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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계룡산 등운암

기자명 법보신문

중생들 시름 덜어 구름 실어 보내다

665년 부설거사 아들 등운 창건
계룡 하늘과 가장 가까운 사찰
조선 운 보호하려  압정사 개명
전기·수도 없지만 행복한 도량

 

 

 

▲시리도록 푸른 계룡산 하늘이 등운암 대웅전 지붕 위에 앉았다. 처마 끝 풍경은 천왕봉에서 뻗어 내려오는 산등줄기를 소기 없이 바라본다. 지붕 위에 쌓인 하얀 눈이 이내 차갑게 투명하게 얼어붙었다.

 

 

“그래, 이곳이야. 여기서 고개 숙여 마음 살피며 꼿꼿이 출가 초발심 새기고 윤회의 고리를 끊으리라.”


등운은 턱까지 찬 숨 고르며 주먹을 꽉 쥐었다. 계룡산 연천봉으로 향하는 길은 정상 200m 아래에 자리한 평지로 발을 뻗고 있었다. ‘이만하면 움막 하나는 짓고 수행할 수 있겠다’ 싶었다. 마음을 다잡자 비로소 발밑이 눈에 들어왔다. 계룡산 최고봉인 천왕봉에서 좌우로 뻗어 내려간 산등줄기가 펼쳐졌다. 마침 불어오는 한줄기 산바람이 뜨거운 몸을 식혔고, 바람처럼 지난날이 스쳐갔다. ‘아, 아버지….’ 불연은 항상 예상과 어긋났다. 평범한 부모의 정을 먹고 자라는 그런 성장, 누구나 가는 길을 비켜서게 했다. 그러나 누구나 쉽게 갈 수 없는 길로 안내하기도 했다.


신라 진덕여왕 때 진광세라는 영민한 아이가 경주에서 살고 있었다. 태어나면서 영특해 사리를 쉽게 깨우쳤다.

 

다섯 살에 불국사로 출가해 부설(浮雪)이라는 법명을 받아 지녔다. 스님은 영희, 영조 두 도반을 만나 전국 각처를 바람처럼 돌아다니면서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를 찾아 수행했다. 지리산에서 3년, 천관사에서 5년, 변산에 들어가 묘족암을 짓고 10년을 정진했다. 문수보살 상주도량인 오대산을 찾아가던 길이었다. 날은 저물고 때마침 봄비가 그치지 않았다. 김제 망경현 백연지(白蓮池) 옆 구무원의 집에서 하루를 보내게 됐다.


구씨 집엔 무남독녀 묘화라는 여식이 있었다. 한 가지 흠이 있다면 말을 못했다. 그런데, 묘화가 곁눈질로 힐긋힐긋 부설을 훔쳐보기 시작했다. 남루한 복색이었지만 형형한 눈빛에 마음이 동했다. 그러다 부설의 설법을 듣곤 갑자기 말문이 열리자 묘화는 마음을 굳혔다. ‘이 어찌 기묘한 인연이란 말인가. 내 이 사람과 부부연을 맺으리라.’


묘화는 아버지를 졸랐다. 부설은 단박에 거절했다. ‘속세를 등진 수행자가 깨달음을 구하지 않고 어찌 부부의 연을 맺는단 말인가.’ 그러자 묘화는 부질없는 목숨도 끊겠다는 결연함을 보였다. 끈질긴 구애는 부설의 자비심을 움직였다. 묘화와 혼인해 슬하에 아들과 딸을 뒀다. 부설 그에겐, 스님 대신 거사라는 칭호가 붙었다. 부설은 비록 속세에 육신을 뒀으나 마음만은 사물의 밖에 높이 두고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초연히 삼업을 닦고, 육바라밀을 널리 행하고, 내외 경전을 통달했다.


산과 들은 때론 초록빛으로 때론 황금 혹은 붉은빛으로 때론 하얀빛으로 마흔 번 옷을 갈아입었고, 오대산에서 정진했던 도반들이 부설을 찾았다. 부설은 도반의 눈치가 달라졌단 사실을 알아챘다. 자신을 환속한 타락자로 보는 도반의 눈초리가 마음에 걸렸다. 부설이 제안했다. “우리, 오랜만에 만났으니 서로의 살림살이를 꺼내 보세나.” 경지를 가늠했던 게다. 병 3개에 물을 담아 처마 끝에 매달았다. 셋은 지팡이로 물병 하나씩을 쳐 보자고 했다. 두 도반이 물병을 치자 깨진 병에서 물이 쏟아졌다. 부설도 쳤다. 병은 깨졌으나 물은 쏟아지지 않고 처마 끝에 그대로 매달렸다. 부설은 그제야 무겁게 입을 열었다. “진성은 본래 영명하고 밝아 항상 머물러 있는 것이, 물이 공중에 매달려 있는 것과 같다.” 두 도반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고 부설을 스승으로 모셨다. 등운과 월명은 두 스님 앞에서 삭발하고 삼보에 귀의했다.


파르라니 머리카락 밀 때 칼날의 서늘함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출가 초발심이 등운을 날카롭게 휘감고 지나갔다. 등운은 식어버린 이마의 땀을 훔쳤다. 계룡산 줄기 따라 펼쳐진 금강과 평야를 바라보며 남매 월명이 월명암에서 수행을 잘 하는지 궁금했다. 원하든 원치 않았든 남매는 서로에게 찾아온 불연을 꽃피우리라 결심했던 게다. 등운은 계룡산 연천봉 아래 절을 짓고 등운암(騰雲庵)이라 불렀다. 구름이 오르는 암자이거나 암자가 구름을 탔거나 후대인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었다. 세속 번뇌 구름에 앉혀 둥둥 흘려버리면 그만이었다. 서기 665년, 신라 문무왕 5년이었다.


‘그 서원, 어디쯤일까.’ 12월12일 아직 못다 녹은 계룡산 눈길을 오르며 문득 드는 생각을 놓지 못했다. 전북 부안 월명암에서 발견된 필사본 ‘부설전’ 이야기가 계룡산 등운암 찾은 마음을 부여잡고 있었다. 소복이 쌓인 눈 사이로 난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누군가 먼저 오르지 않았다면 길도 없었을 텐데, 등운도 이 길을 걸었을까. 길은 말이 없었다. 다만 생각이 요란하게 많은 질문을 길에게 던지고 스스로 답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나뭇가지에 앉은 눈덩이가 녹아떨어지는 소리와 밟히는 눈소리, 이어폰으로 전해오는 고 김광석의 ‘너무 깊이 생각하지마’ 노랫말과 선율만 들렸다. 연천봉(738.7km)을 700m 앞두고 만난 돌탑 3개는 길을 사이에 두고 양 옆으로 나란히 앉았다. 흰 옷 곳곳에 껴입고 등운암 오르는 기도객들 신심을 차곡차곡 쌓았다. 누군가 올려놓았을 돌탑 속 작은 다보탑에 마음이 쓰였다. 작지만 오히려 크게 보이는 건 왜일까. 먼저 돌을 쌓아둔 기도객의 마음에 생채기 하나 만들지 않으려 살포시 놓았으련만. 왠지 모르게 단단하다.

 

 

▲계룡산 연천봉 정상 바로 아래 자리한 등운암. 달랑 대웅전과 요사채 뿐이다. 단출하다. 그래서 견고하고 절절하다.

 


1시간30분쯤 오르자 등운암에 이르는 돌계단을 마주했다. 누구든 상상할 수 있었을까. 저 하늘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 계룡산을 하얗게 뒤덮은 눈을 내렸을 거라고. 겨울하늘은 등운암 대웅전 지붕 위에 앉았고, 처마 끝 풍경은 천왕봉에서 뻗어간 산등줄기를 침묵으로 바라봤다. 지붕 위에 쌓인 하얀 눈이 이내 차갑게 굳어 투명하게 얼어붙었다. 단출했다. 계룡산 연천봉 정상 200m 아래 자리한 등운암은 덩그러니 대웅전과 요사채 뿐이었다. 그래서 견고하고 절절했다. 등운암(주지 제민 스님)은 조계종 제6교구본사 마곡사 말사 신원사 산내암자로 계룡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 신원사에서 2.7km를 올라야 했다. 절 마당에 서면 계룡산 최고봉인 천왕봉(845km)과 그 봉우리에서 남쪽으로 뻗은 산줄기가 시리도록 한눈에 들어온다.


눈으로 쌓여 적막했던 도량에 윤기가 돌았다. 대웅전에서 ‘반야심경’ 독경소리가 들려왔다. 눈은 대웅전과 요사채로 이르는 길만 발자국이 깊게 패였다. 누군가 바지런하다는 증거다. 조심스럽게 눈길을 따라간 시선 끝엔 등산화 3켤레가 나란히 놓였다. 막 예불이 끝나는 참이었다. 법당을 나서는 기도객을 좇아 천막 공양간으로 향했다.


공양간 물은 얼었고 공기는 찼다. 대전서 오전 9시30분 버스를 타고 왔다는 기도객 3명은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언 물을 깨고 설거지를 하고 불씨 지펴 라면을 끓였다. 살얼음 앉은 김치를 그릇에 담았고, 누룽지를 만들었다. 공양간 물은 시원했고 공기는 훈훈했다. 기도객들은 2007년부터 등운암과 인연을 맺었다 했다. 공양주 소임을 맡고 있는 60대 노보살은 반년동안 대전서 하루도 빠짐없이 온 적도 있단다. 등산 왔다 만난 주지 제민 스님과 만남이 그들을 등운암으로 이끌었다. 50일간 암자를 떠나지 않고 백중기도를 올리는 스님의 원력에 감화된 게다. 사실상 폐사지나 다름없던 도량을 제민 스님 원력으로 시작한 대웅전과 산신각 불사 땐 인부들 밥 해주러 대전서 등운암까지 매일 올랐고, 겨울김장도 법당 청소도 그네들 몫이 됐다.


뚝딱, 라면 4그릇과 쌀밥, 무김치와 배추김치 그리고 누룽지가 식탁에 올랐다. 모든 게 열악한 이곳에서 4명의 생명을 이어줄 공양이 마련됐다. 공양주 보살은 공양간 한쪽에 쌓인 쌀포대를 보며 “그래도 넉넉하다”며 웃었다. 전기가 들지 않고, 지하수를 쓰는 통에 겨울이면 물이 얼고, 여름이면 공양간에 습기가 차는데도 싱글벙글이었다. “이만한 것도 감사합니다. 한끼 공양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어딘가요. 부자입니다.”

 

 

▲대웅전서 예불을 드리는 등운암 신도들.

 


공양미의 출처를 물었다. 전기가 없어 분명 지게질로 공양물을 올리는 게 분명했다. 공양주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천안에 사는 한 거사가 매주 토요일마다 쌀을 지고 공양 올린 뒤 법당에 참배하고 내려간다 했다. 건설업을 하다 사정이 어려웠는데 부처님 가피를 입자 등운암 공양은 도맡아 한단다. 난로 기름, 종이컵 등 부족한 게 있으면 토요일마다 지게 메고 암자를 찾아 공양 올리며 부처님께 참배한다고.


언제부터인지 네팔인 구쑴(47)씨도 등운암에 머물고 있다. 하루도 빼먹지 않고 부처님께 마지를 공양하고 암자에 필요한 물품을 지게질하며 도량을 매일같이 손질하는 게 구쑴씨다. 아직 한국말이 서툴러 반말과 존댓말이 섞여 나오지만 시골 옆집 아저씨 같은 푸근한 웃음이 정겹다. 혼자 스쳐갈 뻔했던 등운암서 만난 인연으로 주린 배 달래고 마음도 살찌운다. 부처님께 합장이다.


등운암은 연천봉에 새겨진 ‘방백마각 구혹화생(方百馬角 口或禾生)’이라는 글씨로 유명했다. 조선왕조가 망하고 정씨가 왕위에 오른다는 얘기로 ‘정감록’의 예언을 뒷받침하는 구실을 했다. 건국 482년 서기 1873년경 조선이 망하고 정씨가 집권한다는 참언으로 받아들여지게 됐다. 예언이 다가오자 명성황후는 정씨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등운암을 누를 압(壓), 정씨 정(鄭) 절 사(寺)인 압정사로 고치기도 했단다.


뜻밖에 인연으로 객 신심에 따뜻한 피가 돌았다. 등운이 갖가지 시름을 구름 위에 앉혀 흘러버렸을 이곳 등운암. 1300여년 넘도록 구름은 흐르고 흘렀고, 등운은 세속 시름을 구름에 흘려보냈다. 그러나 암자 세우며 서원했던 구도열정은 구름편으로 부치지 않았다.


심란했던 마음을 시린 겨울하늘 위 구름에 실려 보낸다. 처마 끝 풍경이 그제야 바람결에 입을 연다.  

 

최호승 기자 time@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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