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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는 마음을 쉬어버리면 도는 바로 그 자리에 있다

기자명 법보신문

움직이는 것 그렇지 않은 것
모두가 하나의 경계일 뿐
도는 분별이나 이해 떠나
눈 앞서 끝없이 작용하는 것


마음은 고정된 실체 없으니
억지로 구하면 영원히 멀어져
아름다운 세계만 추구하면
진리서 한참을 벗어나는 꼴

 

 

중국 뤄양에 있는 중국 최초의 절 백마사. 후한 명제 때 인도 승려 가섭 마등 등이 백마에 경전을 싣고 온 것을 기념하여 지은 절이다.

 

 

儞若認他動者하야 是라하면 一切艸木이 皆解動하니 應可是道也아 所以로 動者는 是風大요 不動者는 是地大니 動與不動이 俱無自性이니라 儞若向動處捉他하면 他向不動處立하고 儞若向不動處捉他하면 他向動處立하야 譬如潛泉魚가 鼓波而自躍이니라 大德아 動與不動은 是二種境이니 還是無依道人은 用動用不動하나니라

 

해석) “만약 그대들이 움직이는 것을 오인해서 옳다고 한다면 온갖 초목들도 다 움직일 줄 아니 그것도 당연히 도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움직이는 것은 바람의 성질이고 움직이지 않는 것은 땅의 성질이다.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이 모두 다 고정된 실체가 없다. 만약 그대들이 움직이는 곳에서 그것을 붙잡으려 하면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 곳에 서 있다. 그대들이 만약 움직이지 않는 곳에서 그것을 붙잡으려 하면 그것은 움직이는 곳에 서 있다. 비유하자면 마치 물속에 있는 물고기가 물결을 치면서 물 위로 뛰어오르는 것과 같다. 대덕 스님들이여.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이 두 가지 경계일 뿐이다. 의지함이 없는 무위도인이라야 움직이는 것을 쓰기도 하고 움직이지 않는 것을 쓰기도 한다.”

 

강의) 불교에서는 지수화풍(地水火風)은 우리 육체를 구성하는 요소이기도 하고 삼라만상의 토대이기도 합니다. 이 중에서 풍(風)은 움직임을 의미하고 지(地)는 움직임이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수화풍은 성질로서 존재하는 것이지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바람도 땅도 고정된 실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도(道)는 움직이거나 또는 움직이지 않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문관(無門關)’29칙에 ‘비풍비번(非風非幡)’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찰에 깃발이 나부끼는 것을 보고 두 스님이 논쟁을 합니다. 한 스님은 깃발이 움직인다고 하고 다른 스님은 바람이 움직인다고 합니다. 그러자 육조 혜능 스님이 말합니다.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어떻습니까. 과연 무엇이 움직인 것일까요. 도를 움직이는 곳에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움직이지 않는 곳에 있다고 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물고기가 늘 물속에 가만히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가끔 물을 차고 밖으로 튀어 오릅니다. 움직이지 않는 곳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움직임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움직이는 곳에 있다고 생각하면 움직임이 없는 곳에 자리 잡기도 합니다. 진리가 이와 같습니다.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 모두 하나의 경계일 뿐입니다. 진리는 움직임의 모습으로, 때로는 움직이지 않는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움직이는 것 또는 움직이지 않는 것에 진리가 있다는 생각은 모두 그릇된 분별과 집착에 불과합니다.

 

如諸方學人來하면 山僧此間은 作三種根器斷이라 如中下根器來하면 我便奪其境 而不除其法하고 或中上根器來하면 我便境法을 俱奪하고 如上上根器來하면 我便境法人을 俱不奪하고 如有出格見解人이 來하면 山僧此間은 便全體作用하야 不歷根器니라

 

해석) “제방에서 학인들이 찾아오면 산승은 세 가지의 근기로 그들을 판단한다. 중하근기가 오면 바로 그들의 경계를 빼앗지만 법은 없애지 않는다. 만약 중상근기가 오면 나는 바로 그들의 경계와 법을 모두 빼앗는다. 만약 상상의 근기가 오면 나는 바로 그들의 경계와 법, 사람 어느 것도 빼앗지 않는다. 만약 격을 벗어난 뛰어난 견해를 가진 사람이 오면 나는 온 몸 전체로 대응하며 근기를 따지지 않는다.”

 

강의) 앞서 임제 스님이 학인들을 대하는 방법에 대해 앞서 사료간(四料揀)으로 설명했습니다. 지금 설명하고 있는 삼종근기(三種根器) 또한 사료간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중하근기가 오면 일단 공부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잘못된 생각이나 견해를 모두 제거해 줘야 합니다. 그러면서 법에 대해 설명을 합니다. 경계를 제거하고 법은 없애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중상근기가 오면 경계와 법 모두 집착할 것이 없음을 일깨워야 합니다. 강을 건넜으면 뗏목을 버려야 함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계와 법을 모두 부정해 버립니다. 그렇다면 상상근기가 왔을 때는 어떻게 할까요. 모든 것을 그대로 둡니다.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경계와 법에 대한 애착과 집착이 모두 사라져 굳이 가르칠 것이 없습니다. 그래도 두면 됩니다. 그렇다면 격을 벗어난 뛰어난 견해를 가진 사람이 오면 어떻게 할까요. 이것이야 말로 부처님이 부처님을 만난 격일 것입니다. 조용히 미소 지을 일밖에 무엇이 더 있겠습니다. 진리의 견지에서 완벽히 하나가 되고 너와 나의 구분이 사라짐으로 온 몸 전체로 서로를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大德아 到這裏하야 學人著力處不通風하야 石火電光도 卽過了也니라 學人이 若眼定動하면 卽沒交涉이니 擬心卽差요 動念卽乖라 有人解者하면 不離目前이니라

 

해석) “대덕 스님들이여! 이러한 경지에 이르게 되면 학인이 힘을 다하는 곳에서는 바람이 통하지 않고 전광석화도 찰나 간에 지나가 버린다. 학인이 만약 눈만 깜박여도 바로 교섭이 사라진다. 의심이 생기면 어긋나버리고 생각을 움직였다 하면 바로 틀려버린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이해하는 사람은 눈앞을 떠나지 않는다.”

 

강의) 학인이 격을 벗어난 경지에 도달하면 더 이상 번뇌와 망념으로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전광석화와 같은 지혜 작용이 순간적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여기서 바람은 번뇌 망념을, 전광석화는 지혜를 상징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학인이 눈을 깜박일 정도의 미세한 의심만 일으켜도 진리와의 교섭은 일시에 끊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의심이 생기면 어긋나버리고 망념이 일어나면 그르쳐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잘 아는 사람은 결코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목격(目擊)이 도존(道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눈이 마주치는 그곳에 바로 도가 있다는 말입니다. 도는 분별이나 이해를 떠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도는 지금 바로 눈앞에서 끊임없이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大德아 儞擔鉢囊屎擔子하고 傍家走하야 求佛求法하니 卽今與麽馳求底를 儞還識渠麽아 活鱍鱍地하야 祇是勿根株라 擁不聚하며 撥不散하야 求著卽轉遠이니 不求하면 還在目前하야 靈音이 屬耳어니 若人이 不信하면 徒勞百年이니라

 

해석) “대덕 스님들이여! 그대들은 밥통과 똥주머니를 걸머지고 옆길로 돌아다니며 부처를 구하고 법을 구하려고 한다. 지금 그렇게 구하려고 뛰어다니는 바로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가? 활발하게 뛰어다니며 작용하지만 뿌리가 없으니 끌어 모아도 모이지 않고 흩어버리려 해도 흩어지지 않습니다. 구할수록 더욱 멀어집니다. 그러나 구하지 않으면 도리어 눈앞에 있다. 신령스런 소리는 항상 귀에 들려오는데 사람들이 믿지 않으면 백년을 헛수고할 뿐이다.”

 

강의) 육신을 부지런히 굴려 부처를 구하고 법을 찾으려고 해도 결코 구할 수가 없습니다. 진리는 마음 밖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은 현재 활발하게 작용하고 있지만 고정된 실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으거나 흩어버릴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만약 억지로 구하려고 하면 영원히 멀어지고 맙니다. 무언가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키는 순간 그 마음은 진리 그 자체로서의 마음이 아니라 번뇌와 망상의 마음입니다. 그런 까닭에 구하려는 마음 자체를 쉬어버리면 바로 눈앞에서 진리는 그냥 드러나는 것입니다. 해를 가린 구름이 지나가고 나면 태양이 본래 그 자리에서 환하게 빛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깨달음의 신령스런 소리는 항상 우리 귀에 들려오고 있습니다. 부처님을 비롯해서 수많은 조사들이 또한 이를 일깨우고 있습니다.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이런 사실을 믿지 못하고 밖으로 찾아 돌아다니면 평생을 수행해도 깨달음은 있을 수 없습니다.

 

道流야 一刹那間에 便入華藏世界하며 入毘盧遮那國土하며 入解脫國土하며 入神通國土하며 入淸淨國土하며 入法界하며 入穢入淨하며 入凡入聖하며 入餓鬼畜生하야 處處討覓尋하나니 皆不見有生有死하고 唯有空名이로다 幻化空花를 不勞把捉이니 得失是非를 一時放却하라

 

해석) “여러분! 한 찰나 사이에 연화장 세계에 들어가며 비로자나불의 국토에 들어가며 해탈국토에 들어가며 신통국토에 들어가며 청정국토에도 들어간다. 또 법계에 들어가며 깨끗한 곳에 들어가며 더러운 세계에도 들어간다. 범부의 세계에도 들어가고 성인의 세계에도 들어가며 아귀·축생의 세계에도 들어간다. 그러나 곳곳 어디에나 찾아보아도 생사라는 것은 없고 단지 헛된 이름만이 있을 뿐이다. 허깨비나 허공의 꽃과 같은 것을 애써 붙잡으려 하지 말고 얻고 잃고 옳고 그름, 이런 것을 일시에 놓아버려라.”

 

강의) 마음은 한 찰나에도 모든 국토에 들어갑니다. 진리의 세계에도 들어가고 더러운 세계에도 들어가고 성인의 세계에도 범부의 세계에도 들어갑니다. 그러나 어느 곳에도 생사는 없습니다. 생사가 없는 까닭에 이 모든 것이 헛된 이름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허깨비나 허공의 꽃과 같은 것을 잡으려고 하지 말고 모든 것을 놓아버려야 합니다. 부처님의 세계나 성인의 경지를 추구하고, 범부의 세계를 싫어하는 모든 것이 분별이며 차별이며 망상입니다. 범부의 세계나 성인의 세계나 모두 헛된 이름일 뿐입니다. 깨달음은 옳고 그름, 깨끗함과 더러움, 선과 악의 구별이 사라진 세계입니다. 그런데 좋고 아름다운 세계만이 진리라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이를 추구한다면 이 또한 진리에서 한참을 벗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분별을 일시에 놓아버려야 합니다.


 정리=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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