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5세까지 스님 시봉
메모 없이 유불도 강의
평소 인재불사 강조해
탄허 스님(呑虛, 1913∼1983)은 나에게는 노스님(祖行)이 된다. 내 나이 18세부터 시작해서 25세 까지 모셨으니, 승려생활 12년 가운데 7년 정도를 탄허 스님을 모신 셈이다. 그래서 늘 잊지 못한다. 공부를 하자면 당연히 모시고 살면서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다지 힘들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내가 한문 한두 줄이라도 해석하게 된 것도, 민족사라는 불교출판사를 하게 된 것도 모두가 탄허 스님을 모시고 살았던 덕택이다.
탄허 스님은 매우 박학다식한 분이다. 불교는 물론 유가(儒家)와 도가의 학문에 대해서도 줄줄 거침없이 외우셨는데, 단 한 번도 책이나 메모 노트 등을 보고 강의하신 적이 없었다. 강의는 대부분 흑판 강의인데, 글씨는 모두 초서(草書)라서 신출내기로서는 도무지 무슨 글자인지 알 수 없는 것이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그래서 대충 알 수 있는 것은 놔두고 모르는 초서는 그대로 그려놓았다가 강의를 마치고 나서 아무도 없을 때 가서 묻곤 하였다. 물론 80%가 모르는 글자였는데, 한 1년 지나니 20%로 줄어들었다. 무조건 노트에 필기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탄허 스님은 공부하는 사람을 아주 좋아하셨고, 질문을 좋아하셨다. 공부를 하고 있을 때는 심부름도 잘 시키지 않았다. 또 조금이라도 말을 알아듣는 사람이 있으면 한 여름에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말씀하셨다. 질문하는 사람이 없으면 알아듣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다.
19세 봄, 삼척 영은사에서 스님을 시봉할 때였다. ‘대혜서장’을 배울 때인데, 거기에는 대나무가 많았고 나는 단소를 좋아했다. 하루에도 몇 개씩 단소를 만들었는데, 열흘정도 지나자 하루는 부르셨다. 방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앉자마자 하시는 말씀이 “공부 안하려면 여길 떠나야 돼. 여기 있을 필요가 없어. 가야 돼” 그 순간 정신이 아찔했다. 그런데 더욱더 충격적인 것은 사실 내가 없으면 시봉할 사람이 전혀 없었는데도(노스님과 단 둘이 살았으므로) 저렇게 말씀하시다니…. 정신을 가다듬고 오체투지를 세 번했다. 그리고는 나와서 만들어 두었던 단소를 모두 아궁이에 버렸다.
탄허 스님께서는 “강원에서 사교(四敎)를 마치고 나서도, 유생으로 사서(四書)를 마치고 나서도 학문이나 도(道)에 뜻을 두지 않는다면 가르친 선생도, 배운 제자도 모두 몽둥이질해야 할 작자들”이라고 말씀하셨다. 언필칭도(言必稱道), 제자들에게도 도(道)와 관련된 책 외에 잡서나 잡문은 절대 보지 말라고 하셨다. 혹 소설 같은 것을 읽고 있으면 “그런 것은 쓸데없이 왜 보느냐”고 나무라셨다.
탄허 스님은 항상 말씀하시기를 “경(經)을 읽을 때에는 종지(宗旨), 즉 핵심을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하셨다. 요점이 무엇인지 모르고 읽는다면 백번 읽어도 소용없다는 것이었다.
1972년경 스님은 얼마 안 가서 곧 우리나라가 중국과 왕래하게 될 터이니, 중국어를 배워두라고 하셨다. 그 때는 모두들 ‘좀 터무니없는 말씀’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100% 적중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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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화 민족사 사장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