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라즈기르 날란다사원 - 상
4. 라즈기르 날란다사원 - 상
  • 남수연 기자
  • 승인 2013.02.04 16: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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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 열기 가득했던 캠퍼스 검붉은 벽돌서 온기 느끼다

여섯 왕들이 대이어 이룩한
세계 최대·최고 종합대학


현장스님 상세한 기록 남겨
신라 학승들도 이곳서 입적


보대·옥루 즐비했던 교정
13세기 이슬람교 침략으로
1만여 스님과 함께 불길 속

 

 

▲5세기 시작된 날란다사원의 역사는 700여 년간 화려하게 이어졌다. 대를 이어 여섯 왕이 중창했고 1만여 명의 스님들을 공양하기 위해 100여 마을이 하사됐다. 그러나 12세기 말 이슬람교의 침입으로 사원은 불길에 휩싸였고 스님들은 학살당했다. 그러나 날란다의 명성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 의해서다.

 

 

7세기 중국의 구법승이자 역경승, 그리고 ‘대당서역기’의 저자로 유명한 현장 스님은 ‘서유기’에 등장하는 삼장법사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팔만대장경 가운데에도 스님의 일생을 기록한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이 있으니 요즘말로 치자면 그야말로 만능 엔터테인먼트가 가능한 월드스타였던 셈이다.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은 ‘대당서역기’ 못지않게 이번 순례의 튼실한 길라잡이가 되어주었다. 특히 오늘 순례지인 날라다사원[나란타사. 那爛陀寺]에 대한 기록은 무척이나 상세해 눈여겨 볼만하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이른 아침 버스에 몸을 싣고 출발하는 길, 옛 스님의 행록을 도반삼아 눈 걸음으로 잠시 순례길을 앞장서본다.


‘…나란타절이란 시무염사(施無厭寺)라는 뜻이다. 옛날 노인들 말에 의하면 이 가람 남쪽 암몰라 밭 가운데 못이 있었는데 그 못에 나란타라는 이름의 용이 살고 있었다. 그 못 옆에 절을 세웠기 때문에 용의 이름을 따서 절 이름을 나란타라 지었다는 것이다. 또 이런 말도 있다. 옛날에 여래께서 보살도를 닦고 있을 때 대국(大國)의 왕이 되어 이 땅에다 도읍을 세우고 외롭고 가난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 항상 물건을 베풀어 주었기 때문에 그 은혜를 생각하여 그곳을 시무염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땅은 원래 암몰라 장자의 정원이었으나 오백명의 상인이 10억의 돈을 주고 사들여 부처님께 보시한 것이다.…’


이 기록은 오늘날까지도 상당부분 유효하다. 다만 ‘옛날 노인들의 말’이라고만 밝혀 놓았던 날란다사원의 창건 시기에 대해 현대의 학자들은 5세기 즈음으로 추정하고 있다. 날란다사원은 5세기 굽타왕조의 샤크라티디아왕이 창건했고 이후의 왕들이 대를 이어 사원을 증축했다. 무려 6명의 왕들이 정성들여 세운 날란다사원은 현장 스님이 방문했을 7세기 즈음에는 인도를 넘어 세계 최대 규모,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사원이자 대학으로 성장해있었다.


‘…보대(寶臺)가 별처럼 줄지어 섰고 옥루(玉樓)가 산처럼 솟아 있으며 높고 큰 건물들이 연기와 노을 위에 솟아 있어서 창에서 풍운(風雲)이 일어나고 처마 아래서 일월(日月)이 뜨고 진다. 거기에다 맑은 물이 유유히 흘러가고 그 위에는 청련(淸連)이 떠 있다. 곳곳에 갈니화수가 꽃을 피웠고 밖에는 암몰라 수림이 무성했다. 모든 사원의 승방은 다 4층으로 되어 있었다. 중각의 용마루나 대들보는 용무늬로 장식되어 있었으며 두공과 기둥은 붉게 단청했으며 큰 기둥과 난간은 갖가지 조각을 새겼고 옥으로 된 초석에도 문양을 새겼다. 지붕의 기와는 빛을 받아 번쩍이고 서까래는 색실로 연결해 놓았다. 인도의 가람 수는 천만 개나 되었지만 장엄하고 수려함과 숭고함에 있어서 이 나란타 절이야 말로 극에 달했다.…’


현장 스님이 이처럼 자세한 묘사와 수사를 동원해 전해야할 만큼 날란다사원은 어마어마한 규모와 장엄함을 갖추고 있었나 보다. 당시 날란다사원, 더불어 날란다불교대학의 명성은 세계적으로 유명했다. 오늘날의 하버드나 옥스퍼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전 세계의 불교학자와 스님들이 날라다에 가서 공부하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걸었을 정도니 말이다. 현장 스님 외에도 밀교를 중국에 전한 중국 밀교의 개조 금강지(金剛智)와 선무외(善無畏)가 모두 이곳에서 수학했고, 북송(北宋) 초기 중국으로 건너가 많은 경전을 번역한 법현(法賢) 스님도 이곳 날란다대학의 동문이었다. 어디 그 뿐인가. 신라 출신의 혜업(慧業), 아리야발마(阿離耶跋摩) 스님은 이곳에서 공부하다 입적했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고구려 스님 9명도 이곳에서 공부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혜초 스님이 천축으로 길을 떠난 목적 역시 스승이었던 금장지의 권유로 바로 이곳 날라다대학에서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입학이 호락호락하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했으니 요즘 말로 치면 입학 경쟁 또한 치열했다.


불교대학으로 자리를 잡은 당시 날란다사원에는 교수진과 학생을 합쳐 1만여 명의 스님들이 있었다고 한다. 대승과 소승을 두루 배웠으며 베다와 우파니샤드 등도 다뤄 다른 종교에 관해서도 공부했다. 비교종교학이 일찍이 발전했음이다. 뿐만 아니다. ‘인명·성명·의방·술수에 이르기까지 갖추어 연구하고 있었다’하니 철학, 논리학, 수학, 과학, 천문학, 지리, 의학, 약학 등 다양한 학문이 다뤄졌음을 알 수 있다. 교수진만도 2천여 명에 달했고 매일 100여 개의 서로 다른 강좌가 열렸다. 강의실·도서관은 물론이고 기숙사와 공원까지 두루 갖추고 있었다. 오늘날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종합대학이었다. 재정은 국가에서 후원했다. 왕은 인근 1백여 마을을 하사하고 마을의 200여 가구로 하여금 세금 대신 쌀과 우유 등을 매일 보시하도록 했다. 학습 환경이 우수하고 덕망 높은 스승들이 있으니 많은 대중이 모여 있어도 분위기는 늘 엄숙했고 한 사람의 범죄자도 나오지 않았다. 매년 1000만여 원을 오르내리는 대학 등록금에 허덕이는 오늘날의 대학생들에게는 그야말로 꿈만 같은 ‘국립대학’이다.


그러나 ‘생겨난 모든 것은 변하고 무너진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날란다도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세계 최고·최대의 대학이자 7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날란다사원은 12세기말 이슬람세력의 침입으로 철저히 파괴됐다. 건물뿐 아니라 사원 전체가 불길에 휩싸였다. 보관돼 있던 장서들, 당대 인류 정신문명의 결정체들은 한 줌 재도 남기지 못한채 사라졌다. 불길이 밤낮으로 타 올랐고 연기가 6개월 동안 가시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인들 무사했을 리 없다. 평생 교학과 수행에 매진하리라 서원했을 스님들 대부분이 학살당했다. 무려 15만m²에 달하던 드넓은 지혜의 전당은 처참한 학살의 현장, 폐허가 돼 버렸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는 영국이나 이탈리아 등 유럽에서 옥스퍼드나 볼로냐 등 서양 최초의 대학들이 막 태동하던 때였다.

 

 

▲7세기 이곳을 방문한 중국의 현장 스님은 날란다사원의 장엄함에 혀를 내둘렀다. 오늘날 남아있는 유적의 규모와 아름다움만으로도 당시의 장엄함을 상상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책장을 덮고 나서도 타오르는 불길의 환영이 눈앞에서 사그라지지 않는 듯하다. 무려 1만여 명이었다. 저항하지 않았지만 물러섬도 없이 죽음을 맞이한 스님들. 처참한 불구덩이와 신의 뜻을 잃어버린 칼 아래서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던 이는 과연 몇이나 됐을까. 가슴 먹먹함이 깊은 한숨으로 나온다.


하지만 날란다사원 입구에 내리니 가벼운 환호가 저절로 나온다. 날란다사원은 넓고 깨끗하게 정리된 잔디와 잘 가꾸어진 나무들 사이에서 평화로운 아침을 맞고 있다. 처참한 전화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다. 오늘 길 마음을 짓누르던 아픈 역사의 기억이 산뜻한 날란다사원의 첫 얼굴에 눈 녹듯 사라진다.


붉은 벽돌을 쌓아올려 만든 날란다사원은 남아 있는 기단부 유적만으로도 얼마나 엄청난 규모였는지 짐작케 한다. ‘보대(寶臺)가 별처럼 줄지어 섰고 옥루(玉樓)가 산처럼 솟아있다’는 표현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나 보다. 유적지의 끝이 어디쯤인지 보이질 않는다. 남아있는 유적 대부분은 벽돌을 쌓아 만든 건물의 아래층뿐이지만 그 높이와 벽의 두께가 혀를 내두를 정도다. 각 벽의 두께는 족히 1m를 넘길 듯하다. 1층의 벽을 이처럼 두껍게 만든 것은 더위와 추위를 막기 위함이다. 동시에 건물을 높이 올리기 위해 기단부를 튼튼히 한 것이다. 모든 승방이 4층으로 이뤄졌다는 기록도 과장이 아니다. 중간 중간 남아있는 벽돌계단들은 이 유적이 2층 이상의 건물이었음을 알려준다. 벽이 워낙 두껍다보니 순례객들은 잘 닦아놓은 고가다리를 건너듯 그 위로 걸어 다닐 수 있다. 벽 위에 올라서 보면 날란다사원의 웅장한 규모가 더욱 두드러진다. 각각의 벽은 서로 이어지며 수십, 수백 개의 크고 작은 방을 만들고 있다. 그 수가 얼마나 많은지 헤아릴 수 없다. 불상이나 불탑을 모시기에 좋은 기단이나 좌대도 즐비하다. 꽤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들어갈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강당 같은 큰 규모의 방도 많다. 건물외벽에는 벽돌을 쌓아 올리며 만들어낸 문양과 갖가지 조각 장식들도 잘 남아있다.


그 벽 위에 용무늬로 장식된 대들보와 단청된 붉은 기둥, 그리고 갖가지 조각이 새겨진 난간들을 세워본다. 옥으로 초석을 삼고 반짝이는 기와지붕들이 어깨를 맞대고 이어져 있었을 날란다사원의 옛 모습을 살짝 얹어본다. 참으로 크고 아름다웠을 것이다.


하지만 두꺼운 벽 아래 여전히 남아있는 검은 그을음이 잠시의 상념을 여지없이 깨버린다. 밤낮을 거리지 않고 타오른 불길, 6개월간 멈추지 않고 연기가 피어올랐던 처참한 방화의 흔적이다. 이렇게 두껍고 튼튼한 벽과 기둥, 벽돌계단과 탑만이 그 불길 속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것이다. 그때 새겨진 검은 상처는 8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명하다.


불타보헤미안의 순례객 70여 명은 날란다사원 입구, 넓은 잔디밭에 모여 앉았다. 한때 1만여 명의 스님들이 있었던 세계 불교학의 중심지였으니 70여 명 모여 앉을 자리는 넉넉하다. 각자 부처님 발자취를 찾아 이 먼 인도까지 오게 된 각오와 감회를 이야기한다. 그 이야기가 숨결이 되어 날란다의 검붉은 벽돌 사이를 타고 흐른다. 이곳에서 공부하기 위해 기꺼이 목숨 걸고 찾아왔던 옛 스님들의 열정에 비할 바 아니지만 석가모니 부처님에 대해, 그리고 불교에 대해 더 배우고 느끼고 싶다는 열정만은 모두가 다르지 않다. 그 온기가 날란다에 숨결을 불어 넣고 순례객 모두를 학인으로 만든다.


날란다사원의 명성은 그 규모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곳에 모여 공부하고 연구했던 학승들, 그중에는 세연이 다하도록 날란다에서 배움의 열정을 바쳤던 이들도 있었다. 그들이 있었기에 날란다는 세계 최고 대학이라는 명성을 쌓을 수 있었다. 그들이 날란다사원, 날란다대학의 참 모습이리라.


순례객들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무거웠던 마음 훌훌 털어내고 다시 날란다사원으로 시선을 돌린다. 비록 화려한 옥루와 보대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의 열정을 갖고 함께 길을 나선 도반들과 함께하는 오늘, 날란다의 넓은 교정은 따뜻하게 빛나고 있었다. (계속)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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