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6. 찻집 할머니, 신통을 부리다

기자명 법보신문

찻잔에 조심조심 차 따르는 일상이 신통

신통력이란 말에 놀란 스님들
찻집 노파 일상심으로 깨우쳐

희한한 언행으로 혹하는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신통과 무관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몇 년 전, 한 해가 저무는 이맘 때였다. 찬바람에도 아침마다 아버지를 찾아오시던 갈말 할아버지가 하루는 대뜸 나에게 말을 거셨다.


“자네, 내 올해 토정비결 좀 봐주게.”
“저, 그런 거 모르는데요.”
“불교공부를 했다면서 그것도 몰라!”
재작년 여름, 첫 손자를 본 이모가 들뜬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애기 이름 좀 지어줘라.”
“손자 이름은 할머니가 정을 담뿍 담아 지어줘야지. 아님 아버지가 짓든지.”
“제대로 지어야지. 관운에 재운까지 팔자가 술술 풀리게.”
“나 그런 거 모르는데.”
“그것도 모르면 도대체 네가 안다는 건 뭐냐!”
작년, 제법 큰 식당을 운영하면서 목에 힘 좀 주던 친구가 어느 날 우거지상을 하고 물었다.
“요즘 통 장사가 안 되네. 어떤 장사로 바꾸면 좋을까?”
“그걸 왜 나한테 묻냐? 돈 버는 일이면 네가 더 잘 알잖아.”
“밥장사는 내 사주에 안 맞나봐. 사주에 맞아야 운도 따른다던데.”
“나 그런 거 모르는데.”
“뭔 신통력이 좀 있나 했더니, 너도 별 수 없네!”
지난 달, 제법 깊은 인연을 맺었던 보살님이 간만에 전화를 했다.
“우리 아이가 결혼하려고 여자를 데려왔어요.”
“벌써 며느리 보시네요. 축하드립니다.”
“축하는요, 결혼시켜도 좋을까 걱정이 앞서네요.”
“왜요? 며느릿감이 맘에 안 드세요?”
“아뇨, 애는 얌전하고 참 착하던데….”
“애들이 서로 좋다고 하고, 시부모가 보기에도 참하면 됐죠. 뭐가 걱정이세요.”
“잠깐 좋아서 들뜨는 건 쉽지만 궁합이 안 맞으면 서로 힘들고 오래 못가잖아요. 그래서 전화 드렸어요.”
“궁합요? 저 그건 거 모르는데.”
“법사님이 그걸 모르시면….”


점잖은 체면에 “순 엉터리”란 소리를 대놓고 할 수도 없고, 초점이 다른 사람들에게 “불교는 그런 게 아니고~” 하며 관심사 밖의 얘기를 주절주절 풀어놓을 수도 없으니, 이럴 때마다 난감해지긴 그나 나나 마찬가지다.


신통(神通), 이도저도 못할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때 척! 하니 해결할 신통방통한 묘수를 찾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허나 다들 하늘에서 돈벼락이 치게 하고 마당에서 금덩이를 캐게 할 혹! 하는 신통에만 눈길이 쏠려있으니, 그게 문제다. 설령 로또에 당첨된다 해도 골머리 지끈지끈할 일은 다시 생기기 마련이니, 그런 건 평온한 행복을 영원히 누리는 신통방통한 묘수가 되진 못한다.


신통, 경전과 어록에 수없이 등장하는 단어이다. 부처님과 조사들이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한 순간에 거두어주고, 머리털이 곤두서는 공포를 한 순간에 쓸어버리고, 미쳐 날뛰는 자의 뜀박질을 한 순간에 멈추게 하고, 삶의 무게에 지쳐 쓰러진 자를 벌떡 일으켜 세우셨으니, 불법을 배우는 자들이 자신도 그럴 수 있기를 바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허나 삼계의 대도사로 존경받으려면 손가락질로 황금이 묻힌 곳을 찾아내고, 손길 한번으로 난치병을 치유하고, 공중부양쯤은 방귀뀌듯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니, 그게 문제다. 물에 빠진 사람 건져놓으면 보따리 내놓으라 하는 법이다. 설령 벼락부자로 만들어주고 다 죽어가는 사람 살려냈다 해도 그는 다시 찾아와 울트라 캡 짱 벼락부자가 되고 싶다며, 사람이 백년은 살아야하지 않겠냐며 애걸복걸할 것이니, 그런 건 반복되는 고통의 수렁에서 영원히 건져주는 묘수가 되지 못한다.


그런데도 선정과 지혜를 닦으면 마술사가 되는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월창거사가 편집한 ‘선학입문(禪學入門)’에 이런 내용이 있다.


“선정을 닦을 때 신비한 현상에 혹하게 되면 귀신이 따라붙는다. 그러면 귀신의 힘으로 인해 갑자기 지혜가 날카로워지고 말솜씨가 유창해지기도 하며, 길흉사를 척척 알아맞히고 신비한 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그런 기적을 보이면 사람들이 감동해 성현이라 칭송하고 무조건 그에게 복종한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는 여전히 삼독의 힘에 지배당하고 있는 중생일 뿐이다. 탐욕과 분노에 휩쓸려 마음도 삿되고 행위도 거짓된 그는 귀신의 권속이지 부처님의 제자가 아니다.”


이것만 보아도 희한한 언행으로 사람들의 눈을 혹하게 하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신통(神通)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럼, 불법에서 말하는 신통은 과연 뭘까? ‘전등록’에 다음 이야기가 전한다.


스님 세 분이 목을 축이러 길가 허름한 찻집에 들었다. 찻집 주인은 웃음이 푸근한 호호 할머니였다. 공손한 합장으로 스님들을 맞은 할머니는 정성껏 다린 차와 찻잔 세 개를 소반 위에 올리고서 차탁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스님들, 불법을 배웠다면 모름지기 신통을 갖춰야하지 않겠습니까? 신통력을 가지신 분만 차를 드십시오.”


세 스님은 멀뚱멀뚱 서로 쳐다볼 뿐, 감히 찻잔에 손을 대지 못했다. 그러자 할머니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 늙은이가 신통을 부려볼 테니 구경하십시오.”


그리고는 찻잔을 들어 스님들 앞에 차례차례 놓고 조심조심 차를 따랐다.


신비하고 비밀스러운 능력을 보여 달라고 조르는 제자에게 숭악(嵩嶽) 혜안국사(慧安國師)는 윙크를 해주었다고 한다. 그 순간, 그 제자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다 한다.


돌아볼 일이다. 눈짓, 이게 어떻게 일어나는 일일까? 찬찬히 돌아보면, 거기엔 나고 없고 내 것도 없다는 걸 깨닫게 되니 말이다. 이렇다 할 실체가 없는데도 천태만상의 현상이 펼쳐지는 인연의 신비로움에 절로 입이 떡! 벌어질 것이니 말이다. 그러면, 찻집 할머니처럼 일상의 행위 속에서 이고 진 고단한 짐을 단박에 내려놓는 또 내려놓게 하는 묘수를 부릴 테니 말이다. 

 

성재헌 tjdwogjs@hanmail.net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