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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무명(無明)

무명은 편견에 빠진 상태
사성제 모르는 것도 무명
무명 제거가 12연기 취지

 

무명이란 무엇인가. 늙음·죽음(老死)으로 귀결되는 십이연기의 지분들 가운데 맨 처음 등장하는 항목이다. 이것을 조건으로 지음(行) 이하 의식(識)이라든가 정신·물질현상(名色) 따위로 이어지는 십이연기의 연쇄적 과정이 뒤따르게 된다. 나머지 십이연기의 모든 지분들은 바로 이 무명에 의존하여 존재한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무명이 있을 때 나머지 지분들이 있고 무명이 없으면 나머지 모든 지분들도 없다. 무명이 발생하므로 나머지 지분들이 발생하고 무명이 소멸하면 나머지 모든 지분들도 소멸한다.”


결국 늙음·죽음(老死)이라는 괴로움의 실존은 무명이라는 장막에 갇힌 까닭에 맞이하게 되는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이다. 십이연기의 가르침은 이러한 최초의 무명을 제거하는 것을 본래의 취지로 한다고 할 수 있다. 무명이란 빨리어(Pāli)로 아비디야(avidyā)이며 ‘지식의 결핍(nescience)’으로 옮길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자연과학적 지식의 부재가 아니라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십이연기의 무명이란 괴로움을 불러일으키는 능동적인 힘을 지닌다. 이것은 어떠한 사실에 대해 순박하게 모르는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무명이란 오해와 편견에 사로잡혀 부적절한 사고와 정서에 휩쓸리는 경우를 가리킨다.


무명의 의미는 뒤따라 발생하는 지음(行)을 떠올릴 때 더욱 분명해진다. 예컨대 누군가를 오해하여 그 사람을 마주하는 것이 불편해졌다고 치자. 그러한 불편한 심경은 몸(身)이나 말(口)이나 마음(意)의 방식으로 작용하면서 서로의 관계를 알게 모르게 더욱 뒤틀리게 한다. 거기에서 그 상황을 야기한 최초의 오해를 무명에 비유할 수 있다면 그로 인해 발생한 불편하고 부적절한 정서와 행위는 지음 이하의 지분들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십이연기의 가르침은 이와 같은 왜곡된 과정으로부터 벗어나라는 메시지로 이해할 수 있다.


초기불교에서 무명이란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무지로 일관되게 설명된다(SN. II. 4 등). 즉 인간 존재가 괴로움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苦聖諦), 그것의 원인은 내면의 갈애에 있다는 것(集聖諦), 그러한 괴로움은 극복될 수 있다는 것(滅聖諦), 그것을 극복하는 길이 존재한다는 것(道聖諦)에 대해 모르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결국 사성제를 모르는 까닭에 바람직하지 않은 정신적·육체적 과정들이 촉발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무명이란 사성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서 헤매는 상태에 다름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사성제에 대한 무지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내면의 탐욕과 갈애를 제압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사실 사성제를 깨닫는 과정에는 괴로움에 대한 완전한 이해(pariññāta), 갈애의 끊음(pahīna), 소멸의 실현(sacchikata), 팔정도의 닦음(bhāvita)이 포함된다. 따라서 무명의 제거를 통해 십이연기의 사슬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은 이러한 사성제의 체득과 동일한 차원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한 이유에서 일부 경전에서는 십이연기의 전체 내용을 사성제의 구조에 편입시켜 설명하기도 한다(AN. I. 177).


십이연기에 대한 통찰은 단순한 두뇌게임이 아니다. 이것은 사성제에 대한 깨달음을 전제로 한다. 즉 깨달음의 체험이 있어야만 지음(行)이라든가 의식(識)을 걸쳐 늙음·죽음(老死)으로 연결되는 연쇄적 과정에 매이지 않게 된다. 비로소 초연한 관찰자로 남아 괴로움이 증폭되는 양상을 꿰뚫는 것이 가능하다.

 

▲임승택 교수

따라서 십이연기는 깨달음을 이미 실현한 상태에서 얻는 통찰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이 가르침에 대한 묘사는 깨달음을 얻고 난 이후의 붓다가 스스로의 깨달음을 반조하는 과정에서 최초로 등장한다(Vin. I. 1; Ud. 1).


임승택 경북대 철학과 교수 sati@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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