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펜 스님 역시 일념을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남아 있는 말씀으로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일념은 진종의 일념과는 매우 다르다. “모든 불법은 그 자체의 일념 이외에는 말하지 않는다. 삼세는 곧 일념이다.” 또 “그 자체의 일념 이외에 기약하는 바가 없는 것을 무후심(無後心)이라 한다.” 또한 “다른 생각을 겸하지 않는 명호를 마음에 지녀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말들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그 역시 일념을 설했지만 그것은 한번이라는 의미의 일념은 아니다. 기약하는 바가 없고, 잡념이 없으며, 무후심의 일념인 것이다.
모든 염불은 각각 염불 자체의 염불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을 가리켜서 그 자체의 일념이라 말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생각 생각이 일념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일념에는 이미 칭명하는 나도 없고 칭명되어지는 부처님도 없다. 거기에 왕생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각 생각이 왕생이다.
명호 이외에 왕생은 없으며, 명호가 곧 왕생이다. 이리하여 잇펜 스님에 의하면 보답과 감사를 위한 명호 역시 없다. 명호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공덕 없는 공덕을 설했던 것이다. “오로지 칭명하는 것 이외에 다른 군더더기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일념도 군더더기, 다념도 군더더기, 보사(報謝) 또한 군더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리하여 스님은 말씀하셨다. “일념 십념도 본원에는 없고,…명호의 그 자리에는 일념이니 십념이니 하는 수(數)는 없다.”
이 일념이나 십념이 수가 아닐 때, 비로소 진정한 염불이다. 정히 ‘일’에 대한 ‘다’, ‘다’에 대한 ‘일’에 염불의 의미가 달려 있는 것은 아니다. 생각 생각이 일념이고, 일념이 생각 생각이 아니면 안 된다. 끊어짐이 없는 일념이다. 그것은 일념을 부정한 다념도 아니고, 다념을 부정한 일념도 아니다.
항상 새로운 일념을 상속하는 것이야말로 다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생각 생각의 다념이 언제나 새로운 일념이 아니라면, 그것을 어떻게 살아있는 다념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일념과 다념이 둘 아닌 곳에 진정한 염불이 있는 것이다. 일념이 곧 다념이고, 다념이 곧 일념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염불도 일생에 한번 뿐인 염불이어야 한다. 항상 “지금 염불하고 있다”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일찍이 염불했다”라든가, “지금부터라도 염불하겠다”라는 식의 염불이어서는 안 된다. 더구나 무엇 무엇을 위하여 염불한다는 것은 아직 상대적인 염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염불에는 주체와 객체의 구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염불은 염불 그 자체의 염불이 되리라.
내가 칭명하는 염불처럼, 또 한 번 외우는 염불, 많은 수로 헤아리는 염불, 보답과 감사를 위한 염불에 어떤 의미가 남아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염불은 무념의 염불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텅빈 염불, “그저 염불”이 되어야 한다. 아니, 이러한 군더더기조차도 실제로는 필요 없다. “오직 염불할 뿐”이라 하셨던 호넨 스님의 말씀이 또한 절실하게 떠오르는 것은 아닌가. “그저”라는 글자에 천근의 무거움이 있다.
|
세 종파 모두 염불종이라는 것에는 다름이 없지만, 정토종은 다념의 측면을 오직 중시했다. 진종은 일념의 측면을 중시했다. 시종은 일념이 곧 다념이라생각했다. 그래서 생각 생각이 일념이고, 끊임없는 일념이 되었던 것이다. 시종에서의 일념은 횟수가 아니라 횟수가 없는 것이다. 다념이라 해서 그 횟수에 구애됨이 없는 것이다. 일념과 다념이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기 염불이 좋으리라.”(묘젠호닌/明禪法印).
일본불교사연구소 번역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