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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심사정, ‘산승보납도’ / 전 이인문,‘격단조주’ / 전기, ‘매화서옥도’

기자명 조정육

따르되 머무르지 않았던 사문 고타마의 위대한 여정

그리스어 ‘미메시스(mimesis)’는 예술 창작의 기본 원리로서의 모방이나 재현을 의미한다. 예술은 자연이나 위대한 작품 같은 훌륭한 대상을 모방함으로써 시작된다는 뜻이다. 서양의 미메시스에 해당되는 행위를 동양화에서는 ‘방작(倣作)’이라 부른다. 옛 대가의 그림을 본 떠 그리는 것이 방작이다. 비슷한 단어로 ‘임모(臨模)’가 있다. ‘임(臨)’은 원작을 옆에 놓고 보고 그리는 것이고, ‘모(模)’는 투명한 종이를 사용해 윤곽을 본뜨는 것이다. 임모의 목적은 앞 시대 사람들이 그림 그릴 때의 경험을 배우는 것이다. 본뜨는 사람의 창작성이 제한된다. 본뜬다는 점에서는 방작이나 임모나 오십보 백보지만, 방작은 겉모습만 비슷하게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림 속에 담긴 정신이나 뜻을 살리는 점이 임모보다 창작에 더 가깝다. 조선시대 화가들은 처음 그림을 배울 때 뿐 임모와 방작을 거듭했다. 대가가 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타인의 예술세계를 이해하고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 강은, ‘산수인물도’, ‘고씨화보’ (좌). 심사정, ‘산승보납도’, 36×27.2cm, 비단에 색, 부산박물관(우).

 


심사정이 ‘고씨화보’를 방작한 스님


조선시대에는 중국에서 여러 종류의 화보(畵譜)가 전래되었다. 화보는 옛 명화들을 토대로 화가가 밑그림을 그리고 판화로 제작한 것이다. ‘십죽재화보(十竹齋畵譜)’처럼 채색 목판 화보도 있으나 대부분 흑백이다. 흑백에 진짜 작품도 아니었지만 책 한권으로 여러 화가들의 명작을 흔적이나마 감상할 수 있어 지금의 ‘세계미술전집’만큼이나 인기 있는 그림책이었다. 특히 중국의 명(明), 청(淸)대에는 출판기술이 눈부시게 발달해 다양한 화보가 제작됐다. 우리나라에는 ‘고씨화보(顧氏畵譜)’,‘개자원화보(芥子園畵譜)’,‘당시화보(唐詩畵譜)’,‘시여화보(詩餘畵譜)’등 중국에서 출판된 화보가 거의 시차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전래됐다. 전문적인 화가가 아니라도 화보 덕분에 누구든 독학으로 그림을 보고 배울 수 있었다.  미술 학원이 없어도 선비 스스로 화보를 보며 그림을 익혔다. 심사정(沈師正), 이인문(李寅文), 김홍도(金弘道), 전기(田琦) 등 많은 조선시대 화가들이 화보를 교본 삼아 구도 잡는 법을 배우고 자신의 상상력이 가미된 색을 올렸다. 화보는 처음 그림을 시작하는 초보자한테나 아이디어가 고갈 된 중견작가 모두에게 인기 있는 최고의 교재였다.


현재(玄齋) 심사정이 그린 ‘산승보납도(山僧補衲圖)’도 화보를 방작한 사례다. 스님이 가사를 꿰매는 모습을 그린 ‘산승보납도’는 ‘고씨화보’에 수록된 명나라 화가 강은(姜隱)의 ‘산수인물도(山水人物圖)’를 방작했다. ‘고씨화보’는 명나라의 고병(顧炳)이란 화가가 1603년에 간행한 화보다. 1권 4책으로 구성되었는데 육조(六朝)시대 진(晋)의 고개지(顧愷之)부터 명말의 왕정책(王廷策)의 작품까지 총 106명의 작품을 고병이 그리고 목판화로 제작했다. 그림 옆에는 화가의 작품과 인적 사항과 사승 관계 등 그림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첨부돼 있다.  


심사정의 ‘산승보납도’와 강은의 ‘산수인물도’를 비교해보면 스님이 개울가 옆에 자란 소나무 등걸에 앉아서 가사를 꿰매는 모습이 비슷하다. 스님 앞에서 원숭이 한 마리가 실을 가지고 장난치는 모습까지 참고했다.


전체적인 구도나 소재는 화보를 참고했지만 두 그림에서 받는 느낌은 전혀 다르다. 가장 큰 차이는 그림의 틀이다. 원형 안에 그린 강은의 ‘산수인물도’를 심사정은 사각으로 바꿨다. 그 결과 스님의 행동을 강조한 그림이, 스님과 산수가 함께 조화를 이루는 산수인물화가 됐다. 여기에 부드러운 갈색을 칠하고 크고 작은 태점을 찍자 우리가 길을 나서면 어디서라도 금새 찾을 수 있을 것처럼 편안한 공간으로 변했다. 스님이 걸터앉은 나무도 바뀌었다. 넝쿨이 휘감은 화보 속의 나무는 다소 삭막하다. 형태만 표현한 판화의 한계 때문이다. 심사정은 족보를 확인할 수 없는 애매한 나무 대신 우리에게 친숙한 소나무로 대체했다. 그림의 주인공이 스님이 아니라 소나무 같다. 진한 먹으로 노송의 테두리를 그린 다음 세밀한 필치로 솔잎의 농담(濃淡)을 달리했다. 색과 필치에 의해 박제된 나무에 물기가 흐른다. 싱싱한 화보 속에 낮게 표현된 언덕은 위압적일만큼 육중하게 스님 뒤에 버티고 있다. 산이 많은 조선의 장소성이 두드러진다. 다른 그림을 그대로만 본뜨는 임모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방작의 힘이다. 방작은 대상을 보고 본뜨되 원화의 뜻을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


그림 오른쪽 위에는 조선 후기 최고의 미술평론가인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1713-1791)의 평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산승보납도는 ‘고씨화보’ 가운데 강은이 그린 것인데, 현재(玄齋)가 그 뜻을 대략 모방하여 이렇게 그렸으니 매우 기이하다. 표옹(豹翁)은 평한다.”


그림을 그린 심사정이나 감상하고 평한 강세황이나 ‘고씨화보’를 잘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안내자로써 화보가 얼마나 중요했는지 실감할 수 있다.

    

 

▲ ‘당시화보’, 진우, ‘복익서동송인’(좌). 전 이인문,‘격단조주’《고송유수첩 제20폭》, 종이에 연한 색, 38.1×59.1,국립중앙박물관(우).

 

 

이인문이 ‘당시화보’를 방작한 어부


이인문의 작품으로 전하는 ‘격단조주(激湍操舟):격랑 속에서 물길을 잡는 뱃사공’은 《고송유수첩(古松流水帖)》 중 스무번째 작품이다. 이인문(1745-1821)은 호가 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으로 김홍도와 함께 화원(畵員)을 지냈다. ‘격단조주’는 ‘당시화보’에 실린 진우(陳羽)의 시 「복익서동송인(伏翼西洞送人):복익의 서쪽골짜기에서 사람을 전송하며」를 참고했다.  ‘당시화보’는 명나라의 황봉지(黃鳳池)가 당시(唐詩)를 주제로 해 그린 그림만을 모아 엮은 화보다. 당시 중 그림으로 그려질 만한 명시 100편을 선별한 후 이름 있는 화가에게 부탁하여 그림을 제작했다. 화보는 오언시(五言詩), 칠언시(七言詩), 육언시(六言詩) 순서로 세 권이 출간됐다. 시의 이해를 돕기 위해 출간된 화보인만큼 ‘고씨화보’와 그 체제가 조금 다르다. 한 쪽 면에 시를 적고 한 쪽 면에는 그 시를 도해한 그림을 첨부했다. 시를 통해 그림을, 그림을 보며 시를 이해하는 형식이다.


진우가 쓴 「복익서동송인」의 시는 이렇다.

 

골짜기에 봄날은 개고 꽃이 한창인데(洞裏春晴花正開)
꽃을 보며 골짜기 나가니 언제나 돌아오나(看花出洞幾時回)
은근히 무릉객을 기꺼이 떠나보내니(慇懃好去武陵客)
세상 사람들 끌어들여 따라오게 하지 말라(莫引世人相逐來) 

 

이 시를 읽고 보니 도연명(陶淵明:365-427)의 「도화원기(桃花源記)」가 떠오른다. 무릉(武陵)에 산 어부가 배를 타고 가다 복숭아꽃이 흘러오는 곳을 따라 올라가니 산 속에 깊은 동굴이 있었다. 동굴 속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그곳에 도원(桃源), 이상향이 있었다. 도원에서 여러 날을 보낸 어부는 집 생각이 났다. 다시 속세로 돌아가려고 하자 그곳에 사는 사람이 당부한 얘기가 바로 진우의 시인 것 같다. 낙원은 낙원으로 그냥 내버려두라는 얘기다. ‘당시화보’속의 어부는 배를 저어 동굴에서 빠져나온다. 물에 발을 담근 채 노를 젓는 어부는 뒤를 돌아본다. 복숭아꽃 줄기가 떠나가는 그에게 손을 흔들 듯 동굴 속에서 삐져 나왔다. 도원과 속세의 접점은 고요만이 감돈다. 구름은 멈춰있고 파도는 잠잠하다.


반면 이인문의 ‘격단조주’는 출렁이는 파도의 포효소리가 들릴 듯 동적이다. 격랑 속에서 물길을 잡기 위한 뱃사공의 안간힘이 실감난다. 화면은 바위와 어부와 배가 왼쪽에 치우쳐 있는 편파구도다. 오른쪽은 시원하게 트여 있다. 사공은 경물이 치우친 왼쪽에서 시원하게 트인 오른쪽을 향해 노를 젓고 있어 잠시 후면 배가 오른쪽 하단으로 나와 좌우의 무게가 균형을 이룰 것 같다. 사공은 곳곳에 삐쭉삐쭉 솟아 있는 바위너설을 피해 무사히 넓은 바다로 나아갈 것이다. 이인문이 거친 물길과 싸우는 사공에 초점을 맞춘데 반해 ‘당시화보’는 동굴을 빠져나온 어부가 뒤를 돌아보게 함으로써 도원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음을 보여준다. 화보 속 어부나 이인문의 어부는 둘 다 고개를 뒤로 돌리고 있다. 동작은 같지만 의도는 다르다. 화보 속 어부는 두고 온 곳에 대한 미련 때문에 고개를 돌렸다. 이인문의 어부는 앞으로 나가려고 주변을 살피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몸을 한껏 뒤로 젖히고 삿대를 미는 이인문의 어부는 뜨거운 물이 들끓듯 출렁이는 거친 파도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갈 것이다. 이인문은  ‘당시화보’에서 영감을 얻었지만 그림 속 내용은 완전히 자기식으로 바꿨다. 유유자적 노를 젓는 어부와 온 몸을 이용해 필사적으로 배를 미는 어부의 차이점을 보라. 이인문의 어부는 도원하고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다. 오로지 바다로 나가기 위해 거친 물살과 싸우는 생계형 어부다. 청출어람이다. 방작의 모범적인 사례다.


 

▲ ‘개자원화보’, 이영구, ‘매화서옥도’ (좌). 전기, ‘매화서옥도’, 19세기 중엽, 종이에 연한 색, 32.4×36.1cm,국립중앙박물관(우).

 

 

전기가 ‘개자원화보’를 방작한 매화서옥


심사정이 ‘고씨화보’를 좋아하고 이인문이 ‘당시화보’를 편애했다면 전기(1825-1854)는 ‘개자원화보(芥子園畵譜)’를 품고 다녔다. 고람(古藍) 전기가 제작한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는 ‘개자원화보’에 실린 이영구(李營丘)의 ‘매화서옥도’를 참고했다. 이영구는 북송(北宋)대의 화가 이성(李成:919-967?)이다. ‘개자원화보’는 청초(淸初)에 왕개(王槪), 왕시(王蓍), 왕얼(王臬) 삼형제가 합작으로 편찬한 종합적인 화보집이다. 처음에는 3집으로 구성됐으나 의외로 많은 호응을 얻은 데 힘입어 4집까지 증보 편찬됐다. 각 책에는 화론(畵論)과 그림 기법, 명인들의 작품을 모사한 그림을 게재한 형식을 갖췄다. 중국의 여러 화보 중에서 가장 많이 사랑을 받은 책으로 조선시대 18세기 이후의 회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성(李成)은 호가 영구(營丘)로 송대의 학자이자 화가였다. 그는 험준한 산을 웅장하게 묘사한 북방산수와 엷은 안개를 담묵으로 풀어낸 남방산수를 결합해 새로운 산수화풍을 창시했다. 그의 작품을 조선 말기의 재능 있는 화가 전기가 방작했다. 전기는 박제된 화보에 따뜻한 바람을 불어 넣어 원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전혀 다른 창작품을 완성했다. 화보에서는 매화가 핀 자연이 중심이다. 선비가 앉아 있는 서옥은 자연의 작은 일부분이다. 선비는 서재에서 오로지 책 읽는 데만 몰두해 있다. 밖에 핀 매화는 관심조차 없다.


반면 전기의 그림은 설렘으로 가득 차 있다. 서재에 앉아 있어도 거문고 들고 올 친구 생각에 들떠 있다. 그림에 어떤 색을 올리느냐에 따라 이렇게 전혀 다른 분위기로 바뀐다. 그림 오른쪽에 ‘역매가 초옥에서 피리를  부는 중’이라고 적었다. 역매(亦梅)는 수장가이자 감식가인 오경석(吳慶錫:1831-1879)이다. 전기는 안타깝게 서른에 요절했다. 그의 죽음을 누구보다 슬퍼한 사람이 초옥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던 역매였으리라. 


그러나 방작은 방작일 뿐이다. ‘산승보납도’가 아무리 잘 그린 그림이라해도 심사정의 예술적 기량이 충분히 드러난 창작품은 아니다. 이인문의 ‘격단조주’와 전기의 ‘매화서옥도’가 아무리 뛰어난 득의작(得意作)이라 한들 그들의 대표작이 될 수 없다. 과정일 뿐이다. 전기의 경우는 요절한 탓에 ‘매화서옥도’가 그의 대표작이 됐을 뿐이다.   

 

스승에게 가르침을 청한 사문 고다마


사문 고타마가 바이살리로 향한 것은 스승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바이살리에서는 여러 사문들이 종교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사문 고타마는 나중에 스스로의 힘으로 깨달음을 얻지만 처음부터 자기 식만을 고집하는 막무가내는 아니었다. 그는 여러 스승들을 찾아다니며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수승한 법을 배우고자했다. 스승들이 도달한 경지가 어떤 곳인 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바이살리에 근접한 사문 고타마는 가장 먼저 바가바 선인을 찾아갔다. 선인이 있는 숲 속에 다가가자 여러 사문들이 바가바 선인을 중심으로 수행하고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심한 고행에 몰두하고 있었다. 벌거벗은 채 가시 위에 누워 피를 흘리는 사람, 가축의 오물을 먹는 사람, 뜨거운 불에 몸을 태우는 사람 등등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고행을 서슴없이 실행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런 고행이 필요한가. 사문 고타마는 바가바 선인에게 고행의 목적을 물었다. ‘천상에 태어나기 위해서’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사문 고타마는 실망했다. 편안한 다음 생을 위해 현재의 육체를 괴롭힌다는 대답은 그가 기대한 답이 아니었다. 


사문 고타마는 스승을 찾아 마가다국으로 다시 길을 떠났다.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왕사성)는 당시 가장 강성한 나라 중의 하나로 문물과 교통의 요지였다. 마가다국에 도착한 사문 고타마는 탁발을 하다 중요한 사람과 만났다. 마가다국의 왕 빔비사라였다. 빔비사라왕은 탁발하는 사문 고타마의 모습을 보고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아봤다. 저런 인재가 곁에 있다면 이 나라에 큰 보탬이 되리라. 왕은 사문 고타마를 만나 자신의 곁에서 세속의 행복을 누릴 것을 제안했다. 사문 고타마는 자신의 수행이 단순한 욕망의 실현이 아니라 생로병사를 초월한 인간 최고의 이상임을 얘기한다. 위엄 있으면서 우아한 사문의 태도에 감동한 빔비사라왕은 깨달음을 얻으면 반드시 자기에게 와서 가르침을 내려달라고 부탁한다. 후에 사문 고타마는 빔비사라왕과의 약속을 지켰고 그는 불교 교단의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최초의 불교 사원 죽림정사도 빔비사라왕이 지어 교단에 기증한 것이다.


사문 고타마는 다시 길을 떠나 알라라 칼라마의 수행처로 향했다. 알라라 칼라마는 열여섯에 출가한 뒤 104년 동안이나 수행했다는 위대한 선인이었다. 300여명의 제자들이 그를 따라 수행중이었다. 선인은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에 도달하는 것을 수행의 목표로 삼았다. 무소유처정은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무념무상의 평온한 상태가 되는 선정이다. 깊은 삼매에 들지 않고서는 도달할 수 없는 경지였다. 사문 고타마는 선인이 가르쳐 준 대로 홀로 수행했다. 곧 무소유처정에 도달했다. 알라라 칼라마는 감탄했다. 자신을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한 경지였다. 후계자가 필요했던 알라라 칼라마는 사문 고타마에게 자기와 함께 대중을 거느리자고 제안했다. 생로병사를 떠난 최고의 깨달음이 목적이었던 사문 고타마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사문 고타마는 다시 길을 떠나 웃다카 라마풋타 선인을 찾아갔다. 그는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에 올랐다고 알려진 선인이었다. 이곳은 정신작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순수한 정신만 남는 선정삼매의 최고 단계였다. 사문 고타마는 선인이 가르쳐 준 대로 홀로 수행했다. 곧 비상비비상처정에 도달했다. 웃다카 라마풋타는 감탄했다. 그렇게 빠른 시간 내에 자신과 같은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웃다카 라마풋타도 사문 고타마에게 알랄라 칼라마와 똑같이 함께 교단을 지키자고 제안했다. 이번에도 정중하게 거절했다. 사문 고타마는 수행 중에 만난 가장 뛰어난 스승한테 작별인사를 하고 나왔다.

 

▲조정육

누군가를 본받아 깨달음을 얻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위대한 작품이라도 임모나 방작이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품이 아니듯 수행도 마천가지다. 스스로의 힘으로 깨우쳐야 한다. 최고 지도자를 다 만나고 왔으니 더 이상 찾아갈 스승도 없었다. 이제 길은 하나뿐이다. 자신이 생각한 방법대로 수행하는 것이다. 사문 고타마는 라자그라하를 떠나 서남쪽으로 향했다.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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