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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글은 옷에 불과, 겉모습 집착 말고 입은 사람 봐야

기자명 법보신문

선사들 깨달음 같아도
가르치는 방식은 각각
학인들 알아보지 못하니
다양한 모습·말 이용해

 

 

▲조주 스님이 머물렀던 중국 백림선사. 임제 스님과 동시대를 살았던 선지식이다.

 

 

道流야 山僧佛法은 的的相承하야 從麻谷和尙과 丹霞和尙과 道一和尙과 廬山與石鞏和尙하야 一路行徧天下하나 無人信得하고 盡皆起謗이로다 如道一和尙用處는 純一無雜이라 學人三百五百이 盡皆不見他意요 如廬山和尙은 自在眞正하니 順逆用處를 學人不測涯際하고 悉皆忙然이요 如丹霞和尙은 翫珠隱顯하야 學人來者가 皆悉被罵요 如麻谷用處는 苦如黃檗하야 皆近不得이요 如石鞏用處는 向箭頭上覓人하니 來者皆懼로다

 

해석) “여러분! 산승의 불법은 분명하고 확실하게 선문의 정통을 이어온 것이다. 마곡 화상을 따라 단하 화상, 도일 화상, 여산 화상과 석공 화상까지 한길로 조사선의 가풍을 천하에 두루 펴고 있다. 그러나 이를 믿고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없고 모두들 비방만 일삼고 있다. 도일 화상의 가르침은 순수하고 잡스럽지 않아 학인이 300명, 500명이나 되었으나 모두 화상의 뜻을 알지 못했다. 여산 화상은 자재하며 참되고 반듯해서 순으로 또는 역으로 가르쳤으나 학인들은 그 경계를 측량하지 못하고 모두 다 망연자실해 했다. 단하 화상은 구슬을 가지고 놀면서 감추기도 하고 드러내기도 하며 가르쳤는데 찾아오는 학인들마다 모두 꾸지람만 들었다. 마곡 화상의 가르침은 소태나무와 같이 써서 모두들 가까이하지 못하였다. 또 석공 화상의 가르침은 화살 끝에서 사람을 찾는 것이어서 찾아온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했다.”

 

강의) 적적상승(的的相承)에서 적(的)은 표적이나 목적처럼 분명하고 확실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임제 스님은 자신의 불법이 이런 선문의 전통과 가르침을 확실하게 이어 온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임제 스님의 말씀에 따르면 여기 등장하는 선사들은 모두 독특한 가풍을 지니고 있습니다. 깨달음은 같을지라도 가르침의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선사들은 모두 독특한 개성을 지닌 다양한 방법으로 법을 폈습니다. 그러나 가르침을 따라 깨친 이는 드물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여기 등장하는 마곡, 단하, 여산, 석공 스님은 모두 마조 스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마곡 스님이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마조 스님이 나온 것은 조금은 이해 할 수 없는 부분이긴 합니다. 무언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잘 알다시피 단하 스님은 추운 겨울날 목불을 태워 ‘단하목불’이라는 화두로 유명한 스님이고 석공 스님은 사냥꾼 출신으로 화살법문으로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마조 스님은 그 문하에서 인가받은 제자만 70여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중국 선종은 마조 스님 이후 풍성해졌으며 임제종의 본류이기도 합니다.

 

如山僧今日用處는 眞正成壞하며 翫弄神變하야 入一切境호대 隨處無事하야 境不能換이니라 但有來求者하면 我卽便出看渠하나 渠不識我일새 我便著數般衣하면 學人이 生解하야 一向入我言句하나니 苦哉라 瞎禿子無眼人이 把我著底衣하야 認靑黃赤白이로다 我脫却하고 入淸淨境中하면 學人이 一見하고 便生忻欲타가 我又脫却하면 學人이 失心하야 忙然狂走하야 言我無衣로다 我卽向渠道호되 儞識我著衣底人否아하면 忽儞回頭하야 認我了也로다

 

해석) “오늘날 산승의 가르침은 진정으로 만들거나 허물면서 가지고 놀기도 하고 신통변화를 부리기도 한다. 일체 경계에 들어가지만 가는 곳마다 아무 일이 없음으로 경계가 나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다만 찾아와서 구하는 이가 있으면 나는 곧바로 그를 알아보지만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내가 곧 여러 가지 옷을 입어 보이면 학인들은 알음알이를 내어 하나같이 내 말에 끌려들고 만다. 아! 슬픈 일이로다. 눈멀고 안목 없는 중들이 내가 입은 옷을 보고 푸르다거나 누렇다거나 붉다거나 하얗다고 인식한다. 내가 그 옷을 벗어버리고 청정한 경계 속으로 들어가면 학인은 한번 보고 좋아하는 마음을 일으킨다. 내가 다시 그 옷마저 벗어버리면 학인들은 마음을 둘 곳을 몰라 망연자실하여 미친 듯이 내달리며 내가 옷이 없다고 한다. 그때 ‘내가 바로 옷을 입고 있던 그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시오’라고 말하면 홀연히 머리를 돌려서 나를 보게 된다.”


강의) 임제 스님의 가르침은 걸림이 없습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입니다.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니, 처한 그곳이 항상 참된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체 경계에 들어가지만 집착하지 않음으로 경계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진리의 모습으로 학인들을 대하면 학인들은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임제 스님이 학인들의 기호에 맞춰 다양한 모습과 말로 그들을 가르칩니다. 이것이 옷의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 모습이나 말속에 담긴 참 뜻은 모른 채 겉모습에 속고 맙니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데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에 집착해 버립니다. 아니 아예 손가락이 진리라고 착각을 해 버립니다. 그렇다고 손가락으로 가리키지 않고서야 달을 보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임제 스님의 한탄이 깊습니다. 노란 옷을 입으면 사람은 보지 못하고 그 사람을 노랗다고 생각합니다. 빨간 옷을 입으면 사람은 보지 못하고 빨갛다고 말합니다. 그 옷들을 차츰 벗어버리고 조금 더 속살에 가깝게 가면 그 모습이 더욱 진리에 가깝다고 즐거워하지만 마지막 남은 옷마저 버리고 진리의 속살을 그대로 드러내면 갑자기 마음 둘 곳을 몰라 망연자실해 하며 옷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내가 바로 그 옷들을 입었던 사람이라고 설명하면 그때서야 갸우뚱하며 쳐다보는 것입니다. 진리가 이와 같습니다. 부득이 말과 글을 빌려 설명하면 그 말과 글에 집착해 그것을 불교로 착각해 버립니다. 진리는 청정함과 더러움을 벗어나 있음에도 방편으로 설한 부처님이나 성인의 경지를 청정함으로 착각해 아름다움과 추함의 분별을 일으켜 진리에서 영원히 멀어져 버립니다.

 

가리키는 달은 못 보고
손가락이 진리라 착각
옛스님 말에만  머무르면
깨달음에선 영영 멀어져

 

大德아 儞莫認衣하라 衣不能動이요 人能著衣하나니 有箇淸淨衣하며 有箇無生衣와 菩提衣와 涅槃衣하며 有祖衣有佛衣니라 大德아 但有聲名文句하야 皆悉是衣變이라 從臍輪氣海中鼓激하야 牙齒敲磕하야 成其句義니 明知是幻化니라 大德아 外發聲語業하며 內表心所法하고 以思有念은 皆悉是衣니 儞祇麽認他著底衣爲實解하면 縱經塵劫하야도 祇是衣通이라 三界循環하야 輪廻生死니라 不如無事하야 相逢不相識하고 共語不知名이로다

 

해석) “대덕 스님들이여! 옷을 보지 마라. 옷은 스스로 움직이지 못한다. 사람이 능히 옷을 입는 것이다. 청정한 옷이 있고, 생사가 없는 옷이 있고, 보리라는 옷도 있고, 열반이라는 옷이 있으며, 조사라는 옷도, 부처라는 옷도 있다. 대덕 스님들이여! 다만 소리와 명칭과 문구 따위가 다 옷에 따라 변화한 것들이다. 배꼽 아래 단전으로부터 치고 올라와 이빨을 두드려 글과 뜻을 이루는 것이니 이것은 분명히 환화임을 알아야 한다. 대덕 스님들이여! 밖으로 소리 내어 말을 하고 안으로 마음의 대상을 표현하며 생각으로 헤아리는 것이 있다면 모두가 옷에 지나지 않는다. 그대들이 다른 사람이 걸치고 있는 옷을 진짜라고 여긴다면 억겁의 세월이 지나더라도 옷에 대해서만 통달할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 되면 삼계를 돌고 돌면서 생사를 되풀이하게 되니, 일없는 것만 같지 못하다. 서로 만나면서도 알지 못하고 함께 말을 나누면서도 이름을 알지 못한다.”

 

강의) 옷은 스스로 움직이지 못합니다. 옷은 입고 있는 사람에 의해 움직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보지 않고 옷만을 봅니다. 나쁜 사람이라도 좋은 옷을 입으면 좋은 사람으로 착각하고, 성인이라 해도 옷이 남루하면 비루하게 여깁니다. 사람이 주인일터인데 사람들은 옷을 주인으로 여깁니다. 글과 말로 설명되는 모든 내용이 옷에 불과합니다. 예를 들어 밥이라고 말로 소리를 내어도 그 자체로 밥이 되지 않습니다. 공책에 성불이라고 백번을 쓴 들 성불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은 소리의 울림일 뿐이고 마음으로 대상을 그려봐도 그것은 허공 속의 그림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저 옷에 불과한 말과 글을 진리로 여깁니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열심히 공부를 하고 수행을 한들 억겁의 윤회를 면치 못하게 됩니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윤회 속에서 같은 사람을 수백번 만나고 대화를 해도 끊임없이 옷만을 보는 까닭에 그 사람의 이름도 알지 못하게 됩니다.

 

今時學人이 不得은 蓋爲認名字爲解니라 大策子上에 抄死老漢語하야 三重五重으로 複子裏하야 不敎人見하고 道是玄旨라하야 以爲保重하나니 大錯이로다 瞎屢生이여 儞向枯骨上하야 覓什麽汁고

 

해석) “요즘 학인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대개가 이름과 문자로 이해하려하기 때문이다. 큰 공책에다 죽은 노스님들의 말씀을 베껴서 세 겹, 다섯 겹 보자기에 싸서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지 않고 이것이야말로 현묘한 도라고 하면서 소중하게 여긴다. 이는 크게 잘못된 일이다. 눈멀고 어리석은 사람들아! 말라빠진 뼈다귀에서 무슨 국물을 찾는단 말인가?”

 

강의) 뗏목은 강을 건너는 것이 목적이듯이, 강을 건너면 당연히 뗏목을 버려야 합니다. 뗏목을 타고 가는 내내 이것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글과 문자가 피안(彼岸)으로 가는 뗏목임을 잊고 글과 문자 그 자체를 진리로 착각합니다. 그리고 이미 죽어 사대(四大)로 흩어져버린 옛 스님들의 말씀을 품에 안고 이것이야말로 진리 그 자체라며 애지중지합니다. 만약 이렇게 된다면 깨달음은 이미 글러버린 것이다. 아무리 솜씨 좋은 목수가 만든 뗏목이라 해도 뗏목은 뗏목일 뿐입니다. 뗏목에 집착해서 뗏목에서 내리지 않으면 결코 강을 건널 수 없습니다. 마치 말라빠진 뼈다귀를 붙들고 국물을 찾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정리=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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