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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작자미상, ‘정묘조왕세자책례계병’

기자명 법보신문

온갖 신선 찾아와 왕세자 책봉 축하하다

 

▲필자미상,‘정묘조왕세자책례계병’, 8첩병풍 중 6폭, 1800년, 비단에 색, 112.6×237cm,국립중앙박물관

 


서왕모가 초대장을 보냈다. 곤륜산 요지에서 열리는 연회에 참석하라는 초대장이었다. 곤륜산이라니. 여기서 거기까지 거리가 얼마인가. 슬그머니 귀찮은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 가지 뭐. 초대장을 버리려는데 참석인사 명단이 보였다. 석가모니와 사천왕,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수성노인과 항아, 노자와 산신할아버지, 여동빈과 장지화, 주국구와 한상자...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곧바로 여행 가방을 꾸렸다. 곤륜산에 도착하기까지 석 달 열흘이 걸렸다. 서왕모의 처소 옆에는 듣던 바대로 신선들이 사는 연못인 요지가 있었다. 소나무 밑으로 난 길을 걸어 옥으로 된 9층 누대에 올랐다. 출렁이는 연못 위로 수많은 신선들이 오는 모습이 보였다. 말로만 듣던 신선들이 실제로 있었다.


벌써 연회가 시작된 듯 서왕모의 처소에서 풍악 소리가 흘러나왔다. 제비가 둥지에서 날아오르는 소리. 댓잎 사이로 이슬비가 스며드는 소리. 가을밤에 풀벌레가 속삭이는 소리. 장끼가 눈밭에서 푸드득거리는 소리 가운데 바람과 구름과 폭포와 파도가 어우러져 천지를 뒤흔드는  소리가 섞여 있었다. 이곳이 사람 사는 세상인가. 신선이 사는 세상인가. 꽃향기, 여인의 향기, 음악의 향기에 취해 눈을 감고 있으려니 서왕모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날씨는 따뜻하고 바람은 부드러워 봄날은 더욱 느린 태평시절. 우리는 봉래섬에서 용모 가다듬고 내려와 섬돌에서 축하드리옵니다. 다행히 관등절 만나니 참으로 좋은 연회, 제왕의 위엄에 접근하게 됨을 기뻐하옵거니와 신선의 수명은 한 없이 긴 것이오니, 임금님께 천만년의 장수를 바치나이다.”


아. 여기는 곤륜산이 아니라 창경궁 집복헌이었다. 정조 24년(1800) 경신(庚申)년 2월 초 2일 을유(乙酉)일. 조선 23대 왕이 될 순조(純祖:1790-1834) 임금의 왕세자 책봉식 날이었다.

 

순조, 11살의 나이로 관례와 책봉례를 치르다


순조는 정조의 둘째아들이다. 첫째아들 문효세자(1782-1786)는 두 살 때 왕세자로 책봉되었지만 다섯 살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문효세자가 죽고 나서 4년 후에 순조가 태어났다. 정조는 원자가 11살이 되기를 기다려 왕세자로 책봉했다. 책봉례(冊封禮)는 관례(冠禮:성인식)와 가례(嘉禮:결혼식)를 함께 거행하기로 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그 날의 상황이 생생하게 적혀 있다. 어렵게 얻은 세자에게 행여 또 무슨 일이 있을까 노심초사했던 정조는 왕세자가 건강하게 자라 책봉례를 마치자 축하교서를 통해 다음과 같이 감격을 토로했다.


“의젓한 천품에 총명과 효우(孝友)는 마음에서 우러났고, 날이 갈수록 온화하고 문아하여 용모와 태도가 법도에 맞았다. 봄에는 시를 익히고 겨울에는 예를 익히면서 스승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랐고, ‘논어’ ‘맹자’를 배우면서 스승이 깜짝 놀라는 질문을 했었다.”


이렇게 칭찬한 다음 관례와 책봉례를 행한 ‘경신(庚申)년이 공자가 탄생한 경년(庚年)’과 같아 매우 상서로운 날이라고 강조하고 ‘세자도 그 빛을 받아 빛을 낼 것’이라고 축원했다. 또한  ‘뭇백성들은 머리를 들어 우러렀고 예복 차림으로 계단에 오르니 일곱 가지 수놓은 옷이 눈부셨다’고 흐뭇해하면서 ‘쟁그랑거리는 패옥 소리는 저절로 절도에 맞고 축하의 술잔들은 일렁이는 파도가 연상되었다’고 흡족해했다. 그리고 ‘장구하기를 바라는 선왕의 가르침을 따라 성대한 의식을 하루에 다 거행’하였으니 ‘하늘의 두터운 사랑을 받아 미래는 만년을 두고 영원하리라’는 축복도 아끼지 않았다. 정조는 건강 때문인 지 책봉례에 참석하지 못했다. 정조의 마음을 대신 읊은 이 글은 대제학 홍양호(洪良浩)가 지었다.


 ‘정묘조왕세자책례계병(正廟朝王世子冊禮契屛)’은 선전관청(宣傳官廳) 관원들이 왕세자 책봉식에 참석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한 병풍이다. 우의정 이시수(李時秀)는 ‘국가에 큰 경사가 있어 가까이 신하들이 그 일을 그리고 왼쪽에 이름을 쓰니, 후인들이 고사를 보게 하려는 것’이라고 병풍 제작의 의의를 적어 놓았다. 1폭에는 이시수의 서문을, 2폭에서 7폭까지는 그림을, 8폭에는 병풍제작에 참석한 사람들의 품계와 이름을 적었다. 똑같은 내용의 그림이 서울역사박물관에도 소장되어 있는데 3폭이 결여되어 있다. 같은 그림이 여러 벌 전해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카메라가 없던 시절이라 행사에 참석한 사람 수만큼의 그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2폭-4폭은 누대에서 펼쳐지는 연회가 주제

 

 

왕세자 책봉식을 서왕모가 축하하다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히 왕세자의 책례를 기념하기 위한 그림인데 행사장면 대신 서왕모가 곤륜산에서 연회를 베푸는 요지연도(瑤池宴圖)가 그려졌다. 왜 그랬을까. 먼저 그림을 살펴보자. 서문과 좌목을 뺀 그림 여섯 폭은 크게 두 개의 주제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주제는 2폭에서 4폭까지 전개되는데 연회가 열리는 누대가 중심이다. 두 번째 주제는 5폭에서 7폭까지 펼쳐지는데 바다(혹은 요지)를 건너는 신선들이 중심이다.


첫 번째 주제의 연회 장소에는 남녀 주인공이 시종들에 둘러싸여 앉아 있다. 여주인공은 곤륜산의 주인이자 여선(女仙)의 우두머리인 서왕모다. 서왕모 주변에 특히 여선들이 많은 것이 그 사실을 말해준다. 곤륜산(崑崙山)은 중국 전설에 나오는 신성한 산이다. 그림의 내용이 현실이 아니라는 뜻이다. 남주인공은 주(周:B.C 약1050년- B.C 약771년)나라 목왕(穆王)이다. 그는 여덟마리의 말을 타고 서쪽을 순행하던 중 서왕모의 처소를 방문했다고 한다.  2폭 하단에 그가 타고 온 말과 수행원들이 보인다. 역시 신화 속의 이야기다. 서왕모와 목왕 앞에 놓인 그릇에는 장수를 상징하는 복숭아와 불로초 등의 과일과 음식이 가득하다.


그들 앞에서 두 명의 무희가 춤추고 있고 봉황도 함께 춤춘다. 여선과 동자들이 비파와 생황, 딱따기, 피리, 장고, 편종을 치면서 흥을 돋운다. 조선의 요지연도에는 춤과 음악이 빠지지 않는다. 궁중에서 책례나 가례 등의 행사 때 ‘헌선도(獻仙桃)’, ‘오양선(五羊仙)’, ‘포구락(抛毬樂)’, ’수연장(壽延長)‘등이 춤과 함께 공연되었다. 그 중 서왕모가 하강하여 선도복숭아를 바친다는 ‘헌선도(獻仙桃)’는 궁중의 연회를 마치를 마치 서왕모의 연회같은 높은 경지로 끌어올리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그들 앞에는 3천년 만에 한 번 꽃이 피고 3천년 만에 열린다는 선도복숭아가 열려 있다. 동방삭이 서왕모의 정원에서 선도복숭아를 훔쳐 먹어 삼천갑자를 살았다는 전설은 아주 유명하다. 이 밖에도 연회장은 상서로운 나무와 기물이 가득하다. 소나무와 오동나무, 학과 사슴, 태호석과 구름 등은 ‘백동자도’와 ‘곽분양행락도’에서 살펴봤던 상징물이다. 상서로움을 상징하는 이런 기물들은 ‘십장생도’, ‘일월오봉도’, ‘해학반도도’등의 궁궐회화에서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5폭-7폭은 해상군선이 주제

 

 

연회장명을 그린 첫 번째 주제는, 누각에 서서 바다(요지)를 바라보고 있는 네 명의 여선들 시선을 따라 두 번째 주제로 연결된다. 이들 해상군선(海上群仙)은 18세기 이후 요지연을 그린 ‘신선도’에서 자주 그려졌다. 해상군선은 흔히 세 부류로 구분되어 그려졌다.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불보살과 사천왕, 파도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신선들 그리고 육로를 이용해서 오는 신들이다. 이밖에도 하늘에는 학을 타거나 사슴을 동반한 선인들과 산화공양(散華供養)하는 선녀들의 모습도 보인다.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늘에는 석가여래가 사천왕의 호위를 받으며 하강하고 그 아래에는 사자를 탄 문수보살과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의 행렬이 구름 속에 그려져 있다. 민간신앙으로 변질된 불보살의 모습이다. 바다에는 딱따기를 든 조국구, 피리를 든 한상자, 나무뿌리를 타고 앉은 장지화, 물고기를 탄 금고 등 여러 신선이 제각기 개성적인 모습으로 서 있다. 육로에는 도깨비를 잡은 신선 여동빈이 앞장 선 가운데 도교의 시조 태상노군으로 추앙받는 노자(老子)가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오는 중이고 호랑이를 탄 산신할아버지가 뒤를 따른다.


‘정묘조왕세자책례계병’을 살펴보면 특정한 종교나 철학에 얽매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유교적인 예식 속에 불교적 요소와 도교적 요소를 가미했다. 왕세자가 책봉되는 상서로운 날을 서왕모의 연회에 비교해서 만든 이 작품은 왕세자의 앞길이 태평성대가 될 것임을 예고한다. 많은 신선들이 찾아와 축수를 해주는 만큼 왕세자가 장수하기를 기원하는 그림이다. 


그런 축복을 받고 왕세자가 된 순조는 행복했을까. 원래 왕세자는 책봉식과 더불어 삼례를 함께 치르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책봉식 후 넉 달 만에 아버지 정조가 승하하시는 바람에 가례는 그 다음 해로 연기됐다. 대신 순조는 11세의 어린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왕이 어린 관계로 영조의 계비(繼妃)인 대왕대비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수렴청정을 했다. 다음 해에 순조는 12세에 김조순(金祖淳)의 딸 순원왕후(純元王后)와 혼례를 올리고 1804년부터 친정을 시작했으나 권력의 핵심은 장인 김조순을 비롯한 안동 김씨 일문이 장악했다.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로 과거제도가 문란해지고 부정부패가 만연했으며 탐관오리의 수탈이 극에 달했다. 삼정이 문란해지자 전국 각지에서 농민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순조는 외척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풍양조씨(豊壤趙氏) 집안에서 세자빈을 들였다. 그러나 1830년 효명세자(孝明世子)가 젊은 나이에 죽으면서 안동김씨에 대한 견제는 실패로 끝났다. 결국 세자가 죽은 지 4년 뒤인 1834년에 순조도 세상을 떠났다. 왕의 나이 45세였다. 임금님께 천만년의 장수를 바친다는 서왕모의 장담에도 불구하고 순조는 그리 길게 살지 못했다. 그다지 행복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싯다르타 태자의 풍족한 어린 시절


싯다르타 태자는 일곱 살 경에 학교에 들어갔다. 당시 인도의 관습에 의하면 브라만 계급의 아이들은 여덟 살 때부터, 크샤트리아 계급은 열한 살 때부터, 바이샤 계급은 열두 살 때부터 학교에 입학해 12년 동안 수업을 받았다. 싯다르타 태자는 크샤트리아 계급이었지만 워낙 총명해서 이른 나이에 입학했다. 그는 학교에서 인도 고전인 ‘베다’를 비롯하여 언어학, 고전 문학 등의 인문 과학과 활쏘기를 배웠다. 말 타기, 코끼리타기, 전차몰기, 군대 배치법 등 귀족 계급이 배워야 하는 네 가지 기예도 배웠다.


태자는 젊은 시절을 유복하고 풍요롭게 보냈다. 싯타르타가 만년에 과거의 자신을 회상하며 들려준 이야기가 ‘중아함경’에 남아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그가 얼마나 물질적으로 호화롭게 생활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내가 부왕 슛도다나 집에 있을 때는 나를 위해 여러 가지 궁전, 곧 봄 궁전과 여름 궁전 및 겨울 궁전을 지었으니, 나를 잘 노닐게 하기 위해서였다. 궁전에서 멀지 않은 곳에 다시 푸른 연꽃 연못, 붉은 연꽃 연못, 빨간 연꽃 연못, 흰 연꽃 연못 등 여러 가지 연꽃 연못을 만들고, 그 연꽃 가운데는 온갖 물꽃, 곧 푸른 연꽃, 붉은 연꽃, 빨간 연꽃, 흰 연꽃을 심어서 언제나 물이 있고 언제나 꽃이 있었으며, 사람을 시켜 수호하여 일체 통행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나를 잘 노닐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네 사람을 시켜 나를 목욕시키고는 붉은 전단향을 내 몸에 바르고 새 비단옷을 입혔으니, 위아래 안팎 겉과 속이 다 새 것이었다. 밤낮으로 언제나 일산을 내게 씌웠으니, 밤에는 내가 이슬에 젖지 않고 낮에는 볕에 그을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여름 4개월 동안은 정전 위에 올라가 있었는데, 남자는 없고 오직 기생만 있어서 스스로 즐기면서 애당초 내려오지 않았다. 내가 동산으로 나가려고 할 때는 삼 십 명의 제일 훌륭한 기병을 뽑아 의장이 앞뒤에서 시종하고 인도하게 하였으니, 그 나머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싯타르타 태자는 조선의 왕세자도 누려보지 못한 호사를 다 누렸다. 싯타르타 태자만큼은 아니었지만 관례와 책례를 통해 왕세자로 책봉된 순조는 매순간 존귀한 사람임을 확인하며 살았다. 반면 나의 어린 시절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성인식이 뭔지도 몰랐다. 나의 존재가 귀하다고 말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냥 태어났으니 살았다. 외식은커녕 세 끼 밥 먹는 것조차 버거운 살림에 학교에 다닐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당시에는 대다수가 그렇게 살았다. 부족하면 포기하고 결핍을 안고 살아야했다.


그런데 나는 나를 포기할 수 없었다. 집안형편이 어렵다고 불평불만은 할 수 있지만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일찍 깨달았다. 아무도 나를 챙겨주지 않으니 나 스스로가 나를 챙겨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를 가난하게 키우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나를 부잣집 친구들처럼 귀하고 부족함이 없는 사람으로 자라게 하고 싶었다. 나를 잘 키워야한다는 생각이 거의 강박관념처럼 어린 나를 조급하게 했다. 나를 귀하게 키우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목록을 적었다. 그래서 나온 항목이 두 가지였다. 내가 좋아하는 것과 나를 귀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것이었다.


우선 책을 읽기로 했다. 책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면서 나를 귀하게 만들어 줄 항목이었다. 맛있는 음식은 나중에 돈 벌면 먹어도 되고, 멋진 옷은 커서 입어도 되지만 열 살 때 읽어야 할 책을 열 살 때 읽지 않으면 왠지 열 살 때의 인생의 마디가 부실해질 것 같았다. 책 살 돈이 없으니 시립도서관에 가서 살다시피 했다. 중학교에 올라가서는 책을 찾아 멀리 갈 필요도 없었다. 학교 내에 도서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서관 책이 전부 내 책 같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다니던 도서관을 40년이 지난 지금도 다니고 있다.


책 다음으로는 클래식 음악을 듣기로 했다. 클래식은 내가 좋아하지는 않지만 꼭 들어야 내가 귀해질 것 같았다. 음악은 들어야하는데 집에는 전축이 없었다. 대신 라디오가 있었다.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진행하는 클래식라디오를 필사적으로 앉아서 들었다. 처음에는 받아쓰기조차 어렵던 작곡가들의 이름이 1년쯤 지나자 전주곡만 들어도 누구 작품인지 아는 체 할 수준이 되었다. 중학교 때 라디오에서 듣던 클래식을 지금은 금난새와 함께하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가서 듣는다. 연극공연에도 열심히 쫓아 다녔다. 비록 시골 동네의 작은 시민회관에 올려진 초라한 연극이었지만 그 때 받은 감동은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뜻도 모르면서 ‘햄릿’과 ‘고도를 기다리며’를 감상했다. 이렇게 적고 보니 비록 왕세자가 나보다 조금 더 귀여움을 받고 자랐지만 나 또한 왕세자 못지않게 귀하게 자란 것 같다.

 

문제는 누가 더 귀하게 자랐느냐 하는 것이 아니다. 왕세자나 싯타르타나 모두 나보다 복이 많은 사람들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니 풍족한 집안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조정육

권력과 부를 모두 가졌으니 어찌 나 같은 사람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근본을 따지고 보면 그들과 나의 조건에는 별 차이가 없다. 단지 나보다 조금 더 풍요로운 환경에서 살았을 뿐이다. 양은 냄비에 밥을 비벼 먹든 은수저로 타락죽을 떠먹든 왕세자나 나나 생로병사를 겪어야 하는 인간으로써의 조건은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홍역을 앓고 주름살이 생기고 땅에 묻혀야 하는 인간조건에는 한 치도 차이가 없다. 이런 고뇌 속에 싯타르타 태자의 출가일이 임박했다.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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