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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일구에 깨달을 수 있다면 조사와 부처의 스승이 된다

기자명 법보신문

제대로 모르고 가르친다면
똥덩어리 입에 넣어주는 격
실체 없는 도의 이치 모르면
업의 바다 헤매는 중생일 뿐


부처·가르침·구하는  길이
모두 하나인데 이름만 셋
지식·알음알이 쓸어버리면
깨달음 향해 직행할 수 있어

 

 

▲소림사 입설정. 혜가 스님이 법을 얻기 위해 달마 스님에게 눈 오는 날 팔을 베어 던졌다는 설화가 깃든 곳이다.

 

 

有一般不識好惡하야 向敎中하야 取意度商量하야 成於句義하나니 如把屎塊子하야 向口裏含了다가 吐過與別人하며 猶如俗人이 打傳口令相似하야 一生을 虛過로다 也道我出家라하나 被他問著佛法하면 便卽杜口無詞하야 眼似漆突하며 口如楄擔하니라 如此之類는 逢彌勒出世호대 移置他方世界하야 寄地獄受苦니라

 

해석) “좋고 나쁨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경전 속 글귀를 이리저리 헤아리고 따져서 의미를 지어낸다. 이것은 똥덩어리를 집어 입속에 넣었다가 다시 뱉어서 다른 사람에게 먹여주는 것과 같다. 이는 세간의 사람들이 특별한 말을 입에서 입으로 전달하는 것과 같아서 결국 일생을 헛되이 보내게 된다. 그러면서 ‘나는 출가자다’라고 말을 하지만 다른 사람이 불법을 물으면 입은 꼭 다물고 말을 못한다. 그 사람의 눈은 새까만 굴뚝같고 입은 변담(擔)과 같다. 이런 무리들은 미륵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더라도 다른 세계로 옮겨가면서 지옥에 떨어져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강의) 임제 스님의 말씀에는 거침이 없습니다. 불교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가르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가 무섭습니다. 이들의 말은 똥덩어리를 입에 넣었다가 다른 사람의 입에 넣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의미 없는 낱말을 누가 틀리지 않고 빨리 뒷사람들에게 끝까지 전달하느냐하는 시합을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전구령(傳口令)이 그런 뜻입니다. 이런 까닭에 불법에 대해 물으면 딱 부러지게 말을 못합니다. 눈은 마치 검은 굴뚝과 같이 깜박거릴 뿐이고 입은 긴 대나무 양쪽에 짐을 매달고 다니는 변담(擔)처럼 한일자로 굳게 다물어져 있을 뿐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 지은 업이 망망대해처럼 쌓여 만약 이 세계에 미륵 부처님이 출현하시여 모든 중생을 성불로 이끌어도 이들은 다른 세계로 옮겨가 지옥의 업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무서우면서도 무거운 말씀입니다.

 

大德아 儞波波地往諸方하야 覓什麽物하야 踏儞脚板闊고 無佛可求며 無道可成이며 無法可得이니라 外求有相佛하면 與汝不相似니 欲識汝本心인댄 非合亦非離로다 道流야 眞佛은 無形이요 眞道는 無體요 眞法은 無相이라 三法이 混融하야 和合一處니 旣辨不得을 喚作忙忙業識衆生이니라 問, 如何是眞佛眞法眞道오 乞垂開示하소서 師云, 佛者는 心淸淨이 是요 法者는 心光明이 是요 道者는 處處無礙淨光이 是라 三卽一이니 皆是空名 而無實有니라 如眞正作道人은 念念心不間斷이라

 

해석) “대덕 스님들이여! 그대들은 허둥지둥 바쁘게 제방을 돌아다니면서 무엇을 얻고자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니는가. 구할 만한 부처도 없고 이룰 만한 도도 없으며, 얻을 만한 법도 없다. 밖으로 모양이 있는 부처를 구한다면 결코 그대들과 비슷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들의 본래 마음을 알고자 하는가. 그것은 합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나눠져 있는 것도 아니다. 여러분! 참된 부처는 형상이 없고, 참된 도는 실체가 없으며 참된 법은 모양이 없다. 이 세가지 법이 혼합되고 융화되어 한가지로 화합한 것이니, 이러한 이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을 망망한 업식의 바다에서 헤매는 중생이라고 하는 것이다.”


학인이 물었다. “무엇이 참된 부처이고, 참된 법이며, 참된 도입니까. 부탁하오니 가르쳐 주십시오.” 임제 스님이 대답했다. “부처란 마음이 청정한 것이고 법이란 마음에서 나오는 지혜의 광명이며 도란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깨끗한 빛이다. 이 셋이 곧 하나이니 모두 헛된 이름일 뿐이다.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수행자라면 순간순간 마음에서 끊어지지 않아야 한다.”

 

강의) 부처는 모습으로 구할 수 없습니다. 밖에서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다 허망한 것이니, 만약 형상에서 형상이 없음을 본다면 곧 여래를 보게 될 것이다. ‘금강경’의 가르침입니다. 부처는 형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형상으로 찾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만약 여래를 물질로서 보거나 음성으로 구하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니 결코 여래를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부처와 법, 도는 실체가 없는 것임을 잘 알아야 합니다. 법당에 있는 거룩한 불상에도, 경전에 있는 거룩한 가르침에도 우리가 떠올리는 고귀한 모습에도 부처는 없습니다. 모습이나 소리나 어떤 실체로서 부처를 찾으려고 한다면 억겁의 세월 동안 망망한 윤회의 세계에서 헤매게 되는 결과만을 낳을 뿐입니다. 발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녀봤자 헛수고입니다. 그러므로 부처(佛)와 부처님의 가르침(法)과 깨달음으로 가는 길(道)은 결국 하나입니다. 굳이 구분해 말을 하지만 모두 헛된 이름일 뿐입니다. 이를 잘 알아서 한 순간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自達磨大師가 從西土來로 祇是覓箇不受人惑底人이니 後遇二祖하야 一言便了하고 始知從前虛用功夫니라

 

해석) “달마 대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이래로 단지 다른 사람에게 속지 않는 사람을 찾았다. 그 뒤에 이조를 만났는데 이조가 한마디 말에 곧 깨닫고 지금까지의 공부가 헛된 것이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강의) 이조는 혜가(慧可) 스님입니다. 달마 스님이 인도 사람임을 감안하면 중국 사람에 의한 중국 선종의 시작은 혜가 스님이 될 것입니다. 혜가 스님이 달마 스님을 만나 깨닫게 되는 장면은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이미 신광이라는 법명을 쓰는 스님으로 수행 중이던 혜가 스님은 달마 스님을 친견하자 말합니다. “불안한 마음을 편안케 해주십시오.” 그러자 달마 스님이 대답합니다. “내가 그 불안한 마음을 편안케 해 주겠다. 그 마음을 가져와 봐라.” 그러자 혜가 스님이 불안함 마음을 찾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불안한 마음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다시 혜가 스님이 말합니다. “불안한 마음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자 달마 스님이 말합니다. “만약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이 어찌 그대의 마음이겠는가. 나는 이미 그대의 마음을 편안케 해주었다.” 그러자 혜가 스님은 바로 깨닫습니다. 안심법문(安心法門)이라고 합니다. 안심은 마음을 편안케 한다는 뜻입니다. 혜가 스님은 결코 마음을 찾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마음은 형상이나 소리, 문자를 초월해 있습니다. 마음 자체가 본래 텅 비어 없는데 어디에 불안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불안은 하늘이 무너질까 무서워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는 중국 기나라 사람의 근심인 기우(杞憂)와 같습니다. 진실이 아닙니다. 혜가 스님은 이것을 단박에 깨달은 것입니다. 달마 스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속지 않는 사람을 찾았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만들어 논 관념이나 규범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을 찾았다는 뜻입니다. 말과 문자, 혹은 잘못된 가르침에 현혹되지 않는 사람입니다. 달마 스님의 뒤를 이은 혜가 스님이 바로 그런 인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달마 스님의 말 한마디에 기존에 가지고 있던 모든 지식과 알음알이를 한 번에 쓸어 치워버리고 깨달음으로 직행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山僧今日見處는 與祖佛不別하니 若第一句中得하면 與祖佛爲師요 若第二句中得하면 與人天爲師요 若第三句中得하면 自救不了니라

 

해석) “산승의 오늘날 견해는 조사나 부처와 다를 바가 없다. 만약 제일구에서 깨달으면 조사나 부처의 스승이 된다. 만약 제이구에서 깨달으면 인간과 천상계의 스승이 될 것이고 만약 제삼구에서 깨달으면 자기 자신마저도 구제하지 못하게 된다.


강의) 임제 스님의 삼구(三句)는 앞서 나온바가 있습니다. 부연하면 일구(一句)는 허공에 도장을 찍는 것과 같고 이구(二句)는 물에 도장을 찍는 것과 같으며 삼구(三句)는 진흙에 도장을 찍는 것과 같습니다. 허공엔 도장을 찍어도 흔적이 남지 않습니다. 주관과 객관이 완전히 하나가 되어 분리되지 않습니다. 나와 진리가 하나인 세계입니다. 물에 도장을 찍으면 잠시 흔적이 남았다가 사라집니다. 주관과 객관이 잠시 나뉘었다가 곧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흙에 도장을 찍으면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영원히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주관과 객관이 나눠져 있고, 나와 진리가 확연히 구분돼 있습니다. 그래서 삼구는 사람의 근기에 대한 설명입니다. 일구는 상근기, 이구는 중근기, 삼구는 하근기에 해당 될 것입니다. 이를 좀 더 쉽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일구에 깨닫는다는 말은 임제 스님의 할(喝)이나 덕산 스님의 방(棒)처럼 기별만 있으면 깨닫는 것을 뜻합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상근기입니다. 이구에 깨닫는 것은 ‘뜰 앞에 잣나무니’하는 화두를 듣거나 참구해서 깨우치는 것입니다. 중근기입니다. 삼구에 깨닫는 것은 불교의 가르침을 온갖 이론으로 설명하고 분석하고 그러면서 이해하는 것인데, 임제 스님은 이미 깨달음은 글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자신도 구제하지 못할 하근기라는 뜻입니다.


정리=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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