묵한 법상선사께서 말씀하셨다.

“일단 내려가 쉬고, 내일 다시 만나 이야기하세.”
다음날, 동이 트자마자 협산이 찾아가 다그쳤다.

“두 사람의 견해 중 어느 쪽이 가깝습니까?”
그러자 법상선사가 싱긋이 웃으며 말씀하셨다.

 “가까운 사람은 묻지 않고, 묻는 사람은 가깝지 않다.”


확신(確信), 그것은 자명한 사실을 스스로 수긍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자명한 사실에 대한 믿음, 그것은 타인의 허락을 필요로 하지 않고 타인의 판단에 의해 좌지우지되지도 않는다. 누군가에게 확인받고, 채점 받아야할 깨달음이라면 법상 스님의 말씀처럼

 

“아직 멀었다.”

성재헌 tjdwogj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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