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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작자미상, ‘동가반차도’

기자명 법보신문

한 생애가 또 다른 생애로 흘러 들어 큰 강물을 이루다

붓다에 관한 많은 경전에는 태자 싯다르타가 열일곱 살 때 결혼했다고 전한다. 싯다르타에게는 세 명의 태자비가 있었다. 첫 번째 왕비는 야소다라, 둘째 왕비는 마노다라(혹은 마노라타), 셋째 왕비는 고타미(혹은 고파, 고피)였다. 태자와 가장 먼저 결혼한 여인은 고타미였다. 고타미는 석가족 부호의 딸이었는데 매우 아름다웠다. 싯다르타와 결혼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 둘째 왕비 야소다라 역시 석가족 출신으로 매우 자존심이 강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선각왕이었고, 싯다르타와의 사이에 라훌라를 낳았다. 그 때문인 지 비록 혼인은 고타미보다 늦게 했지만 첫째 왕비가 되었다. 셋째 왕비 마노다라 역시 석가족 출신이었다. 그녀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세 왕비는 때로 각각 다른 사람으로 구분되지 않고 한 사람인 것처럼 묘사될 때가 많다. 위대한 분이 왕비가 세 명이었다는 것이 전기 작가들에게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고대에 한 나라의 왕이 여러 명의 왕비를 받아들이는 것은 관례였다. 싯다르타가 결혼한 후 세 개의 궁전에서 머물렀다는 이야기도 세 명의 왕비의 처소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세 개의 궁전은 태자의 안전을 위해 처소를 옮기기 위한 용도였다는 해석도 전한다.

 

물론 ‘중아함경’에 전하는 붓다의 육성처럼 세 채의 궁전이 아버지 슛도다나가 지어준 궁전일 수도 있다. 슛도다나는 과거에 아시타 선인이 예언한 것처럼 태자가 출가할 마음을 낼까 두려워 세속적인 쾌락에 젖어 살도록 했다. 슛도다나는 태자가 장차 전륜성왕이 되기를 원했다. 슛도다나의 의도는 싯다르타의 결혼과 손자 라훌라의 탄생으로 잘 실현되는 듯 보였다. 슛도다나의 예상대로 진행됐더라면 오늘날 우리는 붓다의 가르침을 받을 수 없었으리라. 그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우선 싯다르타의 혼례식을 상상해볼 수 있는 반차도를 감상해보자.

 

 

▲작자미상, ‘동가반차도’(부분), 19세기 후반, 비단에 색, 31.0×996.0cm, 삼성리움미술관

 

 

왕과 왕비의 혼례식을 그린 가례반차도


농사는 ‘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다.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가장 근본이 되는 일이라는 뜻이다. 혼례는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다.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중요한 ‘대사’를 치르는데 형식과 의례가 빠질 수 없다. 왕실에서 치루는 혼례식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조선시대의 국가 의례는 다섯 가지로 분류된다. 이를 ‘오례’(五禮)라 한다. 영조(1744)때 수정증보된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에 따르면 오례는 다음과 같다. 길례(吉禮:대사, 중사, 소사 등의 각종 제사), 가례(嘉禮:즉위, 책봉, 관례, 국혼, 진연 등의 경축), 빈례(賓禮:외국 사신 접대), 군례(軍禮:군사훈련, 활쏘기 등의 군사), 흉례(凶禮:국상, 국장 같은 상장례) 등이다. 혼례는 가례에 속한다. 경사스럽고 아름다운 예식이다. 축하할만한 기쁜 예식인 만큼 선택도 신중하고 과정도 복잡하다.


왕실에서 왕비나 왕세자빈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간택’(揀擇)과 ‘육례’(六禮)를 거쳤다. 간택은 왕비가 될 규수를 선택하는 절차다. 왕자의 혼례식이 결정되면 전국에 금혼령을 내려 모든 처녀들의 혼인을 금한 후 처녀 단자를 올리게 했다. 이때 종친의 딸, 이씨의 딸, 과부의 딸, 첩의 딸 등은 처녀 단자를 올리지 않아도 됐다. 종친과 이씨 딸을 열외로 하는 것은 집안 친척이니까 그렇다 쳐도 과부와 첩의 딸을 제외했다는 것은 조선 사회에서 신분이 매우 중요했음을 말해준다.


네 가지 조건에서 벗어난 처녀라면 누구나 왕비 후보자로 간택될 수 있었을까. 표면적으로 보면 가난한 서민의 여식도 누구나 왕비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간택을 받을 수 있는 후보는 ‘어느 집 가문의 여식’이라고 내정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근본 없는 집안의 천덕꾸러기가 백마 타고 오는 왕자님의 선택을 받는 ‘신데렐라의 꿈’은 조선에서는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었다. 답답하고 강고한 사회였다.


간택은 3차에 걸쳐 이루어졌다. 1차에서는 6-10명이, 2차에서는 3명이, 마지막으로 3차에서 선택된 1명이 왕비로 뽑혔다. ‘삼간택’에서 뽑힌 처녀는 자신이 살던 집을 떠나 별궁으로 모셔졌다. 이때부터 규수는 비빈(妃嬪)이나 입는 대례복(大禮服)을 입었다. 혼례식만 올리지 않았을 뿐 이미 왕비나 다름없었다. 예비 왕비는 별궁에서 대략 석 달 정도 머물렀다. 별궁으로 옮기게 한 이유는 본격적으로 ‘왕비 수업’을 받게 하기 위한 목적과 ‘사돈’이 짊어져야 할 부담을 덜어주려는 배려에서였다. 왕실과 사돈 맺은 집안이 아무리 부자라 한들 왕실 눈높이에 맞춰 예단을 준비하려면 얼마나 등골이 휘겠는가. 그 부담을 전부 없애줌으로써 훌륭한 딸을 길러주는 것에 대한 보답을 한 셈이다. 때로 간택된 규수의 본가를 별궁 근처로 옮겨주기도 했다. 낯선 궁궐에 홀로 떨어져 있을 딸에게 친정 엄마만큼 든든한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사돈과 새아기에 대한 왕실의 배려가 꼼꼼했음을 알 수 있다. 서로 죽고 못살 정도로 사랑하는 자식들을 결혼시키면서 예단 때문에 인생 초반부터 쌈 붙이는 우리 시대 ‘어른들’은 조선 왕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본받아야 할 것이다. 조선 시대가 결코 꽉 막힌 고루한 사회는 아니었다.  

 

 

▲ ‘동가반차도’(부분):왼쪽에 말탄 무사가 태극기를 들고 있다.

 

 

간택이 끝나면 본격적인 결혼식 모드로 전환된다. 그것이 ‘육례’다. 육례 중 첫 번째는 납채례(納采禮)다. 왕비로 간택된 규수 집에 혼인의 징표로 교명문과 기러기를 보내는 의식이다. 두 번째는 납징례(納徵禮)다. 교명문과 함께 예물을 보내는 의식이다. 세 번째는 고기례(告期禮)다. 혼인 날짜를 알리는 의식이다. 네 번째는 책비례(冊妃禮)다. 왕비로 책봉하는 의식이다. 이때까지 삼간택된 규수는 별궁에서 왕비 수업을 받고 있기 때문에 책비례도 별궁에서 행한다. 책봉식에는 교명문과 도장, 옷을 보냈다.


이렇게 책봉식도 끝났으니 왕이 왕비를 모셔오는 일만 남았다. 진짜 혼례식을 치르는 의식이다. 그것이 다섯 번째 친영례(親迎禮)다. 왕은 왕비가 있는 별궁으로 직접 모시러 간다. 간택과 육례는 모두 다 중요하지만 삼간택과 친영례는 특히 중요해서 아주 길하고 좋은 날을 선택한다. 이제 왕비를 모셔왔으니 마지막 순서가 남았다. 침전에서 첫날밤을 치르는 동뢰연(同牢宴)이다. 동뢰연은 왕비의 처소에서 치른다.


왕비의 침전인 경복궁의 교태전(交泰殿), 창덕궁의 대조전(大造殿), 창경궁의 통명전(通明殿)에는 용마루가 없다. 왕이 곧 ‘용’(龍)이기 때문에 용 위에 용을 둘 수 없음이다. 왕의 얼굴은 용안(龍顔), 왕의 옷은 용포(龍袍), 왕의 의좌는 용상(龍床)이라 한다. 경복궁 ‘교태전(交泰殿)’은 주역(周易)의 64괘 중 태(泰)괘에서 따왔다. ‘천지교태(天地交泰)’처럼 하늘과 땅이 서로 화합하듯 자손을 많이 낳으라는 뜻이다. 창덕궁의 ‘대조전’(大造殿)은 큰 물건을 만드는 장소다. 다음 보위를 물려받을 세자가 큰 물건이다. 창경궁의 ‘통명전(通明殿)’은 ‘통달하여 밝다’는 뜻으로 대명궁(大明宮)이라 칭하기도 한다. ‘옥황상제의 궁전’이란 의미와 ‘신선의 전각’이란 뜻도 담겨 있다. 모두 좋은 의미다. 왕과 왕비는 옥황상제의 궁전 같은 신성한 장소에서 하늘과 땅이 화합하듯 첫날밤을 보낸다. 왕비가 비로소 제 자리를 찾았다. 


‘동가반차도(動駕班次圖)’는 왕이 궁궐 밖으로 나간 행차를 그린 그림이다. 가례 장면은 아니지만 왕이 별궁에 있는 왕비를 모셔오는 행차 장면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다. 가례반차도는 흔히 친영례를 그린다. 육례 중 납채례부터 책비례가 혼례식의 준비과정이라면 진짜 혼례식은 친영례다. 육례의 규모면에서 친영례가 최고였다. ‘동가반차도’가 구체적으로 어떤 목적으로 그려졌는지는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시위하는 인원과 가마, 군병 등의 어가 행렬이 무려 996cm에 이르는데 인물과 대상을 그리는 필치와 색채가 정교하고 예술성이 높다.
현재 전해지는 가례도감의궤는 1627년 ‘소현세자가례도감의궤’부터 1906년에 기록된 ‘순종비가례도감의궤’까지 약 280년 동안 20건의 기록(29책)이 전한다. 그런데도 굳이 다른 모든 가례도감의궤를 제치고 ‘동가반차도’를 선택한 것은 그만큼 작품성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동가반차도’의 제작 시기는 신식 군복을 입은 별기군과 태극기가 등장한 것, 명성황후의 가마가 그려진 점을 들어 1883년 이후 1895년 이전으로 추정한다. 나라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으로 치닫는 상황에서도 왕실의 행사 장면을 그린 화원의 필치는 반듯하게 살아 있다. 그나마 다행이다.

 

 

▲ 반차도는 왕의 행차 장면을 상세하게 그려 당시 상황을 눈앞에서 펼쳐지듯 재현했다.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의 파란만장한 혼례이야기


그렇다면 실제로 가례는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정묘조왕세자책례계병’으로 친근한 순조의 예를 들어 살펴보자. 순조는 1800년에 11세의 나이로 왕세자로 책봉된 후 그 해에 가례를 올릴 예정이었다. 예정에 따라 1800년 1월 1일에 13·12·11세 된 처녀들의 금혼령이 내렸다. 2월 2일 왕세자책봉식이 끝난 후 2월 26일에 세자빈의 첫 번째 간택이 행해졌다. 첫 번째 간택에서는 후보 5명이 낙점됐다. 정조는 ‘김조순의 딸, 서기수의 딸, 박종만의 딸, 신집의 딸, 윤수만의 딸만 두번째 간택에 들게 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허혼(許婚)’하도록 명했다.


후보자는 5명이었지만 정조는 이미 김조순의 딸을 내정한 상태였다. ‘조선왕조실록’ 정조 24년(1800)에는 곳곳에 정조의 유시(諭示)가 적혀 있다. 정조는 ‘두번째 세번째 간택을 한다지만, 그것은 겉으로 갖추는 형식일 뿐’이라면서 ‘첫번째 간택이 옛날로 치면 바로 두번째 간택’이라고 말씀하셨다. 정조는 대비와 중전이 간택된 김조순의 딸을 보고 ‘특별히 그를 가리키면서 저게 뉘집 처자냐고 물으시고 이어 앞으로 오게 하여 한 번 보시고는 상하 모두가 진심으로 좋아하면서, 그런 처자는 처음 보았다고들 하였다’고 흡족해 했다.


정조는 대신들에게 ‘어제 간택 장소에 그 집 처자가 들어왔을 때 얼굴단장 몸단장 등 각종 범절을 수수하게 꾸몄는데도 얼굴에 복이 가득해 보이고 여러 사람 속에서 매우 뛰어나 그야말로 닭 무리 속에 서있는 한 마리의 학(鶴)’이었다고 전하면서 ‘궁중 사람들도 그가 처음 왔을 때 그가 누구인지 전혀 모르면서도 너도나도 관심을 기울였다’고 했다. 덧붙여 이런 참한 규수가 간택된 것은 ‘황천과 조종이 주신 것으로 종묘 사직을 위해 막대한 경사가 아닐 수 없다’고 했다.


두 번째 간택은 윤 4월 9일에 이루어졌다. 이번에는 ‘김조순의 딸, 박종만의 딸, 신집의 딸’로 구색을 맞추었다. 간택된 집에는 대궐에서 육인교(六人轎)를 만들어 본가로 보내주고 수행원과 경호원을 보냈다. 정조는 김조순에게 친서를 보내 김조순의 딸이 ‘별궁과 다름이 없으니 지친간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들어가 보아서는 안 되며 관직을 가진 자가 어떤 사정이 있어 집에 찾아올 때는 공복을 갖추고 대문 밖에서 말을 내리도록 하라’로 명했다. 이 정도로 정조의 마음이 확고했으니 김조순의 딸이 세 번째 간택을 받는 것은 정해진 사실이었다. 정조는 세 번째 간택은 가을이나 겨울에 잡게 하고 가례를 12월에 거행하라 명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했다. 6월 28일에 정조가 승하하신 것이다. 7월 4일에 순조가 11살 어린 나이로 창덕궁 인정전에서 즉위했다. 왕이 나이가 어려 영조의 계비인 대왕대비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수렴청정을 했다. 정순왕후와 정조는 평소에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정순왕후는 어떻게든지 정조의 선택을 번복시키려 했다. 세 번째 간택에 대한 결정은 기약 없이 미뤄졌다.


세 번째 간택에 대한 논의가 이뤄진 것은 순조 2년 임술(1802년) 8월 10일이었다. 김조순을 중심으로 한 노론(老論) 시파(時派)가 정순왕후를 중심으로 한 벽파(僻派)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이다. 두 번째 간택이 결정된 지 2년 4개월만이었다. 그동안 어린 소녀가 겪어야 했을 마음의 고통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세 번째 간택에 대한 논의가 급물살을 탔다. 삼간택의 길일이 9월 6일로 잡혔다. 최종 간택된 김조순의 딸은 ‘어의궁 별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9월 18일에 인정전에 나아가 납채례를 행하였다. 9월 20일에 인정전에서 납징례를 행하였다. 10월 3일에 인정전에서 고기례를 행하였다. 10월 13일에 인정전에서 책비례를 행하였다. 10월 13일에 어의동 별궁에서 친영례를 행하였다. 10월 16일에 대조전에서 동뢰연을 행하였다. 대혼(大婚)이 이루어졌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긴 여정이 마침내 끝이 났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는 순조와 순원왕후의 혼례 장면을 그린 ‘가례도감의궤’가 소장되어 있다.

 

 

▲필자의 혼례식.

 

 

작은 혼례식


스물 네 해 전 시월, 햇살이 탐스럽게 익어가던 날에 연지 찍고 곤지 찍은 신부가 초례청 앞에 섰다. 한 생애가 또 다른 생애로 흘러들어가는 순간이었다. 시부모님은 조선 왕실의 혼례 절차를 공부한 분들이 아니셨지만 가난한 집 여식을 받아들이면서 어떤 예단도 요구하지 않았다. 충청도 양반다운 성품이었다. 인품은 가방끈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배려에서 나온다는 것을 시부모님한테 배웠다. 그 너그러움이 감사해 나는 지금까지 쪼들리는 살림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부모님한테 심할 정도로 과하게 용돈을 드린다. 훌륭한 가르침이 훌륭한 전통을 만든다. 나 또한 두 아들을 장가보낼 때 우리 시부모님처럼 할 것이다.


그 가르침이 훌륭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많은 시간이 지나서였다. ‘너 없이는 못살아’하던 고백이 ‘너 때문에 못살아’로 바뀐 것은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직후부터였다. 남편과 나는 인생의 굽이굽이에서 사사건건 다퉜다. 아이 때문에 다투고, 돈 때문에 다투고, 서로 다른 습관 때문에 다퉜다. 같은 길을 걸어가면서도 서로 고개를 돌렸다. 다른 방향을 쳐다보면서 ‘헤어져야지, 헤어져야지’를 습관처럼 읊조렸다. 순원왕후 정도는 아닐지라도 나도 참 파란만장하게 살았다.


그로부터 24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다시 ‘너 없이는 못살아’로 되돌아왔다. 원점이다. 그래서 다시 신혼이다. 신혼은 신혼이되 어설픈 자존심 내세워 상대를 피곤하게 하던 젊은 날의 신혼과는 차원이 다르다. 너의 아픔이 나의 아픔보다 더 크고, 너를 아프게 한 것이 내가 아픈 것보다 더 아프다. 그래서 내가 아픈 것조차 함께 사는 사람에게 미안하다. 한 생애가 또 다른 생애와 만나 큰 강을 이룬 셈이다.


혼인(婚姻)의 사전적인 의미는 ‘남자와 여자가 예를 갖추어 부부가 됨’과 ‘부부의 연을 맺는 것’이란 두 가지 뜻이 담겨 있다. 부부의 연을 맺기 위해서는 예를 갖추어야 한다. 예(禮)란 ‘인(仁)’한 것이라고 공자(孔子)는 말한다. ‘인(仁)’은 사람(亻)과 둘(二)이 결합해서 만들어진 한자다. 서로가 서로를 인자한 마음으로 대하는 것. 그것이 혼인이다.

 

▲조정육

혼인의 진정한 의미를 알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나도 20여년 걸렸다. 그 진리를 세월이 가르쳐 주었다. ‘육례’를 거치지 않아도, 정화수 한 그릇 떠 놓고 맞절 하는 것으로 새 인생을 시작해도 세월이 지나면 깨닫게 된다. ‘예’는 두 사람이 ‘인’한 마음으로 배려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결혼하기를 참 잘했다.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참고문헌
와타나베 쇼코, ‘불타 석가모니’,(문학의 숲:2010)
이성미, ‘가례도감의궤와 미술사’,(소와당:2008)
문화재청, ‘궁궐의 현판과 주련1-경복궁’,(수류산방:2007)
문화재청, ‘궁궐의 현판과 주련2-창덕궁, 창경궁’,(수류산방:2007)
‘조선시대 향연과 의례 잔치풍경’,(국립중앙박물관:2009)
‘조선화원대전’,(삼성미술관리움:2011)
한국고전종합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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