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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라즈기르 날란다사원 - 하

교단의 기둥 사리불·목건련 고향은 1250비구승가 탄생한 교화의 터전

지혜·신통제일 존경받으며

죽음까지 함께한 평생 도반

초기교단 형성·포교 헌신

 

빔비사라·왕사성으로 익숙

죽림정사·영취산 불연의 땅

옛 영화 사라진 시골이지만

불교사 영원히 기억될 성지

 

 

▲날란다사원에는 이곳 날란다에서 태어나고 입적한 사리불존자를 기념해 아쇼카왕이 세웠다는 석탑이 있다.

 

 

세계 최초의 불교대학이자 최대 규모, 최고 수준의 교육환경을 갖추고 있던 날란다사원. 날란다라는 작은 마을을 세계적인 명소이자 불교성지로 끌어올린 날란다사원은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서도 초기 교단의 버팀목이 되었던 두 제자, 사리불존자와 목건련존자의 추억을 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지혜제일’로 불리는 사리불존자는 날란다마을 촌장의 아들로, ‘신통제일’ 목건련존자는 건너편 콜리타마을 촌장의 아들로 비슷한 시기에 태어났다. 젊은 시절부터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법을 찾아 한 스승 밑에서 공부했던 사리불과 목건련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은 후 함께 부처님께 귀의했고 이후 고향에서 같은 시기에 함께 입적했다.

 

특히 날란다사원에는 이곳에서 태어나고 입적한 사리불존자 기념탑이 남아있다. 사리불은 평생의 도반이었던 목건련의 입적이 다가오자 석가모니 부처님께 목건련과 함께 입적할 수 있도록 허락을 청했다. 교단을 떠받치던 두 제자가 함께 입적한다는 것은 붓다에게도 큰 슬픔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세연이 다했음을 알고 있었던 부처님은 그들의 입적을 허락한다. 사리불은 자신의 고향 날란다로 돌아와 친지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먼저 입멸에 들었다. 사리불의 입적 소식을 들은 목건련 역시 고향 콜리타마을로 돌아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한 후 입멸했다. 함께 성장하고 출가해 깨달음을 얻고, 이어 함께 입적한 도반. 두 사람의 평생에 걸친 아름다운 우정과 수행은 이곳 날란다를 배경으로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펼쳐졌고 지금까지 향기처럼 서려있다.

 

물론 사리불과 목건련이 함께 거닐던 날란다에는 이와 같이 거대한 사원이나 대학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 남아있는 사리불존자탑 역시 기원전 3세기경 아쇼카왕이 사리불존자를 흠모해 그가 입멸한 자리에 세운 것이라고 한다. 아마도 그 인연이 씨앗이 되고 사리불에 대한 후대인들의 끝없는 존경과 흠모가 날란다라는 작은 마을의 사원을 세계 최고의 교육시설로 성장시킨 힘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날란다사원이 세계 최고의 불교대학으로 성장한 것 역시 결코 우연이 아닌 듯하다. 사리불존자는 지혜제일이라는 별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전하는데 있어서도 단연 으뜸이었다. 경전에서는 석가모니부처님을 대신해 사리불이 설법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또한 부처님 설법을 듣고 잘 이해하지 못한 수행자들은 사리불존자를 찾아가 궁금한 점을 묻기도 했다. 사리불존자가 보충설명을 한 셈이다. 이 밖에도 사리불존자는 최초의 사미였던 라훌라존자의 스승이 되어 20세 미만 사미에 대한 교육법, 스승과 상좌의 관계, 교단의 서열 기준 등 교단 내 많은 부분, 특히 교육에 관한 부분들을 체계화 시켰다. 이러한 사리불이 태어나고 입적한 곳인 날란다사원은 사원이 생기기 이전부터 이미 교육과는 각별한 인연이 있는 땅이었음이 분명하다.

 

물론 날란다불교대학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대승불교 교학의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는 중관학과 유식학이 2~3세기 들어 바로 이곳 날라다 출신의 학자들에 의해 체계화되고 세계화됐기 때문이다. 북방 대승불교의 기초를 확립한 중관파의 시조 용수(龍樹. Nagarjuna)가 바로 이곳 날란다에서 수학했고 유식불교의 창시자로 알려진 무착(無着, Asanga), 그의 동생이었던 세친(世親, Vasubandhu) 또한 날란다불교대학 출신이다. 이들의 학문적 업적과 발자취를 따라 대승불교는 성장하고 확산됐다. 더불어 대승불교 중심지로서 날란다불교대학 역시 불교학의 중심지가 되어 전 세계 학승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날란다사원의 한 축을 겨우 살펴봤을 뿐인데 서려있는 역사와 흐르는 이야기들이 쌓여있는 벽돌만큼이나 무수하다.

 

하루 종일 돌아다녀도 다 살펴보기에 시간이 부족하다는 날란다사원을 뒤로하고 발길을 옮긴다. 날란다 인근 라즈기르는 부처님의 향훈이 짙게 남아있는 각별한 불연의 도시이자 교화의 터전이었다.

 

라즈기르의 옛 이름은 라자그리하, 우리에게는 왕사성(王舍城)이라는 한문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부처님 재세시 라자그리하는 북인도 지역 강대국이었던 마가다국의 수도였다. 동시에 북인도 일원에서 가장 큰 도시가운데 하나였다. 새로운 문물과 사상들이 라자그리하에 모였고 수많은 수행자들이 명성을 떨쳤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수행자 시절 첫 스승이었던 알라라깔라마와 헤어진 후 새로운 스승을 찾아 온 곳도 바로 라자그리하였다. 당시 마가다국을 다스리던 빔비사라왕은 첫 눈에 싯다르타가 여느 수행자와는 다름을 알아봤다. 그는 싯다르타에게 나라 전부를 주겠다며 자신의 곁에 머물러 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싯다르타의 관심이 아님을 안 빔비사라왕은 “깨달음을 성취 한 후 가장 먼저 이 도시를 찾아와 제일 먼저 깨우침을 달라” 청했다. 이 인연은 이후 37년간 이어지며 라자그리하는 수많은 법이 설해진 도시이자 교화와 교단 성장의 든든한 터전이 되어주었다.

 

 

▲빔비사라왕이 석가모니부처님께 보시한 교단 최초의 사찰 죽림정사.

 

 

성도하신 첫 해 부처님께서는 약속대로 라자그리하를 방문하셨다. 부처님께 귀의한 빔비사라왕은 부처님이 머무실 수 있도록 성 북문 밖에 있던 울창한 대나무 숲, 죽림을 보시했다. 바로 교단 최초의 도량 죽림정사였다. 죽림정사와 함께 부처님께서 즐겨 머무시며 법화경 등 수많은 설법을 하신 영취산도 라자그리하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부처님 입멸 후 1차 경전의 결집이 이루어진 칠엽굴, 아들 아자타샤트루왕에 의해 유폐 당한 빔비사라왕 감옥터 등이 모두 옛 라자그리하, 지금의 라즈기르에 남아있다.

 

날란다사원을 나선 일행은 영취산으로 향했다. 영취산의 정식 명칭은 그리다쿠타, 하지만 우리에게는 낯선 이름이다. 영취산(靈鷲山)이란 ‘성스러운 독수리의 산’이라는 의미다. 산봉우리에 있는 바위가 독수리를 닮아 서라고도 하고 이 산에 독수리가 많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걸어서 30분, 그리 가파르지 않지만 쉼 없이 이어지는 오르막길이 제법 힘에 겹다. 길가에는 순례객들의 자비에 호소하는 늙고 가난한 여인들의 구걸이 줄을 잇는다. 부처님 재세시 부처님과 천이백오십비구승가가 오르내렸을 길, 부처님의 설법을 듣기 위해 보살·신장들까지 내려와 그 유명한 ‘영산회상도’의 무대가 되었다는 영취산의 오늘날 모습이 씁쓸하다. 하지만 일행들 모두 설레는 마음으로 경쾌하게 걸음을 옮긴다. 건강한 이들이 앞장서 힘들어하는 이들을 끌어준다. 젊은이들은 뒤쳐지는 일행이 없도록 뒤를 따른다. 그렇게 모두 함께 영취산 정상에 올랐다.

 

 

▲법화경이 설해진 영취산 정상의 설법단.

 

 

정상에는 부처님의 설법을 기념하는 설법단이 소박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모두들 부처님을 뵙는 듯 정성을 다해 예를 갖추고 이번 순례의 지도법사 혜인 스님의 법문에 귀를 기울인다.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하실 때도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모두의 마음속에 부처님이 있고 그 가르침이 전해지며 그 가르침을 따르는 승가와 재가가 한자리에 모였으니 부족한 것은 없어 보인다.

 

 

▲영취산 정상에 모여 앉은 성지순례 동참 불자들.

 

 

두 시간 남짓 가벼운 산행과도 같은 영취산 순례를 마치고 해질녘 쉴 곳을 찾아 숲으로 모여드는 산새들처럼 일행은 죽림정사로 발길을 옮겼다. 빔비사라왕이 보시할 당시 죽림정사는 성문 밖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라즈기르 시가지에 자리하고 있다. 대나무를 엮어 만든 소박한 출입문이 죽림정사를 상징하는 듯하다. 울창한 대나무 숲을 상상했지만 울창한 아름드리나무들이 대나무보다 더 많이 눈에 띈다. 빔비사라왕은 이곳에 부처님께서 머무실 소박한 움막을 지어드렸다는데 지금은 찾아볼 길이 없다. 돌이나 벽돌 등 당시 최고의 건축 소재를 사용했더라면 날란다사원 같은 유적으로나마 남아있겠지만 소박하고 조용한 곳을 원하셨던 부처님의 거처엔 그때와 마찬가지로 울창한 숲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러니 느낌은 공원에 가깝다.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제법 큼지막한 연못도 죽림정사를 공원처럼 보이게 하는데 일조한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이미 중요하지 않다. 순례객들은 다시 한 번 예를 올린다. 보이지 않는 것을 알아보는 것. 부처님과 사리불, 목건련 존자의 만남이 바로 그러했다.

 

 

▲죽림정사 내에 조성돼 있는 연못.

 

 

부처님께서 죽림정사에 머무시던 때 라자그리하의 거리에서 탁발을 하던 앗사지(초천법륜을 들은 다섯 비구 가운데 한 명)로부터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해들은 청년 우파티사는 단박에 그분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스승임을 알아챈다. 그는 오랜 친구 콜리타와 함께 죽림정사로 부처님을 찾아갔다. 이들이 죽림정사로 들어서자 부처님은 설법을 멈추시고 만면에 환한 웃음을 띠셨다.

 

“비구들이여, 길을 열어주어라. 저기 훌륭한 나의 두 제자가 찾아오고 있다.”

 

청년 우파티사와 콜리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부처님께 귀의하고 제자가 되었다. 그들이 바로 교단의 양대 기둥, 부처님의 오른편 제자와 왼편 제자라 불린 사리불존자와 목건련존자였다.

 

오랜 인연이 있었음이다. 부처님께서는 사리불과 목건련이 자신들을 따르던 250명의 동료와 함께 죽림정사로 들어서는 모습을 보는 순간 그들이 자신의 제자임을 아셨으니 말이다. 이때 함께 온 250명의 대중이 교단에 귀의하면서 모든 불교 경전에 등장하는 ‘천이백오십명의 비구대중’이 비로소 죽림정사에서 형성되었다.

 

라즈기르의 하루해가 기울고 있다. 부처님의 발자취와 수많은 인연담들이 연못처럼 고여 있는 도시. 라즈기르는 마가다국의 수도가 북서쪽 파트나로 옮겨진 후 화려했던 영광과 활기를 점차 잃어갔다. 그리고 지금은 그저 비하르주의 작은 도시로 명맥을 잇고 있다. 하지만 부처님의 법을 기억하고 따르는 이들의 기억 속 라즈기르는 영원한 라자그리하, 왕의 도시, 위대한 법왕 붓다의 도시로 남아 있을 것이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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