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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따뜻함 절실한 순간 되레 버림받아

기자명 능행 스님

절망·분노로 떠난 보살님

군인인 남편을 내조하며
자식들 박사 만들었지만
암투병 오래되자 무관심

 

밤하늘에 별이 빛난다. 별빛 내리는 산에 하얀 눈은 소복이 쌓여있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고 언젠가는 또 겨울이 찾아오듯 시시각각 삶과 죽음이 이어지는 자연의 오묘한 조화도 생과 멸을 거듭하고 있다. 그러나 만물의 질서 앞에 저항하는 존재는 사람밖에는 없는 것 같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절망과 분노를 느낄 때마다 삶의 무상함을 생각해 본다. 과연 어떻게 죽는 것이 잘 죽는 것일까?


차가운 바람이 쓸쓸하게 대지를 스쳐지나가는 지금, 문득 암으로 삶을 마감했던 보살님이 생각난다. 보살님의 남편은 군인이었고 자식 모두를 박사로 키워낸 여장부였다. 종합검사에서 예기치 않은 암 판정을 받은 후 당황해하시던 모습이 아직까지 눈에 선하다. 자식들에게 알렸지만 단 한명도 달려 내려오는 놈이 없다며 눈물을 흘리셨다. 남편 역시 묵묵부답일 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보살님은 서울의 큰 병원에서 항암치료를 받기로 했다. 곧 머리카락은 다 빠지고 구토와 전신 무력증에 시달렸다. 하지만 보살님은 그 와중에도 언제나 큰 다이아몬드 반지를 가운데 손가락에 끼고 계셨다. 군인 월급으로 자식들 모두 일류대학 보내고 아들들이 장가 갈 때마다 며느리들에게 콩알보다 더 큰 다이아몬드를 선물했다고 했다. 수완도 좋고 성격도 좋은 분이셨다.


하지만 투병생활은 늘 외로웠다. 자식들은 돌아가며 일주일에 한번 면회를 올 뿐이었다. 보살님은 자식들에 대한 배신감으로 육신의 고통보다 더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지만 누구도 알아주는 이가 없었다. 1차, 2차, 3차 항암치료가 이어졌고 보살님은 점점 기운을 잃어갔다. 보살님은 4차 항암치료를 포기하고 먹는 항암제로 처방을 받아 집으로 갔다. 평소 아내에게 밥상을 받아오기만 했던 남편이 식사를 준비했다. 보살님은 매스꺼운 속 때문에 물 한 모금 넘길 수 없어 매일 굶다 억지로 성화를 부려야만 한술 뜨시곤 했다.


어느 날 찾아가니 보살님이 일어나 보석함과 통장 등을 모두 꺼내놓고 보자기에 싸고 있었다.


“스님. 통장 안에 아무것도 없어요. 자식새끼들 공부시키고 나니 남편 연금밖에 없네요.”
“보살님. 그 다이아몬드 반지는 누굴 주려고 여태 끼고 계세요? 다음에 아미타불 조성하면 부처님 백호장엄이나 하시지요.”
“군인 마누라가 무슨 다이아몬드 반지에요. 이거 다 가짜에요. 가짜. 며느리들 다이아몬드 반지 해주느라 계를 10년 부었지요. 자식 잘못 키웠습니다. 이 가짜 반지나 저놈들이나 똑같아요. 자식 잘 키우면 나도 호강하는 줄 알았던 내 자신이 한심합니다. 스님. 보따리에 다 싸놓을 테니 화장할 때 타버리게 관에 넣어 주세요.”


그리고 며칠 후, “목이 말라 죽겠다”는 보살님의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한달음에 달려가 보니 텅 빈 집에는 죽어가는 보살님뿐이었다. 내 아내, 내 어머니가 저렇게 죽어가고 있는데…. 복수가 차오르고 몸은 말라가고 있지만 어느 자식 하나 어머니 곁을 지켜주지 않았다. 남편은 거실에서 담배만 피웠다.


“스님. 내가 복이 없어서 그래요. 복이…. 내가 너무 잘못 키웠습니다.”


보살님은 반지를 건네주며 보따리 속에 넣어달라고 했다. 조그만 보따리 두 개는 평생 살아온 흔적이었다. 보살님은 그것을 자신의 육신과 함께 태워달라고 했다.


그리고 며칠 후, 보살님은 절망과 분노를 삭이고 숨을 거뒀다. 깨끗한 이불을 목까지 덮고 작은 보따리 두 개를 보살님 가슴에 올려놓았다. 보따리 속에는 빈 통장, 가짜 보석, 염주가 다였다. 마지막 순간에 보살님이 가진 전부였다.


▲능행 스님

물질이 가족보다 크게만 느껴지는 요즘이다. 삶의 마지막 순간이야말로 가족의 따뜻함이 절실한 순간이 아닐까. 부모가 자식이 되고 자식이 부모가 되는 인연의 사슬이 무겁다. 우리, 그저 서로에게 잘해야 하지 않을까? “자식들 다 필요 없다”며 소리 내어 우시던 보살님 모습이 생각나는 밤이다.


능행 스님  정토마을 이사장 jungtoh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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