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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운길산 수종사

기자명 법보신문

찻잔 속 물방울 하나가 종소리로 퍼져 중생을 깨우다

두물머리 내려보는 도량
나한과 샘물 발견한 세조
손수 이름 짓고 중창해
다산·초의선사 차 마시며
시 짓는 등 깊은 인연 서려

 

 

▲ 수종사 응진전 처마 끝 풍경이 겨울 찬바람에도 가만하다. 아니, 저 너머 남한강과 북한강이 내밀히 몸 섞는 두물머리가 그리울지 모른다.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는 그곳에 살얼음 앉았다. 아직, 때가 아니다.

 

 

북한강은 살얼음 아래로 흐르고 있었다. 강위엔 물안개가 춤추듯 피어올랐고, 운길산은 차마 녹지 못한 눈으로 옷을 기워 입었다. 운길산 등산로 입구부터 1.7km, ‘힘든 산책’이었다. 살짝 얼어붙은 가파른 길을 50분 정도 숨 가쁘게 올라 ‘운길산 수종사’ 편액이 걸린 수종사 일주문에 다다르자 목탁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눈 쌓인 소나무 숲길을 걸었다. 소나무 가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은 이따금 드물게 쌓인 눈 속에 소리를 묻었고, 이따금 드물게 소리 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잰 걸음하자 오른쪽으로 비켜선 미륵 부처님이 온화한 미소로 마중을 나왔다. 미륵 부처님 왼쪽 어깨 위로 수종사가 걸터앉았다. 일주문에서 미륵 부처님을 지나 또 다른 문과 마주했다. 불이문이었다. 두 손과 마음 모두 가지런히 모았다.


수종사는 눈으로 소리를 잠재웠다. 간혹 목탁소리와 등산객의 도란도란 정겨운 얘기가 들릴 뿐이었다. 풍경도 추위에 입이 얼었다. 수종사 응진전 처마 끝 풍경이 겨울 찬바람에도 떨지 않고 가만했다. 아니, 저 너머 강이 그리운 모양이다. 작은 종 아래 매달린 물고기는 눈도 못 감은 채 종일 두물머리만 바라봤다.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는 그곳에 살얼음이 앉았다. 아직, 때가 아닌가보다. 온통 머리와 가슴속에 하고 싶은 일들만 가득해 주변을 돌아보지 않는 객도 신심이 여물지 않았다. 아직, 기도가 익지 않은 이유이리라.

 

 

▲팔각5층석탑과 태종의 후궁 정의옹주 부도.

 


대웅보전에 들러 참배했다. 비로자나 부처님이 주불로 모셔져 있었다. 스님 한 분이 홀로 목탁 두드리며 예불 중이었다. 대웅보전 법당 안 기둥 옆으로 나란히 걸린 목탁의 손때가 정겹다. 기도와 예불에 쉼이 없다는 오래된 증거였다. 부도(유형문화재 제157호)와 팔각5층석탑(유형문화재 제22호)이 대웅보전 오른쪽에 자리했다. 부도엔 태종의 첫번 째 후궁인 태후 정의옹주 사리가 안치됐다고 한다. 지붕돌 낙수면에 ‘태종태후정의옹주사리조탑시주○○유씨금성대군정통사년기미십월일입’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세종 21년(1439) 제작된 사실을 알 수 있었다.

 

 

▲ 운길산 수종사 경내.

 


어떤 연유로 정의옹주는 수종사에 묻혔을까. 평소에 수종사를 찾았을까, 유언일까. 수종사 역사를 따라 가다보니 이곳은 왕실과 인연이 닿아 있었다. 해탈문 밖 500년이 훌쩍 넘은 아름드리 은행나무 옆엔 ‘수종사 사적기’가 있었다. 수종사(주지 동산 스님)는 조계종 제25교구본사 남양주 봉선사 말사다. 사적기에 따르면 수종사는 고려 태조 왕건이 상서로운 기운을 좇아 구리종을 얻고 부처님 혜광으로 고려를 건국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1439(세종 21)년 이르러 세종의 여섯 째 아들 금성대군이 정의옹주의 부도를 세우고 금제 9층탑 수정사리함(사리 14과)을 청자항아리에 담아 부도 안에 모셨다고 한다. 1493(성종 24)년 후궁 명빈 김씨가 목제불감과 설법도가 그려진 금동불감에 금동불보살상 등 14좌를 봉안하고 후궁들의 발원문도 함께 넣어 탑 안에 봉안했고, 1628(인조 6)년 정의대왕대비가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을 시주했다. 고종황제의 시주로 수종사가 다시 중창됐고, 1939년 태욱화상이 중수했으나 한국전쟁 때 불탔다. 1999년부터 동산 스님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응진전, 선불장, 삼정헌, 일주문, 미륵불 등을 세워 사격을 완성하며 조선의 대제학 서거정이 “동방 천하제일의 명당”이라 찬탄했던 절 풍광을 되살렸다.


작은 도량이란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수종사는 많은 이야기가 얽혀 풍성했다. 흥미로운 창건설화도 발견했다. 1458(세조 4)년 세조는 피부병을 치료코자 문무대관과 금강산을 유람하다 돌아오던 길이었다. 당시 세조는 피부병을 낫고자 물 좋은 곳을  찾아다녔다. 우연히 지금의 양주 부근에서 하룻밤 청한 그날 새벽, 불현듯 종소리가 들려왔다. 세조는 신하들에게 연유를 알아오라 일렀다. 종소리를 따라간 신하들은 뜻밖에 바위굴을 찾았고, 굴속 바위틈으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마치 종소리 같았다. 세조에게 고했다. “신들이 종소리를 따라가니 어느 바위굴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였습니다. 그 바위굴 안엔 18나한이 모셔져 있었습니다.” 세조는 물소리의 신비를 지키고 싶었다. 옛 절을 다시 고쳐 세우라고 명했다. 이듬해인 1459년 중창이 끝나자 손수 수종사(水鐘寺)라 이름 짓고, 절에 올랐다. 세조는 바위굴서 떨어지는 청명한 종소리의 샘물을 보고 은행나무를 심었다.

 

 

▲차 순례지로 유명한 수종사는 나한기도도량이다. 응진전 나한님.

 


수령이 500년은 족히 지난 은행나무는 가지를 사방으로 넓게 펼치고 있었다. 가지 사이로 두물머리가 엿보였다. 어떻게든 저 민초의 젖줄을 껴안으려던 마음일까. 은행나무는 자신을 심었던 세조의 마음을 헤아리는 걸까. 난으로 왕권을 장악한 세조는 아버지 세종이 육성하고 강화했던 집현전과 경연을 폐지했다. 허나 전국에 수많은 사찰을 세우고 불경을 간행했다. 비록 불교를 중흥했지만 스스로 윤회나 내세를 믿지 않았을 게다. 다만 산 좋고 물 좋은 곳을 찾아 피부병을 치료하고자 했고, 곳곳에 사찰 불사를 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예부터 하늘로 떠받쳐진 임금 세조도 자신의 야망에 단종을 희생시켰던 업을 조금이나마 풀려고 했던 중생에 불과했으리라.


도량보다 먼저 마음이 동할까봐 애써 눈 돌렸던 두물머리로 걸음을 옮겼다. 응진전 풍경의 심정을 가늠할 수 있었다. 산과 골짜기를 가로질러 흐르던 두 강이 만나는 장관은 흔히 볼 수 있는 풍광이 아니었다. 강원도 태백 깊은 골 금대봉 기슭 검룡소(儉龍沼)에서 태어난 샘은 남한강이 되고, 금강산 금강천에서 흘러온 물줄기는 북한강을 이룬다. 강줄기 둘은 경기도 양평 양수리 두물머리에서 만나 호흡을 함께 한다. 그렇게 남한강과 북한강은 살얼음 아래서 내밀히 몸을 섞고 있었다. 그렇게 민초들 젖줄인 한강으로 서울에 든 게다.

 

 

▲두물머리와 운길산을 장엄하는 범종.

 


세조가 찾을 정도로 물이 좋으니 수종사는 차로 유명했다. 다산 정약용이 수시로 찾았고, 서거정, 이이, 김종직, 이덕형 등 낯익은 명사들과 다성(茶聖) 초의선사도 수종사와 인연이 깊었다. 모두 시 한 수씩은 남겨 수종사를 추억했다. 다산은 이곳 샘물로 차를 즐기며 시로 고즈넉함을 그려냈다. “언덕과 골짜기 서로 합해져/ 구름 노을 저 멀리서 흩날리누나/ 너무도 즐거워 혼자 서서는 묵어지내며 돌아가고 싶지를 않네.”(‘숙수종사(宿水鐘寺)’ 중에서)


그래서일까. 무료다실 삼정헌(三鼎軒)은 늘 객들로 붐볐다. 수종사 샘물로 우려낸 녹차를 조용히 마실 수 있었다. 우연히 만난 한국차문화협회 차문화예절지도사가 차를내렸다. 천주교 신자였지만 “수종사는 차의 성지”라며 곧잘 찾는다 했다. 차담을 나누다 시선이 멎었다. 통유리 너머로 여전히 북한강과 남한강은 말없이 하나로 흘렀다. 번다함이 사라졌다. 새 휴대전화를 갖고 싶단 욕심과 아내를 속상하게 하고 사과를 어떻게 할까하는 고민, 기사에 대한 압박감 등 자질구레한 생각이 호흡을 고르기 시작했다. 잡다한 생각이 시들자 녹차의 향과 맛이 온몸에 그윽하게 퍼졌다. 삼정헌은 그런 곳이었다. 소개책자대로 지나는 길손과 법의 손님은 시, 선, 차가 하나 되는 장소였다. 차 마시며 목 축일 수 있다는 사실이 수종사 본연임을 문득 깨닫게 된다.

 

 

▲시와 선, 차가 한 몸이 된다는 삼정헌.

 


차와 선, 풍광이 하나로 흐르는 수종사는 절로 신심을 우려냈다. 세조의 창건설화로 생긴 나한도량이란 꼬리표가 없어도 그만이었다. 70대 노거사가 몇 년째 서울서 찾아와 각 전각마다 기도를 하고 3시간 뒤에야 말없이 하산하는 일이 평범하게 느껴졌다.


찻잔 속 뜨거운 녹차 물방울 하나, 몸과 마음에 종소리처럼 울려 퍼지며 중생을 일깨운다. 응진전 처마 끝 풍경이 겨울 찬바람에 목 메이자 도량도 숨을 죽인다. 아니, 중생의 순간 환희심으로 소리 없이 들끓는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여전히 두물머리 살얼음 아래에서 은밀히 하나로 흘렀다. 수종사, ‘나’만 좇던 중생심과 부처님 향한 신심을 뒤섞어 환희를 우려내 마음잔 채운다.


최호승 기자 time@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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