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바이살리의 릿차비스투파
6. 바이살리의 릿차비스투파
  • 법보신문
  • 승인 2013.02.26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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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변한다”흔적뿐인 사리탑에붓다음성 울리는 듯

인도 최초 공화정인
밧지연합 중심 도시


자유로운 토론 문화
진취적인 분위기는
여성출가·2차결집의
정서적·문화적 토대

 

 

▲부처님 입멸 후 수습된 진신사리를 봉안했던 근본 8탑 가운데 릿차비족이 세운 사리탑. 그러나 아쇼카왕의 사리 발굴 후 복원되지 못한 채 남아있다.

 


아름다운 도시 바이살리로 간다. 부유하고 활기차던 릿차비족의 심장. 인류 최초의 공화정을 실현했던 밧지연합의 수도. 붓다가 사랑한 도시.


바이살리는 석가모니부처님과 각별한 인연이 있는 도시다. 수행자 싯다르타가 첫 스승인 알라라깔리마를 만난 곳이었고 성도 후에는 다섯 번째와 마지막 하안거를 보내셨다. 여성 출가를 처음으로 허락하신 곳도, 가뭄을 퇴치하는 이적을 보이신 곳도 바이살리였다. 무엇보다도 바이살리에서 3개월 후 열반하실 것임을 처음으로 공표하셨다.


부처님 열반 후에도 바이살리의 깊은 불연은 계속됐다. 다비 후 수습된 진신사리는 여덟 종족이 나누어 받아 각각 봉안했는데 그 가운데 한 곳이 바로 바이살리였다. 이곳 바이살리를 포함 여덟 곳에 봉안된 진신사리는 다시 200여년 후 아쇼카 대왕에 의해 발굴되어 전국에 8만4000여 개의 사리탑을 세우는데 사용되었다. 부처님 입멸 100여년 후 계율문제가 불거지고 그로 인해 700여 명의 장로가 동참해 열린 2차 결집의 장소도 바이살리였다. 어디 그 뿐이랴. 유마거사의 고향이며 대승불교의 태동지 역시 바이살리니 이 땅에 서려있는 불연의 장구함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불연이 깊어서일까, 아니면 그들이 쌓은 덕이 불연을 맺어줬을까. 바이살리는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도시임이 분명하다. 기원전 6세기경부터 릿차비족은 바이살리를 중심으로 8개 지역 부족이 연합한 인도 최초의 공화정을 이룩했다. 밧지연합이라 불린  이 정치제도는 각 부족의 대표 가운데 최고 지도자를 선출하는 공화정이었으며 각 부족 연합이 동참하는 회의에서 자유로운 토론을 거쳐 의사를 결정하는, 오늘날의 의회제도와 같은 형태였다.


이러한 밧지연합에 대한 부처님의 평가는 매우 높았다. 마가다국의 아자타샤트루왕이 밧지연합을 토벌하려 할 때 부처님은 ‘국가가 쇠망하지 않는 일곱 가지 법’을 설하셨다. 그것은 대화와 토론에 기반한 정치,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화합, 법과 규칙의 준수, 부모에 대한 효도와 공경, 남녀 간의 성윤리 확립과 유덕한 풍속, 전통과 조상에 대한 존중, 도덕과 수행자에 대한 존경 등이었다. 이 일곱 가지 덕목이 잘 지켜지는 나라는 강성하고 안온할 것이라 하셨는데 그 예로든 곳이 바로 밧지연합이었다. 부처님께서는 덧붙여 ‘밧지연합과 같이 교단을 운영한다면 승가는 파괴되는 일 없이 나날이 번창할 것’이라 하셨으니 당시 밧지연합의 정치·문화 체계가 얼마나 수승했는지 짐작할 만하다. 자유로운 의사 개진과 활발한 토론이 만들어낸 밧지연합, 그 중심지였던 바이살리는 자유롭고 개방적인 도시였다. 그곳 사람들 또한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기상이 충만했을 것이다. 그런 바이살리를 붓다는 사랑했음이다.

 

 

▲바이살리 시가지는 허름한 시장의 모습이다.

 


라즈기르에서 비하르주의 주도인 파트나를 거쳐 갠지스강 북쪽 약 30㎞ 지점에 있는 고대의 도시 바이살리까지는 버스로 4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일행은 새벽 5시에 길을 나선다. 불연이 깊은 도시인만큼 도착해 둘러볼 곳이 많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처음 봉안됐던 근본 8탑외에도 원숭이왕이 부처님께 꿀을 공양했다는 원후봉밀터도 있다. 특히 이곳에는 인도 전역에서 가장 완전한 모습으로 보존돼 있는 아쇼카 석주가 남아있다. 이밖에도 최초의 비구니정사인 대림정사터와 바이살리왕궁터 등 숨 가쁜 일정이 기다리고 있다.


출발은 순조롭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동참대중은 버스 안에서 함께 아침 예불을 올리는 것으로 하루의 순례를 시작한다. 도로 상태가 좋지 않아 간혹 버스가 심하게 흔들리지만 예불문을 합송하는 순례단의 목소리는 흔들림 없고 청아하다. 이 목소리처럼 오늘 하루도 견고한 신심의 법향이 가득하길 기원한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한번 멈춰선 버스가 좀처럼 움직이질 않는다. 파트나 인근이다. 갠지스강을 건너야하는데 그 목전에서 발목이 잡혔다. 반대편 차선에도 오는 차가 거의 없는 것으로 봐서는 어디선가 길이 막혀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임이 분명하다. 예상치 못한 복병에 한참을 동분서주하던 가이드가 상황을 전한다. 갠지스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에 문제가 생겨 보수공사중이라 길이 막혔다는 것. 그러고 보니 얼마 전 그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성지순례 중 궁금하신 점이 있으시면 무엇이든 성실히 대답해드리겠지만 딱 한 가지 대답 불가능한 질문이 있습니다. 바로 ‘도착지까지 몇 시간이나 걸릴까요’입니다. 인도의 도로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오직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열심히 기도할 뿐입니다.”


가이드가 말했던 바로 ‘그런 일’이 벌어졌음이다. 우회도로도 없으니 언제까지 기다려야 될지 알 수가 없다. 그저 어서 빨리 차가 움직이길 기다리며 차안에 우두커니 앉아있을 수 밖에. “인도의 도로 사정이 아직 한국에 미치지 못한다”며 가이드는 “죄송합니다”를 연신 반복한다.


하지만 그의 잘못이 아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저 인도라는 나라에서 언제든 마주칠 수 있는 그런 에피소드일 뿐이다. 그렇게 길가에서 고작 몇 미터 움직이고 다시 기다리기를 7시간 여, 예정됐던 오늘 하루 일정에 대한 기대를 거의 포기할 때 즈음 차는 간신히 바이살리에 도착했다. 라즈기르를 출발한지 꼬박 10시간 만이다.
‘경비를 위한 성벽이 세 겹으로 처져있는 성안은 언제나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여러 층으로 올라간 건물들이 줄을 이은 시가지 곳곳에는 아름다운 꽃들로 가득 찬 공원들이 자리하고 있어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한 곳’이라는 바이살리는 오늘 날 작은 시골마을이다. 세 겹의 성벽은 사라져 어디 즈음에 성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여러 층으로 올라간 건물들이 줄지어 있던 시가지는 낡은 상점들이 모여 있는 시장으로 변해 있다. 그 속의 붐비는 사람들과 물건을 사고파는 분주한 손놀림만이 이곳이 장사에 능했던 릿차비족의 중심도시였음을 말해주는 듯하다. ‘천상의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보려면 릿차비족을 보라’ 할 정도로 릿차비족의 삶은 화려하고 풍요로웠으나 지금 바이살리 인구의 절반 이상은 가난한 천민들이다.

 

쿠시나가르 향하며
마지막까지 돌아 본
붓다 열반의 출발지


진신사리 봉안했던
근본 8탑이었으나
아쇼카대왕 발굴 후
흩어진 유적만 남아


긴 여정에 지칠 틈도 없이 소란함 가득한 바이살리의 시가지를 지나 릿차비스투파로 걸음을 재촉한다. 부처님 입멸 후 진신사리가 봉안되었던 근본 8탑 가운데 하나로 진신사리를 나눠받은 릿차비족이 세웠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릿차비스투파 유적 전경.

 


차에서 내리니 어디선가 어린아이들의 책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울린다. 릿차비스투파 입구에 있는 작은 학교다. 열 살 안팎의 아이들 20여 명이 마당에서 선생님을 따라 구구단을 외우고 있다. 책걸상도 없이 맨 바닥에 앉아서도 낭랑한 목소리로 열심히 따라 왼다. 그 모습이 얼마나 예쁜지 너나 할 것 없이 걸음을 멈춘다. 그 중 몇몇은 연필이라도 한 자루씩 사주라며 약간의 후원금을 내놓고서야 자리를 뜬다. 그런데 그 아이들의 목소리가 채 멀어지기도 전에 일행 사이로 바람보다 빠른 소문이 돈다. 공부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사실은 성지순례객들의 주머니를 노린 연기라는 것. 당연히 학교에 갔어야할 아이들이 후원금 몇 푼을 얻기 위해 연출된 상황에 동원되었다는 말이다. 진신사리탑을 친견하러 가는 길에 이 무슨 허망한 이야기란 말인가. 설마 전부 연극이기야 하겠어? 설혹 그렇다 해도 저 후원금 가운데 약간은 아이들을 위해 쓰이겠지. 그렇게 에둘러가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풍요롭고 아름다운 도시’ 바이살리의 그림자가 무거운 걸음 뒤로 길게 드리워진다.

 

 

▲릿차비스투파 입구에서 공부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 혹자는 이 수업이 순례자들의 기부금을 목적으로 연출된 상황이라고 말한다.

 


릿차비스투파는 둥그렇고 커다란 양철지붕을 이고 있다. 아쇼카 대왕은 이곳의 사리를 발굴해 전국에 탑을 세웠다. 그러니 지금 이곳엔 진신사리가 없다. 사리탑도 아직까지 복원되지 못하고 있다. 사리가 안치되었을 자리와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던 거대한 스투파의 기단 흔적만이 뚜렷하다.


정각을 이루고 45년, 수많은 길을 오가며 법을 전하는 사이 어느덧 세납 여든에 접어든 석가모니부처님은 그해 여름 이곳 바이살리에서 3개월간의 하안거를 보내셨다. 노구는 무더위에 심한 병을 얻고야 말았다.
“아난다야, 내 나이 여든, 내 삶도 거의 끝나가고 있구나. 여기저기 부서진 낡은 수레를 가죽 끈으로 동여매 억지로 사용하듯 여기저기 금이 간 상다리를 가죽 끈으로 동여매 억지로 지탱하듯, 내 몸도 그와 같구나.”


바이살리에서의 하안거는 부처님 생애 마지막 안거가 되었다. 부처님께서는 석 달 후 열반에 드실 것임을 예고하셨다. 그렇게 바이살리는 열반으로 향하는 부처님 최후 여정의 출발지가 되고야 말았다.


하안거를 마치고 북쪽 쿠시나가르로 길을 잡으신 부처님.


‘…나지막한 언덕의 북쪽 성문에서 부처님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커다란 코끼리가 몸을 돌려 떠나온 숲을 돌아보듯, 천천히 몸을 돌려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시더니 나지막이 말씀하셨다. “아난다, 바이살리를 보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이구나.”…’


여든의 노구를 이끌고 마지막 길을 떠나시던 부처님의 모습이 사리탑 위로 스친다. 저 흩어진 사리탑이 가죽끈으로 묶어 간신히 끌고 가는 수레처럼 늙고 쇠한 부처님 모습 같아 서글프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다는 소식에 통곡하며 그 뒤를 따랐던 바이살리 사람들의 무너지는 가슴 같아 서글프다. 부처님이 강을 건너신 후에도 강가에 서서 울고 있는 이들에게 발우를 띄워주며 위로한 부처님의 애잔한 속마음 같아 서글프다. 진신사리가 사라진 채 남겨진 이 탑무더기의 흔적이 오늘 마주친 바이살리의 처지 같아 또 서글프다. 사리탑 위로 떠나고, 변하고, 흩어지는 서글픔이 몰려들어 켜켜이 쌓인다.


원후봉밀터도, 대림정사터도 둘러보지 못한 채 저무는 해 그림자에 떠밀려 또 길을 떠난다. 고개 돌려 서글픈 바이살리를 눈에 담는다.


“변하지 말고 바뀌지 말라고 아무리 애원해도 그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그대들에게 늘 말하지 않았는가. 은혜와 사랑은 덧없고, 한 번 모인 것은 흩어지기 마련이라고.”


바이살리에서 설하신 부처님의 가르침. 지금 바이살리는 그 가르침을 전하고 있음인가. 그렇다며 “너 자신을 등불로 삼고, 너 자신에게 의지하라. 법을 등불로 삼고, 법에 의지하라”시던 가르침은 지금 우리 안에 남아 있을까. 갈 길은 아직 멀고 날은 어두워진다. 열반의 땅 쿠시나가르로 향한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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