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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몽성산 용흥사

기자명 법보신문

조선의 중흥을 이끈 왕, 부처님 품에서 나다

백제시대 인도승 마라난타 창건
네 마리 용들이 앉은 보물 동종
왕 탄생 예견한 스님의 공양물
영조 생모 숙빈 최씨 전설 남아

 

 

▲환희는 사라졌다. 부처님오신날 하루 뒤, 연등은 사찰로 안내하는 이정표였다. 종적을 감춘 환희는 담양 몽성산에 초록빛 녹음으로 모습을 바꿨다. 이 땅에 자비와 지혜를 퍼뜨린 부처님을 찬탄했던 마음이 초록으로 영글어 몽성산을 초록으로 물들였다.

 


환희는 사라졌다. 부처님오신날 하루 뒤, 연등은 사찰로 안내하는 이정표였다. 종적을 감춘 환희는 담양 몽성산에 초록빛 녹음으로 모습을 바꿨다. 이 땅에 지혜와 자비를 퍼뜨린 부처님을 찬탄했던 마음이 초록으로 영글어 몽성산을 물들였다. 몽성산 자락, 용흥사(회주 진우 스님) 초입의 초목들은 여름 문턱에 서서 한껏 생명력을 뽐냈다. 천년 넘게 늘 그렇듯 땅 깊숙이 배인 물을 빨아들이고 뜨거워진 태양빛을 사이좋게 나눠가졌다. 시선 머무는 곳곳엔 하늘 향해 손 벌린 초록 이파리가 무성했다.


일주문 지나 돌계단 끝에 커다란 보호수가 섰다. 정확히 사천왕문 입구를 가로막았다. 나무줄기 옆으로 금강역사의 날카로운 눈빛이 번뜩인다. 말 없는 으름장이다. 일단 마음 매무새를 가다듬는다. 사천왕문은 용흥사에 들기 전 관문이었다. 천왕문 안으로 들어가자 양옆에 천왕들 눈빛이 심상치 않다. 무시무시함에 잡다한 생각이 모두 달아날 지경이다. 절 안으로 이어지는 문 밖에 어렴풋이 보이는 온화한 부처님 미소만 믿고 걸음을 내디뎠다.

 

 

▲사천왕문은 용흥사에 들기 전 관문이다. 무시무시한 천왕 눈빛에 세속 욕심이 달아난다.

 


도량에는 부처님오신날의 여운이 여전했다. 분홍, 초록, 파랑, 빨강, 노랑 등 오색연등이 내걸렸다. 1층을 종무소와 다래헌으로 쓰는 보제루엔 부처님오신날 현수막이 그대로였다. 여운일 뿐. 환희는 입을 닫았다.


보제루 밑으로 난 계단을 밟아 가니 대웅전과 마주했다. 법당이 두 팔을 벌렸다. 부처님 예 있으니 그 품을 내주는 게다. 잠시 각박해진 마음 부려놓아도 괜찮다는 넉넉함이었다. 커다란 등이 바람결을 탔다. 부처님오신날 법회 때 맑은 물로 목욕했을 아기부처님이 앞에 놓였다. 자식 걱정에 살림살이 걱정에 노부모 걱정에 시달렸을 불자들 번뇌도 함께 씻겼을까. 대웅전에 마음 두니, 시선이 잠잠해졌다. 어느 보살은 108염주를 돌리며 바지런히 절을 올렸다. 아니, 내려놓고 내려놓고 내려놓고 마음을 낮췄다. 이마를 바닥에 맞대자 뻣뻣하게 세웠던 등이 굽었다. 굽은 보살의 등을 따라 그네 마음도 둥그렇게 낮아졌으리라.

 

 

▲보제루 밑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대웅전과 마주한다.

 


불단 오른쪽에 놓인 동종이 점심공양시간을 기다렸다. 안내판을 보면 동종은 불교의식이나 음악을 연주할 때, 공양시간을 알릴 때 쓰인다. 공양시간이 멀었으니 하릴없다. 가만할 수밖에. 한데 예사롭지 않은 동종은 스치는 시선을 단박에 붙잡았다. 종을 매다는 용뉴가 쌍룡이 아니라 네 마리 용이 사방을 노려보고 있었다. 보살상이 새겨져 있고 ‘육자대명왕진언’이란 글씨도 보였다. 종 밑 부분에도 3개의 발톱을 가진 용이 입에서 불을 내뿜고 있었다. 관련 자료를 살펴보니 청나라 순치 원년인 1644년 17세기 범종 제작 대가인 김용암 작가가 만들었다.


이 보물 제1556호 동종에 얽힌 범상치 않은 기운을 알고 싶었다. 백양사 주지소임을 맡고 있는 진우 스님 자리를 지키고 있던 원용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은 숙빈 최씨 얘기를 전했다. 그리고 산내 암자 중대암에 주석 중인 전 주지 백암 스님과 자리를 마련해줬다. 조선을 중흥시켰던 영조의 탄생은 여기서 시작됐다.

 

 

▲동종 용뉴. 네 마리 용이 종을 붙들고 있다.

 


복순이네가 살던 마을에 전염병 장티푸스가 돌았다. 낮이든 밤이든 곳곳에서 곡소리가 들렸다. 복순이네도 병마를 피할 순 없었다. 마을에서 쫓겨나자 용구산(龍龜山, 몽성산 옛 지명)에 자리한 큰 절 용흥사로 몸을 피했다. 백제 침류왕 1년(384) 인도승 마라난타 존자가 초암을 짓고 개산했다는 용구사는 수많은 스님들이 수행하던 절이었다. 아무리 절이 컸더라도 입이 몇 개 늘었으니, 염치없이 놀고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복순이 아버지는 절에서 쓸 땔감을 해왔고 어머니는 스님들 밥을 지었다. 복순이는 스님들 심부름을 도맡아 하며, 병이 낫기를 매일 같이 기도했다. 하나 부모는 눈을 감았고, 복순이는 하늘 아래 고아가 됐다. 기도는 슬픔을 삭히지 못했다.


 

 

▲보호수 뒤에 사천왕문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눈빛이 형형하게 빛나던 한 스님이 복순이에게 일렀다. “3일 동안 세수를 하지 말거라.” 금세 꾀죄죄해진 복순이 형색을 본 스님이 의미심장한 말을 건넸다. “언젠가는 네가 여길 떠날 날이 올게다. 여길 나간 후에도 스님들 공양 잘 해야 한다. 오늘은 저 고개를 넘어가거라. 다리 옆에서 서 있다가 때가 되면 울어야 한다.”
복순은 스님 말씀대로 다리 옆에서 울기 시작했다. 마침 나주목사가 창평현감을 만나고 오는 길이었고, 다리는 그 길목이었다. 나주목사는 남루한 형색에서도 복순이의 총명함을 알아봤고, 부인의 몸종으로 삼았다. 나주목사 부인은 총명한 복순이를 인현왕후의 시종으로 소개했고 복순이는 궁중에서 청소, 설거지 등 허드렛일을 하는 무수리로 살았다. 그 때가 일곱 살 무렵이었다.


인현이 폐위되고 희빈 장옥정은 왕비로 올라서면서 실권을 잡았다. 인현이 떠났지만 복순은 늘 그 방을 깨끗하게 치우고 밤엔 불을 밝혀 인현의 복위를 바랐다. 이곳을 거닐던 숙종은 방에 비친 그림자를 보고 놀랐다. “누군지 어서 가서 알아 보거라.” 신하는 “인현을 모시던 무수리이더이다”라고 보고했다. 갸륵한 복순의 마음이 숙종의 눈에 들던 순간이었다. 이후 성은을 입고 1693년 아들 영수군을 낳았지만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인현왕후가 복위된 그 해 9월 연잉군 이금이 태어났다. 숙빈 최씨의 아들 영조였다.


놀라운 이야기는 여기서 부터다. 오마이뉴스에 ‘사극으로 역사읽기’를 연재하는 동아시아 역사학자 김종성씨는 2008년 3월20일자 ‘담양주간신문’에 정리된 용흥사 전설을 연재에 인용했다.


용흥사의 한 스님이 “효성 어린 한 소녀가 암자에 들어온다”고 예견했다. “먼 미래 산신령의 인도로 고관대작을 만나 입궐한 뒤 왕을 낳는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리고 스님은 후세에 길이 남을 성군을 기리기 위해 용 네 마리로 된 종을 만들어 부처님께 공양했단다. 예견에 따라 실제 종이 제작되고 32년 뒤인 숙종 2년(1676), 최복순은 절에 왔다.


동종이 존재했다는 얘기만 듣고 직접 삽을 들고 동종을 파냈던 사람이 백암 스님이다. 스님은 “항간에 동종에 관한 여러 이야기가 터무니없을지 모르지만 여러 사람 입에 오르내리니 믿음직해지는 법”이라고 했다. 백암 스님은 말을 이어갔다.


“숙빈 최씨가 나이 들어 이곳에 왔더랍니다. 스님 말씀을 잊지 않았던 거지요. 지금 용흥사 한 쪽엔 옛날 사당자리가 있었다고 해요. 영조는 숙빈 최씨가 살아있을 때부터 음식 차려놓고 의식을 올렸다고 합니다. 3칸짜리 사당이었답니다. 가운데는 숙빈 최씨 영정이, 좌우로는 숙빈의 부모가 모셔졌다고 해요.”


 

▲보물인 ‘담양 용흥사 순치원년명 동종’.

 

 

이야기를 듣고 중대암을 나서 다시 용흥사 경내로 드니 도량은 또 다른 인연들 속에 숨 쉬고 있었다. 대웅전에서는 누군가의 제사를 지내는지 요령과 목탁, 염불소리가 흘러나왔다. 대웅전 풍경 물고기는 언젠가부터 흐르는 바람결 속을 유유히 헤엄쳤다.


주지 원용 스님과 찻잔을 두고 마주 앉았다. 게으른 시계는 멎었고 찻잔 속에 담긴 차는 파문조차 없었다. 바쁜 건 숙빈 최씨와 영조 이야기가 궁금한 객 마음이었다. 스님은 “숙빈 최씨가 여기서 기도해서 영조를 낳았다는 얘기도 전한다”고 했다. 그래서 용구산 이름이 몽성산(夢聖山)으로 바뀌었다는 설도 전한다고. 해서 극진한 기도로 자식을 얻은 이야기가 궁금했다.


“기도 올리는 그 마음이면 그만이지 뭘 바라는 건지요.”


시계와 찻잔 속 차는 멎고 입술은 달라 붙어버렸다. 미안했던지 스님은 살짝 귀띔했다. 딸만 둘이던 보살이 아들을 얻고자 그렇게도 기도했지만 딸을 낳았단다. 사실 자식을 가질 수 없던 상태였다. 감사함을 회향하고자 기도로 태어난 딸과 용흥사에 다닌다고 한다.


스님과 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가피만 바랐던 마음과 작별했다. 가피는 다만 기도의 그림자일뿐. 실낱같은 마음 아래 어른거리는 환영 그리고 얼마만큼의 절절함이 전부다. 우리에게 기도는 충분했지만 그만큼 간절하진 않았다.


숙빈 최씨와 영조 이야기는 시대 속으로 되돌려 보냈다. 소식 없는 바람을 기다렸던 풍경과도 안녕이다. 하나 용흥사는 기다린다. 제 몸 흔들어 스스로 바람 부르는 풍경을. 

 

최호승 기자 time@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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