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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거둔(居遁), 푹 쉬다

기자명 성재헌

일체는 본래 나도 아니고 내것도 아니다

훔친 물건 쌓아두고 으스대면
도둑놈·파렴치한으로 비웃음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장명 스님 토굴에 일거리가 많단다. 오래 비워두었던 탓에 얼어터진 수도계량기와 고장 난 펌프, 깨진 변기를 교체하고 이제 뒷마무리만 남았단다. 여름철 익힌 노가다실력을 뽐낼 요량으로 간만에 신이 났다. 해서 오지랖 넓게도 대뜸 도와드리겠다고 나섰다. 빨간 고무 다라와 물통, 삽과 흙손, 연탄창고를 만들고 남은 블록 스무 장, 작은 손수레를 차에다 실고 지례 철물점에 들러 시멘트몰탈 네 포를 사고, 보일러실 깨진 유리를 대체할 합판과 실리콘도 구입했다. 그리고 바퀴가 내려앉은 묵직한 차를 끌고서 아내와 함께 거창과 함양을 돌아 산 높고 물 맑은 산청 오부마을로 접어들었다.


손바닥만 한 공터에 차를 세우고 담장을 낀 논두렁길을 돌아서자 오래도록 주인을 기다리다 삭아 내린 사립문이 보였다. 그 너머에 장명 스님이 싱긋이 웃고 있었다. 허나 뒷짐 진 손에 든 빗자루가 영 어색해 보이고, 마당을 건너는 걸음걸이가 왠지 헛헛해 보였다. 오지랖이 넘친 탓일까? 소임을 놓고 갑자기 닥친 한가로움이 낯선가보다 싶어 공연히 부산을 떨었다. 다짜고짜 점심상부터 차리라 아내를 다그치고, 시멘트가 묽네 짙네 실랑이를 벌이고, 미장이질이 서투네 멋지네 통박에다 공치사로 범벅을 쳤다. 그렇게 한나절의 소동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서재에 펼쳐져 있던 당시(唐詩)가 눈에 밟혔다.


‘뭐 하러/ 이 깊은 산골에서 사냐고?/ 꿀 먹은 벙어리 웃음이지만/ 맘은 절로 한가해라./ 살랑대는 실개울에/ 아득히 떠가는 복사꽃 / 에고, 별천지가 들통 나/ 북새통을 떨면 어쩌나.’


이백(李白)의 산중문답(山中問答)이었다. 상실의 아픔, 그게 TV 속 개그맨들의 걸쭉한 농담 몇 마디나 이웃의 위로 몇 마디로 덮일 수 있는 것이면 얼마나 좋을까? 벅벅 문대다보면 그래도 빠지는 양말의 묵은 때 정도라면 얼마나 좋을까? 큰절 기둥 서까래 하나하나를 내 몸 뼈마디처럼 여기면서 긴 세월을 돌보다가 한 순간에 놓아버렸으니, 그 허전함을 달래기 쉽지 않았을 게다. 해서 오른손의 남은 온기로 시린 왼 손등을 문지르듯 읽어보고 또 읽어보았을 게다.


차가운 빗방울 소리에 선잠이 들었다 깬 다음날 아침, 또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이번 달 생활비로 준비해 두었던 돈 봉투가 사라진 것이었다. 가슴이 덜커덩 내려앉았다. 그래도 희망은 남아있었다. 잘 보관한다고 책갈피에 꽂아두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책꽂이를 몽땅 헤집어보고, 빨래 통에 들어간 옷가지까지 뒤집어보았지만 봉투는 나오지 않았다. 혹시나 하던 희망이 좌절되고 ‘없어졌다’는 사실을 현실로 받아들이자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집을 비운 사이에 도둑이 든 걸까? 아니야, 도둑이 들었다면 다른 물건에 손댄 흔적조차 없을 리가 없지. 그럼 면식범의 소행이란 건데…, 누굴까? 근래 다녀갔던 사람이 누구지?’


의심의 눈초리를 뜨자 용의선상의 피의자 범위는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뒷집 할매, 옆집 할매, 심지어는 아내와 아들 녀석까지 미심쩍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그깟 돈 몇 푼에 이웃과 가족까지 범죄자로 몰아가는 스스로가 혐오스러웠다. 모과나무 아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스스로와 타협을 시작했다.

 

선사들은 진리라는 이름으로
명예를 탐하는 심보도 꾸짖어


‘도둑도 가난뱅이 집은 털지 않는다는데, 오죽하면 그걸 가져갔겠어. 남모를 사정이 있겠지. 일부러 기부하는 사람도 흔한 세상인데, 좋은 일했다고 마음먹자.’


그래도 영 개운치 않자 어깨너머 귀동냥한 이야기로 스스로 달랬다.


‘부처님께서 은원의 과보는 정확하다고 하셨어. 그래, 잊고 있었던 묵은 빚을 청산한 거야. 그게 아니면 복덕의 종자를 심은 셈이니, 나중에 이자까지 쳐서 돌아오겠지. 또 누가 알아? 횡재수가 생겨 로또라도 당첨될지?’


그리 마음먹자 강남 갔던 제비를 기다리는 흥부라도 된 듯, 찌푸렸던 이맛살이 슬그머니 펴졌다. 그렇게 어수선한 가슴을 어영부영 털어버리고 방으로 들어와 ‘전등록’을 읽어 내려갔다.


참 요상한 일이었다. 평상시엔 그리 쉽게 지나쳤던 ‘도둑’이란 단어가 눈에 턱턱 걸렸다. 한 소식 해보겠다고, 삼계의 대도사 노릇 좀 해보겠다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제일의제(第一義諦)를 묻고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를 묻는 학인들에게 선사들은 몽둥이를 휘두르며 이렇게 고함을 치곤하였다.


“예끼, 이 도둑놈아!”


계율을 생명처럼 여기는 납자들이 돈이나 물건을 훔쳤을 리 없다. 그런데 왜 선사들은 산 넘고 물 건너 찾아온 수행자들을 도둑놈 취급했을까? 남의 돈과 보석을 탐하는 것만 도둑질일까? 보고 들은 지식들을 차곡차곡 쌓아 ‘나는 이만큼 똑똑하고, 나는 이만큼 잘났다’며 으스대고, 더 똑똑하고 더 잘나고 싶어 사방으로 눈빛을 번뜩이고 귀를 쫑긋거리는 짓은 도둑질이 아닐까? 부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다. “일체는 본래 나도 아니고, 나의 것도 아니다.”


선사들은 진리라는 이름으로, 깨달음이란 이름으로 명예와 지위를 탐하는 그 못된 심보를 된통 꾸짖었던 것이다. 떳떳한 장물애비는 없는 법이다. 만약 훔친 물건을 쌓아두고서 자기 재산인 냥 으스댄다면 그는 도둑놈이란 꾸지람에 파렴치한이라는 비웃음까지 면치 못한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와락 부끄러움이 밀려들었다. 그러게 말이다. ‘그것’은 그냥 ‘돈’일 뿐이다. 그런데도 잃어버린 것도 ‘나의 돈’, 남의 손에 들어간 것도 ‘나의 돈’, 빚 갚고 복 심은 셈 치자고 자위한 것도 ‘나의 돈’, ‘나의 ~’라는 망상(妄想)의 꼬리표를 달고 내내 북새통을 떨었으니 뒷맛이 개운할 리 없다. 이 복잡한 심정들로부터 훌쩍 벗어나 편히 쉴 방법은 없을까?


어떤 학인이 용아 거둔(龍牙居遁)선사에게 물었다. “옛사람들은 무엇을 얻었기에 단박에 푹 쉬었습니까?”


용아 스님이 재미난 이야기라도 들려줄듯 손짓으로 학인을 불렀다.

“솜씨 좋은 도둑놈이 구중궁궐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천신만고 끝내 황제의 안방까지 들어갔데.”
“그런데요?”
눈과 귀를 세우고 다가오는 학인에게 용아 스님이 비밀처럼 속삭였다.
“그 방이 텅 비었더래.”


진정한 휴식(休息), 그건 휑하니 빈 방에 들고서야 비로소 찾아드는 것인가 보다.


성재헌 tjdwogj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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