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년기 맡은 법당 향내음 평생을 간다”

기자명 법보신문

불교의 가르침에 대한 향수(鄕愁)

아기는 최초의 경험을
놀라울 정도로 잘 기억


향내음 맡고 절하면서
법당의 고요함 복원해

 

 

▲ 어린 시절에 영적인 장소에서의 특별한 경험은 연결과 통합의 과정을 거쳐 ‘의지처’가 된다. 이것은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강력한 효력의 영구적 선물이다.

 

 

본 칼럼을 쓰기에 앞서 지난 글에서 자녀양육과 관련된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불교적인 해법 두 가지에 대해 추가 칼럼을 작성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수미런던 법사는 논거가 부족하여 독자들이 읽기에 부적합다고 판단, 게재하지 않기로 하였음을 밝히오니 널리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나의 아버지는 내가 태어난 지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내게 산스크리트어 경전 ‘바가바드기타’ 전편을 읽어 주었다고 하셨다. 왜 그렇게 하셨냐고 여쭈었다. 아이들의 마음은 감수성이 예민하기 때문에 내가 맞이하게 되는 세상과의 첫 접촉은 가장 숭고하게 이루어지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말씀에 대해 나는 어쩔 수 없이 낄낄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아버지는 그 당시 20살 밖에 되지 않았고 아기들에 대해서 기묘하고 고지식한 지식들을 많이 갖고 있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그와 같은 노력은 갓난아기의 마음에는 별달리 영향을 주지는 않았겠지만 그 이후의 시기에 겪은 경험들은 오늘날까지 내게 남아있고 그러한 경험들이 나의 인격 형성에 영향을 미쳤음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당시 우리 가족은 선불교 사찰 또는 선원수행의 재현을 시도하면서 선불교 수행을 진지하게 실천하는 불자 가족들과 공동체를 이루어 살고 있었다. 거의 9년 동안 이러한 삶은 나의 전부였던 것이다. 이 공동체를 떠난 지 여러 해 뒤 어떤 곳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는 내 어린시절의 그 삼나무 향(香)을 피우고 있었다. 그 향내를 맡게 되자 나는 곧바로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어린 아이로서 내가 그렇게 많은 시간을 보냈던 그 선방의 신비감, 신성함 그리고, 고요함을 바로 그 시간 그 장소에서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엄마가 되었을 때 어린 시절 그렇게 재미있어 했던 많은 일들을 자녀들에게도 경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 이런 나의 필요성은 불법(佛法)에 대한 애착 그리고, 마음챙김을 유지하고 서두르지 않고 조용한 가운데 되돌아보는 삶의 방식에 대한 애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작용했다. 몇 해 전 여름 우리는 한국에서 머무를 기회가 있었다. 일반적인 가정에서 머무를 수도 있었고 친구가 주지 소임을 맡고 있는 사찰 바로 옆 아파트에 머무를 수도 있었다. 나는 사찰에 머무를 것을 강력하게 희망했다. 나의 자녀들이 이른 나이에 예불 소리를 듣고 향내음을 맡고 불상을 보고 경외감을 느끼고 스님들처럼 편안하게 느끼고 헌신적인 불자 공동체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알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곳에 머물렀다. 이러한 어린 시절의 인상이 자녀들의 미래에 어떠한 형태로든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부모들이 자녀들을 위해 자신의 어린 시절 경험을 재현해내는 데 있어서 자신만의 어떤 패턴이 있다는 것을 부모 스스로 자각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얼마 전 작가 ‘앤 엔라이트 (Anne Enright)’의 신상이야기인 ‘실수투성이 초보엄마의 아기만들기’(Making Babies : Stumbling into Motherhood)’에서 멋진 글귀를 발견했다. 작가는 자신의 아기가 처음으로 맨발로 풀밭을 느끼게 했고 아기가 최초의 이러한 경험에 대해 얼마나 즐거워하는가를 지켜보는 장면을 묘사했다. 그녀는 “때때로 세상에 대한 나 자신의 향수(鄕愁) 속으로 내 자녀를 이끌고 들어가는 것처럼 느낀다”고 적었다.


‘엔라이트’의 예리한 관찰내용은 우리 모두에게도 적용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을 위한 우리의 선택에 향수가 상당 부분 역할을 하게 된다. 과거 경험한 일 중에서 다정한 기억으로 남는 사건들이 있고 자녀들을 위해 그 일을 다시금 만들어 냄으로써 우리는 어른으로서 어떤 형태로든 그 일을 다시 체험하게 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자녀들이 그것을 즐기는 것을 목격한다. 그런 과정에서 우리는 만족감과 환희를 느끼게 된다. 나와 남편은 우리 자신의 어린 시절 애완동물을 그렇게도 좋아했던 기억을 느끼고 있었고 새끼 고양이 두 마리를 데려다 길렀다. 우리의 아이들 역시 그와 똑같은 경험을 하기를 바랐다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다.


자녀들의 영적인 삶에 대해 적용해 본다면 우리는 불자의 길에 대한 호감을 형성하는 바탕을 마련하는데 향수의 힘을 차용해 올 수 있다. 사찰과 같은 풍부한 감각적 환경에 아이들을 노출시킴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불교전통, 부처의 가르침, 건강하고 깨어있는 삶을 함께 추구하는 친구들로 구성된 공동체와의 관계를 발달시킬 수 있는 길을 제공하게 된다. 불교의 가르침은 감각적 쾌락을 억제하기 때문에 관능성과 영성(靈性)이 서로 뒤얽히는 것을 최소화하게 된다. 전 생애에 걸쳐 감각적 체험을 통해 종교와 접촉하게 되는 사람들에게 초의 불빛은 신비하고 예불소리는 깊은 편안함을 주게 된다. 부처의 미소는 사람들로 하여금 삶에 대해서 미소 짓도록 일깨운다. 이러한 경험들은 우리의 ‘본래 자리’라는 느낌을 주고 우리는 그 곳에서 진실로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다.


전적으로 불교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누군가는 아이들에게 ‘향수심’을 의도적으로 심어주는 것은 건전하지 못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제는 더 이상 손안에 넣을 수 없는 과거의 어떤 것에 대한 갈구 또는 열망의 대상이 되는 것은 여하튼 향수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다. 순전히 불교적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는 아이들로 하여금 현재의 순간에 살도록 그리고, 그 순간을 사랑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의 자연스런 존재 방식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과거 그리고 어린시절은 인격 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되고 나머지 전 생애 동안 우리와 함께 한다. 그래서 이것을 인식하는 다른 방식이 있다고 생각하며 이를 명확히 하고자 나의 경험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내가 매우 어렸을 때, 아마도 네 살 또는 다섯 살 무렵 선(禪) 공동체 소속의 한 분이 부처님에게 바르게 절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그것은 한국사찰에서 행하는 방법과 거의 같았다. 그 이후 32년 동안 단속적으로, 하지만 몇 해 동안은 규칙적으로 이렇게 절하는 방법을 따라서 했다. 내가 20대이던 어느 날 정확히 무슨 일이었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특별히 나쁜 일이 벌어졌다. 그것은 너무도 어려운 상황이었고 다만 나는 몸을 구부려 내 아파트에 있는 불상 앞에서 절을 했다. 내 손바닥이 머리 옆에 오도록 절을 하면서 부처님께 눈물을 흘렸다. 나는 매우 슬펐지만 그 절이 나에게 얼마나 즉각적으로 편안함을 가져다주었는가를 기억한다. “가르침이 나의 귀의처이다. 이것이 바로 ‘귀의’가 뜻하는 내용이다”라고 생각했다.


절하기를 통해 ‘나’ 혼자만이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나는 나와 서로를 사랑하는 전체 공동체 속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절하기가 어떻게 내 삶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친절의 실타래, 상호 관련과 연속성의 실타래의 일시적인 끄트머리가 되는가를 느꼈다.

 

▲수미런던
우리가 어린 시절에 영적인 길에서 경험하게 된 향수의 장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될 경우, 향수가 어떻게 해서 연관성, 통합성, ‘의지처’를 생성해 내는 능력을 갖게 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우리 부모가 자녀들에게 줄 수 있는 강력한 효력을 지닌 영구적인 선물이 될 것이다.

 

수미런던 듀크 불교공동체 지도법사

번역=백영일 번역편집위원 yipaik@wooribank.com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