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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천장사(암)·정혜사

기자명 법보신문

하늘이 감춘 곳에서 몰록 일어난 지혜 대지를 뒤덮다

‘고삐 없는 소’가 된 경허 선사
끝없는 정진으로 깨달음 닦으며
제자 수월·혜월·만공 스님과
선기 번뜩였던 연암산 자락 도량


만공 스님은 덕숭산 정혜사에서
눈 푸른 납자 제접하며 법 전해
덕숭문중 가풍으로 오롯히 전승

 

 

 

▲ 시골집 같다. 초하루인데도 신도 한 명 없이 스님 혼자 목탁 두드리며 예불 중이었다. 유기견이었던 길손이만 짖어대며 객을 마중한다. 외로워 보이는 도량에서 외려 선기가 느껴졌다. 경허 선사, 이곳에서 깨달음을 얻었다(사진 위). 만공 스님의 법맥은 전강 스님이 받았다. 만공 스님은 정혜사에서 법을 전했다. 정혜사 앞마당에 남매탑과 소나무 두 그루가 나란히 섰다. 경허 스님과 만공 스님인가, 만공 스님과 전강 스님인가. 저무는 하늘 향해 곧게 선기를 뻗어 올렸다.

 


기와를 쌓아 만든 담이 끝난 곳에 단출함 하나 잠들어(?) 있었다. 탑 하나 석등 둘, 인법당 하나, 산신각 하나, 공양간 하나, 요사채 하나, 작은 선원 하나, 간이 지장전 하나가 전부였다. 경허 선사 오도보림도량 연암산 천장사(암)는 아들, 딸 모두 떠난 시골집 마냥 침묵하고 있었다. 바람이 목탁소리를 싣고 연암산 곳곳에 흩뿌렸다. 풍경도 슬며시 소리하나 덧붙였다. 길에 버려졌다가 주지 허정 스님과 인연 맺은 길손이도 짖어대며 객을 마중했다. 여느 절의 초하루와 사뭇 달랐다. 대중의 염불소리도, 공양간의 왁자지껄함도 없었다. 천장사 인법당 앞에 신발 하나만 가지런했다. 예불 드리는 스님의 목소리가 잡음(?) 없으니 도리어 청량하다.


법당 오른쪽엔 경허(1849~1912) 선사 입적 100주기를 맞아 세운 기념탑이 자리했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니, 외로워 보이던 도량에서 외려 선기(禪氣)가 느껴졌다. 원성문(圓成門)이다. 역시 단출했다. 1평이 채 안됐다. 경허 스님의 방이었단 푯말이 세워져 있었다. 좌복 하나 겨우 들어가는 골방에 경허 선사가 눈을 부릅뜨고 앉았다. 단출함 속에 잠이라니…. 섣부른 판단이었다.


1881년 6월 어느 날이었다. 한 스님이 방문을 박차고 나왔다. 형색은 남루했으나 눈빛은 형형했다. 이가 들끓던 다 헤진 누더기 옷이 무색하게도 스님의 세포 하나하나에선 환희심이 퍼지고 있었다.


“홀연히 고삐 뚫을 곳이 없다는 소릴 듣고/몰록 깨닫고 보니 삼천대천세계가 내 집이네./유월 연암산 아랫길에/일 없는 들사람이 태평가를 부르네.”

 

 

▲좌복 하나 들어가는 골방에 경허 선사가 눈을 부릅뜨고 앉아 있었다.

 


경허 선사다. 1년 동안 빗장 걸고 공양도 대소변도 방에서 해결했고, 모기와 빈대가 몸을 물어뜯어도 꿈쩍 않고 정진했던 결과를 본 게다. 그 때가 경허 선사 36세 되던 해다. 이 방이 원성문이니, 깨달음을 원만하게 이뤘다는 뜻은 뭘까. 당시 대강백으로 이름 높던 경허 스님이 참선을 시작한 시기는 1879년 여름이었다. 환속한 은사스님을 만나러 가다 전염병 도는 마을에서 ‘죽음 앞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며 동학사에서 생사윤회의 고리를 끊고자 가부좌를 틀었다. 방해되는 졸음은 살가죽을 찌르는 날카로운 송곳이 물리쳤고, 턱 밑에 괸 날선 칼은 용맹정진을 채찍질했다. 3개월간 씨름한 끝에 “소의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어느 사미의 말에 문득, 깨달음을 얻었다. 소가 콧구멍이 없으면 고삐를 묶을 수 없으니, 이리저리 끌려 다닐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곧 자유다. 한 번 깨달음에 이르렀다고 해서 완벽할리는 만무했을 게다. 그 깨달음을 굳게 다지는 ‘보림’이 필요했다. 친형 태허 선사가 모친 박씨를 모시고 수행 중이던 천장암으로 수행처를 옮겨 정진해 고삐 뚫을 콧구멍 없는 소가 됐다. 천장사(암)는 하늘이 감춘 절(天藏寺)이다. 왜 천장사(암)인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속세 일에 끄달리지 말고 공부만 하라고 하늘이 쉬이 내주지 않아서다.


단출하기 그지없는 이 작은 방에서 선기 하나만은 번뜩였을 터다. 이곳에서 구한말 꺼져가던 한국불교 선맥의 불씨를 지폈던 위대한 순간순간이 싹 텄다고 한다. 경허 선사가 법을 구했던 방 바로 옆방이 이를 대변하고 있었다. 원성문 같이 좁았다. 성인 남자 셋이 눕기도 벅찬 공간이었다. 만공 스님 방이란다. 제자들이 경허 선사를 시봉하며 머물렀던 방이었다. 경허 선사가 깨달음을 얻은 뒤 2년 뒤에 수월 스님이 천장암에서 출가하고, 이듬해 동학사에서 공부하던 만공 스님과 정혜사에서 정진하던 혜월 스님이 천장암을 수행처 삼았다. 경허 선사의 제자들은 ‘세 달(三月)’로 불린다. ‘북녘의 상현달’ 수월(1855~1928) 스님과 ‘남녘의 하현달’ 혜월(1861~1937) 스님 그리고 ‘중천의 보름달’ 만공(월면, 1871~1946) 스님이다. 제자들은 여기서 인천의 스승이던 경허 선사의 일거수일투족에서 가르침을 얻었다.


수월 스님은 스승을 떠나 북간도에 움막을 짓고 짚신을 삼아 오가는 사람들에게 밥을 해먹이고 짚신을 줘 보내는 관세음보살이었다. 사제였던 만공 스님은 생전에 “절에 손님이 오면 발 감싸게인 감발을 벗겨 손수 빨아서 불에 말렸다가 아침에 신도록 하고, 밤새 몸소 만든 짚신 3~4켤레를 바랑 뒤에 걸어줬다.”고 했다. 수월 스님은 천장사에서 머물던 시절엔 짚신 삼고 나무하며 방아를 찧어 스승과 절 식구들을 공양했다. 글은 몰랐지만 늘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일심으로 독송하며 몸 구석구석에서 다라니가 쉬지 않고 흘렀다. 혜월 스님은 천장암 근처 바위굴에서 7일간 정진 끝에 한 소식을 들었다. 정진 6일째 되던 날 스승이 “내일 길을 떠나야 하니 짚신 하나 지어달라”는 말에 한 켤레를 삼아 놓고 다른 짚신을 틀에 넣은 뒤 ‘탁’ 하고 두드리는 망치소리에 몰록 지혜가 솟구쳤다. 그 길로 개심사에 주석하던 스승에게 법을 인가 받고 통도사, 내원사, 범어사, 선암사에서 ‘천진불’로 불리며 선풍을 떨쳤다. 만공 스님은 주로 수덕사에서 스승의 선풍을 이어갔다. 스승이 만공 스님을 일깨운 유명한 일화가 있다. 무거운 쌀자루를 진 만공 스님이 “한 걸음도 못 가겠다”고 하자 일부러 달음박질치는 상황을 만들어 ‘무겁다’는 생각에 갇혀있는 제자의 발걸음을 채찍질하기도 했다.


하늘이 잔뜩 찌푸리기 시작했다. 만공 스님이 주석했던 덕숭산 정혜사로 향하는 발걸음에 조급함이 묻어났다. 허정 스님은 천장사(암) 마당 평상에 걸터앉았고, 길손이는 말없이 꼬리만 흔들었다. 급한 건 번뇌에 휩싸인 마음일 뿐. 내려가는 길, 혜월 스님이 정진했던 바위굴에 들러 참배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수덕사 대웅전 왼쪽으로 1000여개의 돌계단을 올랐다. 만공 스님이 ‘수행의 최적지’라 일컬었던 정혜사(定慧寺)는 쌍을 이룬 탑과 소나무가 마음을 송두리째 사로잡았다. 남매탑이라 불리는 두 기의 탑, 그 사이로 가지 드리운 나무 한 그루, 하늘 향해 곧게 뻗은 소나무 두 그루가 마음 속 잡념을 뒷방으로 물렸다. 동행했던 이는 이렇게 말했다. “남매탑 옆 저 나무는 경허, 만공 스님 법담을 엿듣고 싶어 나뭇가지를 뻗었다.”


만공 스님은 1904년 스승 경허 선사에게 법을 이어 받고 1905년부터 1946년 입적할 때까지 41년간 덕숭산을 떠나지 않았다. 만공 스님의 법맥을 이었던 대선사 전강 스님도 견성 전 마지막으로 안거했던 곳이 정혜사다. 전강 스님은 스승을 찾아와 선문답을 나눴다고 한다. 남매탑과 소나무 두 그루는 경허 선사와 만공 스님인가, 아니면 만공 스님과 전강 스님인가. 혹 경허 선사의 법을 이은 수많은 납자들인가. 탑이든 소나무든 저물어가는 하늘 향해 곧게 선기를 뻗어 올렸다. 소나무 아래 수덕사와 시내가 작게 웅크리고 있었다.


정혜사에는 능인선원이 있다. 만공 스님이 납자들을 제접했던 곳이다. 능인선원은 안거 때마다 25명의 수좌들이 정진한다고 선원장 스님이 일렀다. 방장 설정 스님도 똑같이 정진하며 대중운력도 함께 하신단다. 여름엔 땡볕에서도 일을 한다. 스님들이 먹는 채소는 손수 키워 거둔다. 설정 스님은 이런 가풍을 어린 시절부터 보고 익혔다. 덕숭산에 든 시기가 10대 때다. 경허 선사로부터 시작한 덕숭문중의 수행가풍이 오롯했다.


설정 스님은 “경허 선사는 일체 모든 언행이 수행이자 그대로가 법문이었다”고 했다. 범부중생의 시선은 아랑곳 하지 않고 나병 여인과 같은 방에서 지내며 간호했던 일화를 말씀했다. 경허 선사는 모든 일체 경계에서 자유로운 선사라 했다. 그런 스승의 선풍이 덕숭산에 물들어 있고 한국불교의 선맥을 지탱하고 있다고 설정 스님은 강조했다.

 

 

▲덕숭산 정혜사 능인선원 기둥에 걸린 ‘묵언’과 목탁.

 


경허 선사와 수월, 혜월, 만공 스님은 길 없는 길에서 길을 찾았다. 쉬이 덕숭산에서 내려오기가 힘들었다. 정혜사 능인선원에 ‘묵언’과 목탁이 걸렸다. 이 또한 무슨 물건일까. 말길이 끊어진 곳에, 목탁소리 들리지 않아도 되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일까.


‘묵언’에서 말이 빚는 수많은 업들을 지우고, 목탁에서 두 눈 부릅뜨고 항상 스스로를 점검하라는 선사들의 일갈을 듣는다. 

 

최호승 기자 time@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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