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아무런 일 없음이 좋다고 말하지 말라
지금 아무런 일 없음이 좋다고 말하지 말라
  • 법보신문
  • 승인 2013.06.19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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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운문사 벽화. 도자기를 구워 이어 붙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질문 함정에서 빠져나간

노스님과 수좌스님에게

현 경지에 안주 말란 경책

우리 본질은 앎과는 무관

본래 부처란 본질은 같아

 

有一老宿이 參師할새 未曾人事하고 便問 禮拜卽是아 不禮拜卽是아 師便喝한대 老宿이 便禮拜라 師云, 好箇草賊이로다 老宿云 賊賊하고 便出去하니 師云, 莫道無事好니라

 

해석) 한 노스님이 임제 스님을 뵈러 와서는 인사도 나누기 전에 바로 물었다 “절을 하는 것이 옳습니까? 절을 하지 않는 것이 옳습니까?” 임제 스님이 바로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노스님이 곧바로 절을 했다. 임제 스님이 말했다. “뭘 좀 아는 도둑이로군.” 그러자 이번엔 노스님이 “도둑놈 도둑놈” 그러면서 나가버렸다. 임제 스님이 말했다. “일이 없는 것이 좋다고 말하지 말라.”

 

강의) 노숙(老宿)은 나이가 많은 노스님을 말합니다. 노스님이 임제 스님을 만나기 위해 왔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에게 절을 해야 옳습니까, 하지 않아야 옳습니까. 이 질문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당신이 방장이라는 것만 놓고 보면 내가 절을 해야겠지만 나이는 내가 많은데 늙은 사람이 절을 하는 수고를 해야 하겠느냐 하는 의미입니다. 만약 임제 스님이 절을 하라고 하면 방장으로서 상(相)을 내는 것이 될 것이고 절을 하지 말라고 하면 노스님의 의도에 말린 꼴이 될 것입니다. 참 고약한 질문입니다. 한마디 말로 임제 스님을 분별의 한복판에 밀어 넣고 있습니다. 그러나 걸려들 임제 스님이 아니지요. 대답 대신 그냥 고함을 질러버립니다. 어려워 누구도 풀 수 없다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알렉산더는 칼로 잘라 단번에 해결해 버립니다. 임제 스님 또한 양자택일해야 하는 질문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고함으로 단번에 부숴버립니다.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없애버린 것입니다. 그러자 노스님이 공손하게 절을 합니다. 노스님 또한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임제 스님이 ‘무엇을 좀 아는 도둑이로군’하고 칭찬을 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런데 임제 스님이 노스님에게 “일이 없는 것이 좋다고 말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이번에는 나에게서 풀려났지만 다음에는 어림도 없다는 뜻 일 수도 있고, 지금의 경지에 안주하지 말라는 경책의 의미도 될 것입니다.

 

首座侍立次에 師云, 還有過也無아 首座云, 有니라 師云, 賓家有過아 主家有過아 首座云, 二俱有過니라 師云, 過在什?處오 首座便出去하니 師云, 莫道無事好로다 後有僧擧似南泉한대 南泉이 云, 官馬相踏이로다

 

해석) 수좌가 와서 임제 스님 옆에 섰다. 그러자 임제 스님이 물었다. “(앞의 대화에) 허물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수좌가 대답했다. “있었습니다.” 임제 스님이 또 물었다 “손님에게 있었는가? 주인에게 있었는가?” 수좌가 대답했다. “두 사람 모두에게 있습니다.” 임제 스님이 되물었다. “허물이 어디에 있었는가?” 그러자 수좌가 나가버렸다. 임제 스님이 말했다. “일 없는 것이 좋다고 말하지 말라.” 뒤에 어떤 스님이 남전 스님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남전 스님이 말했다. “나라에서 기르는 명마들이 서로 차고 밟는 형국이로다.”

 

강의) 수좌도 또한 보통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임제 스님의 질문에 그냥 없다고 하면 끝날 일인데 반대로 허물이 있고 그것도 두 사람 모두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임제 스님을 순간적으로 분별의 아수라 속으로 밀어 넣고 있습니다. 그러나 임제 스님은 오히려 역공을 취합니다. “허물이 어디에 있느냐”며 수좌에게 슬쩍 대답을 전가합니다. 이제 다시 수좌가 대답해야 할 차례입니다. 그런데 수좌는 대답하지 않고 그냥 가버립니다. 스님의 그물에 걸릴 내가 아니라는 의미겠지요. 그러자 임제 스님이 또 말합니다. “일이 없는 것이 좋다고 말하지 말라.” 노스님과 마찬가지로 오늘 무사히 빠져나갔다고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런 뜻이겠지요. 이에 대해 남전 스님의 평가는 주목할 만합니다. “나라에서 기르는 명마들이 서로 차고 밟는 형국이로다.” 임제 스님이야 말할 필요가 없겠지만 여기에 등장하는 노스님, 수좌 모두 너나 할 것 없이 훌륭하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師 因入軍營赴齋할새 門首에 見員僚하고 師指露柱問호대 是凡是聖가 員僚無語어늘 師打露柱云, 直饒道得이라도 也祇是箇木?이라하고 便入去하니라 師 問院主 什?處來오 主云, 州中?黃米去來니다 師云, ?得盡?아 主云, ?得盡이니다 師以杖으로 面前에 ?一?云, 還?得這箇?아 主便喝한대 師便打하다 典座至어늘 師擧前話한대 典座云, 院主不會和尙意니다 師云, ?作?生고 典座便禮拜한대 師亦打하니라

 

해석) 임제 스님이 군영에 공양 초대가 있어서 갔을 때 문 앞에서 장교를 만났다. 임제 스님이 기둥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것은 범부인가? 성인인가?” 그러자 장교가 말을 못했다. 임제 스님은 기둥을 두드리며 말했다. “설사 대답했다 해도 그것은 다만 한낱 나무토막일 뿐이다.” 그리고는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임제 스님이 원주에게 물었다. “어디 갔다 왔는가?” “마을에 황미를 팔러 갔다 왔습니다.” 임제 스님이 말했다. “그래 다 팔았는가?” 원주가 대답했다. “예, 다 팔았습니다.” 임제 스님이 원주 얼굴 앞에 막대기로 한일(一) 한 획을 긋고 말했다. “그래, 이것도 다 팔수 있는가?” 그러자 원주가 ‘할’하고 고함을 질렀다. 임제 스님이 그대로 후려쳤다. 그곳에 전좌가 오자 임제 스님이 앞의 이야기를 했다. 전좌가 말했다. “원주가 큰 스님의 뜻을 잘 몰랐습니다.” 임제 스님이 말했다. “그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나?” 그러자 전좌가 바로 절을 하였다. 임제 스님이 역시 후려쳤다.

 

강의)  임제 스님께서 군영에 공양 초대가 있어서 갔을 때 기둥을 가리키며 장교에게 물어봅니다. 이것은 범부인가 성인인가. 장교는 말을 하지 못합니다. 스님 참 농담도 잘하십니다. 이렇게 가볍게 받으면 될 것 같기도 한데 장교는 임제 스님의 말에 너무 긴장을 한 것 같습니다. 임제 스님이 던진 질문에 사로잡혀 본질을 놓쳐버렸습니다. 그런 장교에게 임제 스님이 말합니다. “나무토막에 무슨 말을 붙여도 나무토막이다.” 우리의 본질이 부처라고 한다면 우리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관계없이 본질은 부처일 것입니다. 장교가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스님이 아니므로 임제 스님은 장교에게 이 정도의 말씀을 하고 싶으셨던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원주에 대한 임제 스님의 질문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원주 스님이 쌀을 다 팔았다고 대답하기가 무섭게 임제 스님은 한일자를 휙 긋고는 이것도 팔 수 있는지 묻습니다. 그러자 원주가 고함을 칩니다. 이에 임제 스님은 원주를 후려갈깁니다. 대답이 틀렸다는 의미겠지요. 여기서 한일(一)은 불성의 근본작용 혹은 진리의 당체를 뜻하는 것 같습니다. 한일(一)자도 팔수 있느냐는 질문은 쌀을 파는데 정신이 팔려서 수행자로서의 본분을 잃어버린 것 아니냐는 뜻일 수도 있고, 누구에게 팔수도 없는 본래면목을 깨달으라는 경책의 의미도 담겨 있을 겁니다. 그런데 원주는 질문의 본질을 알지 못하면서 임제 스님의 흉내 내는 것으로 면피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가만있을 임제 스님이 아니겠지요. 뒤에 나오는 전좌 스님 또한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원주가 고함을 쳐 얻어맞으니, 전좌는 절을 합니다. 의미를 알고 절을 했다면 맞을 일이 아닐 것 같기는 한데 맞은 것을 보면 질문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有座主하야 來相看次에 師問, 座主야 講何經論고 主云, 某甲이 荒虛하야 粗習百法論이니다 師云, 有一人은 於三乘十二分敎에 明得하고 有一人은 於三乘十二分敎에 明不得하니 是同是別가 主云, 明得卽同이요 明不得卽別이니다 樂普爲侍者하야 在師後立云, 座主야 這裏是什?所在관대 說同說別고 師回首問侍者호대 汝又作?生고 侍者便喝하다 師送座主回來하야 遂問侍者호되 適來是汝喝老僧가 侍者云, 是니다 師便打하니라

 

해석) 어떤 강사 스님이 찾아와서 인사를 나눴다. 임제 스님이 물었다. “강사 스님은 어떤 경론을 강의하십니까?” 강사 스님이 대답했다. “제가 아는 것이 부족합니다. 그저 백법론을 조금 익혔을 뿐입니다.” 임제 스님이 물었다. “한 사람은 삼승십이분교에 아주 밝고 한 사람은 삼승십이분교에 어두울 때 이 두 사람은 같습니까 다릅니까.” 강사 스님이 대답했다. “밝음을 얻었으면 같겠지만 밝음을 얻지 못했다면 다른 것입니다.” 시자로 있던 낙보 스님이 임제 스님의 뒤에 서 있다가 말했습니다. “강사 스님, 이곳이 어딘 줄 알고 같다느니 다르다느니 말을 합니까?” 그러자 임제 스님이 시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면 그대는 어떻다고 생각하는가?” 이에 시자가 곧 ‘할’하고 소리를 질렀다. 임제 스님이 강사 스님을 보내고 돌아와서 낙보 스님에게 물었다. “조금 전의 고함은 나에게 한 것인가?” 낙보 스님이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그러자 임제 스님이 바로 후려갈겼다.

 

강의)  좌주(座主)는 경론을 연구하고 강의하는 강사 스님을 말합니다. 그 강사 스님은 유식을 공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강사 스님이 공부했다는 ‘백법론(百法論)’은 ‘대승백법명문론(大乘百法名門論)으로 유식의 중요한 경전입니다. 임제 스님이 묻습니다. 한 사람은 삼승십이분교, 즉 일체의 경전에 밝고 한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면 이 둘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강사 스님은 강사 스님다운 대답을 합니다. “경전에 밝음을 얻었으면 같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같지 않다.” 일견 맞기는 맞는 말인데 선(禪)의 견지에서 보자면 옳은 대답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우리의 본질은 우리의 앎과는 무관합니다. 알든 모르든 우리가 본래 부처라는 본질은 같습니다. 얼음이 본래 물임을 알든 모르든 얼음은 본래 물입니다. 그런데 강사 스님은 그것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종광 스님.

그러자 시자인 낙보 스님이 대화에 끼어듭니다. 강사 스님의 잘못된 점을 바로 잡으려고 했겠지요. 그러나 이번에는 낙보 스님이 임제 스님의 시험에 걸려듭니다. 낙보 스님은 고함을 지름으로써 시험을 벗어나려 하지만 결국 얻어맞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마도 스스로 선승이라는 자만심, 혹은 상(相)에 빠져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생각해보면 선승이 구차하게 말로 이리저리 설명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정리=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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