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산치스투파
13. 산치스투파
  • 법보신문
  • 승인 2013.05.08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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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다 이룬 사랑의 힘이 빚어낸 불교미술 최고의 걸작

아쇼카가 사랑한 여인 데비
‘부처님 곁 묻히고 싶다’ 유언
근본8탑 진신사리 모셔 조성
후대 증축하며 현재 규모로
지키지 못한 애틋한 사랑이
남방 전법 인연으로 이어져


부처님 생애 조각한 ‘토라나’
정교함·예술성 단연 최고봉

 

 

▲산치유적의 중심인 그레이트스투파는 아쇼카황제가 조성한 부처님 진신사리탑이다. 젊은 시절 사랑했던 여인 데비가 ‘부처님 곁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자 그녀의 고향에 탑을 세웠다는 전설이 흐른다.

 


무굴제국의 도시 아그라를 뒤로 하고  다시 야간기차에 몸을 실었다. 스라바스티 기원정사 순례를 마지막으로 부처님의 발자취를 찾는 불적순례는 사실상 끝났다. 도로사정을 감안, 예정돼 있던 상카시아 순례를 취소한 것이 못내 아쉽지만 부처님의 탄생부터 입멸까지, 그 순간의 감동이 서려있는 유적들과 함께 숨 쉬며 달려온 장엄한 여정이었다. 이제 남은 순례의 종반부는 인도 속에 꽃핀 찬란한 불교유산, 세계문화유산과의 만남이다.

 

일행은 럭나우에서 8시간을 달려 먼저 아그라에 도착했다. 인도가 자랑하는 세계문화유산. 무굴제국의 화려함과 샤자한 황제의 애틋한 사랑이 서려있는 타지마할, 그리고 웅장한 아그라성을 돌아보며 눈 호강과 여유로 하루를 보냈다. 무굴제국은 이슬람 국가였다. 타지마할이나 아그라성 역시 이슬람 양식으로 불교유적은 아니다. 하지만 아그라에서의 하루는 이번 순례의 쉼표가 되어 주었다. 숨 가쁘게 달려온 열흘간의 순례동안 온 몸 구석구석 눅진하게 들러붙었던 길가의 먼지와 피로를 아그라에서 말끔히 털어버렸다. 가벼워진 몸과 마음은 남은 일정에 대한 새로운 기대감으로 재충전했다.


다시 눈빛 초롱해진 일행을 보팔행 야간열차가 기다리고 있다. 바라나시에서 한 번 타본 경험 덕분인지 ‘탑승 작전’이라는 이름이 무색치 않을 만큼 혼란하기로 악명 높은 인도 열차에 80여 명에 달하는 일행 모두 무사히 몸을 실었다. 다만 밤12시 가까운 늦은 시간인 탓에 기차가 출발하기 무섭게 다들 침대칸에 자리를 잡고 눕는다. 얼마 못가 가벼운 숨소리만 간간히 흘러나온다. 그렇게 밤을 달려 아침7시 기차는 보팔역에 도착했다.


오늘의 목적지는 보팔에서 북동부로 46km 가량 떨어져 있는 산치다. 어제까지의 일정이 인도 북동부지역이었다면 오늘부터는 인도 중부 내륙에 해당한다. 역을 나서니 부쩍 올라간 기온이 후텁지근하다. 남쪽으로 내려왔음이 실감난다.


산치스투파로 불리는 이 유적군의 역사는 아쇼카황제가 기원전3세기 산치의 야트막한 언덕 위에 스투파를 세우며 시작됐다. 불교사에 있어 아쇼카의 존재는 굵직하다. 수많은 불교유적들이 그가 세운 석주에 의해 확인되었고 인도 전역 뿐 아니라 해외로의 전법도 그의 공적이다.


하지만 ‘법왕’이라는 찬탄을 받는 그가 불교에 귀의하게 된 과정은 그야말로 피의 역사였다. 거대한 인도 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황제’라는 역사의 평가는 그가 얼마나 많은 피를 뿌렸는지에 대한 다른 표현이다.


아쇼카의 부친 빈두사라왕에게는 무려 101명의 자식이 있었다. 아쇼카는 그 중에서도 가장 명민하고 야심 가득한 아들이었다. 왕이자 아버지의 권위를 넘볼 만큼 강력한 힘을 지닌 아들을 빈두사라왕은 좋아하지 않았다. 빈두사라왕은 아쇼카에게 반란 진압군의 총사령관을 맡겼다. “어떤 무기나 수레도 사용하지 말라”는 명령과 함께였다. 전장에서 죽어버리거나 반란에 가담하라는 말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아쇼카는 이 불가능해 보이는 임무를 기적처럼 완수하고 금의환향한다. 그런 아쇼카를 본 빈두사라왕은 갑자기 죽어버렸다. 죽으라고 보낸 아들이 살아 돌아온 화병이었는지 아니면 어떤 음모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북쪽 토라나의 원숭이 공양 부조상.
어쨌든 왕좌는 비었고 승기를 잡은 아쇼카는 무려 99명의 형제를 도륙했다. 왕자들을 따르던 신하와 궁녀들도 남김없이 처형했다. 그 피바다 속에서 이미 유복자가 된 막내 동생 단 한 명만이 살아남아 아쇼카의 칼을 피해 출가했다. 그렇게 왕좌에 오른 아쇼카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정복전쟁을 펼쳤고 마침내 인도 통일이라는 대업을 달성했다.


그러나 수십만의 생명이 그 과정에서 사라져갔다.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그 위에 제국이 우뚝 섰지만 고통과 회한이 아쇼카를 엄습했다. 그때 손을 내민 이가 있었다. 바로 유일하게 살아남아 출가했던 막내 동생이었다. 그의 제도로 아쇼카는 불교에 귀의했고 자신이 뿌린 피를 닦아내려는 듯 인도 전역에 법등을 밝혔다. 바위마다 ‘생명을 죽이지 말라’는 가르침을 새겼다. 그리고 부처님 입멸 후 사리를 봉안했던 열덟 개의 스투파 중 8번 스투파를 해체, 진신사리로 인도 전역에 8만여 기의 스투파를 세웠다. 산치스투파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산치스투파는 그 중에서도 특별하다. 아쇼카는 젊은 시절 비데샤 지방의 데비라는 여인을 사랑했다. 왕이 되기 전이었고 둘 사이에서는 남매가 태어났다. 그러나 아쇼카는 전장으로 떠나야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왕이 되었다. 수십 년이 흘렀고 젊은 시절 사랑했던 여인을 까맣게 있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쇼카가 데비에게 남겨주었던 신표를 들고 청년이 된 아들이 찾아왔다. 옛 사랑을 떠올린 아쇼카는 비데샤로 달려갔지만 이미 데비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부처님 곁에 묻히고 싶어했다’는 데비의 소원에 따라 그녀의 고향 비데샤에서 가까운 언덕 위에 진신사리를 봉안한 스투파를 조성했다. 그리고 다시 찾은 남매는 출가하여 남방으로 법등을 전했다. 바로 스리랑카에 최초로 불교를 전한 마힌다 스님과 보리수를 전한 상가미타 스님이었다. 산치스투파에는 ‘사랑의 탑’이라는 별칭이 있다. 이 탑이 인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탑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이유도 바로 이런 애틋한 전설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산치스투파가 조성 당시부터 지금과 같은 규모는 아니었다. 지금보다 훨씬 작은 스투파였으나 이후 스투파를 크게 증축하거나 새로운 스투파를 세워 지금과 같은 큰 규모의 유적군이 되었다.


말끔하게 정리된 잔디언덕 위에 넉넉히 둥근 모습으로 앉아있는 스투파를 바라보며 천천히 걸어 올라간다. 산치에는 모두 8개의 스투파가 있었으나 현재는 3개가 남아있다. 그 외에 40여 개가 넘는 승원과 석주, 탑문들이 산치 유적군 안에 흩어져있다.


그레이트스투파로 불리는 1번 대탑이 아쇼카왕이 데비를 위해 세운 진신사리탑이다. 아쇼카왕이 조성했던 원래의 스투파를 후대에 크게 확장해 지금은 높이 16m, 직경 37m에 달하는 규모가 되었다. 발우를 뒤집어 놓은 모양의 둥근 스투파 주변에 난간을 두르고 토라나라 불리는 4개의 석조 기둥 관문을 세웠다. 석조관문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과 생애가 아름답고 섬세한 부조로 조각돼 있다.


특히 가장 아름다운 토라나로 손꼽히는 북문에는 부처님께 꿀을 공양하는 원숭이, 스라바스티에서 부처님이 보이신 신변의 기적 등이 정교하고 조각돼 있다. 그 사이사이에는 코끼리와 요정 압살라, 망고나무 등이 표현돼 있다. 흥미로운 점은 부처님의 모습이 보리수나 발자국 등 상징적인 모습으로 표현돼 있다는 점이다. 예술에 문외한이라도 이 조각들이 불교미술사에 길이 남을 걸작임이 느껴진다. 동문에는 마야부인의 태몽, 태자의 출가, 열반 등 부처님의 생애가 펼쳐진다.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남문에는 등을 맞댄 사자 4마리가 석주를 받치고 있는 모습이 남아있는데 인도 지폐에도 등장할 만큼 인도를 대표하는 문양 가운데 하나다. 서문에서도 자타카에 등장하는 부처님 전생 이야기들을 찾아볼 수 있다. 하나하나의 조각들이 전해주는 부처님 이야기를 찾아 읽다보면 이 스투파를 조성하는데 얼마나 많은 정성과 신심이 모아졌는지 느껴진다.

 

 

▲ 사리푸트라와 마하목갈라나의 사리가 봉안돼 있던 3번 스투파.

 


그레이트스투파가 서있는 언덕 바로 아래에는 이보다 조금 작은 규모의 3번 스투파가 있다. 토라나는 하나뿐이지만 형식과 정교함은 그레이트스투파 못지않다. 이 스투파에는 부처님의 제자 사리푸트라와 마하목갈라나의 사리가 봉안돼 있었다고 한다. 영국 식민지배 시기에 사리를 꺼내 대영박물관에 전시하는 부침을 겪기도 했으나 독립 후인 1953년 반환되어 지금은 바로 옆 새로 지은 사원에 안치돼 있다.

 

 

▲그레이트스투파의 출입문 중 북쪽 토라나. 가장 아름다운 토라나로 손꼽힌다.

 


2번 스투파는 언덕 아래 조금 떨어진 곳에 있다. 규모는 좀 작고 토라노와 스투파 꼭데기를 장식한 산개 등이 없지만 스투파를 감싸고 있는 벽에 새겨져 있는 부조가 아름답다.


스투파들 사이 곳곳에 남아있는 승원이나 법당의 흔적은 대부분 터와 벽, 기둥 뿐이지만 이곳에 큰 규모의 사원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특히 그레이트스투파 뒤쪽으로는 부러진 아쇼카왕의 석주가 남아있어 이곳이 중요한 불교성지였음을 말해준다.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져 기약 없는 기다림 속에 생을 마감했던 여인 데비의 마지막 소원은 아쇼카와의 재회가 아니었다. 만남은 반드시 헤어짐을 낳고 헤어진 이들은 언젠가 다시 만난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녀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의 마지막 소원은 부처님 곁에 묻히는 것이었고 부처님의 가르침 안에서 아쇼카의 사랑은 수 천 년이 지나도록 그녀 곁에 머물고 있다. 또한 그들의 아들, 딸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다 건너 멀리까지 전하는 전법의 횃불이 되었다. 산치에는 부처님 가르침의 위대함이, 그리고 사랑의 아름다움이 따뜻한 햇살처럼 가득 고여 있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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