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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우봉운 조선불교여자청년회장

일제 강점기, 불교 교육으로 여성계몽 이끈 선각자

기독교서 개종해 불교 운동
1920년대 여성불교 구심점
조직 꾸려 대사회 참여 유도


기복불교 극복 노력 일환으로
수행 모임 ‘부인선우회’ 결성
교리교육 등 신행문화 개선도

 

 

▲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인연의 시작은 한통의 편지였다. 얼굴도 모르는 한 남성이 불현듯 보내온 편지는 순진한 여학생 우봉운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았다. 편지를 보낸 상대방은 기독교계 사회운동을 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수려한 필체에 화통한 글귀가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편지를 본 친구들이 호들갑을 떨며 답장을 재촉했다. 사회운동을 하는데다 신종교인 기독교를 믿는다면 사고방식도 훨씬 깨어있을 것이라는 짐작이었다. 무엇보다 1900년대 초, 일제치하의 한국에는 선교사들이 세운 기독교계 학교가 각지에서 운영되고 있었는데, 이를 통해 서양의 문화와 신학문을 배운 여성들은 가부장적이고 고리타분한 옛날식 사고를 가진 남성들을 선호하지 않았다. 당시 여학생이 재학 중이던 정신여학교는 기독교사학이었고, 그녀 역시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에 친구들의 호들갑이 싫지만은 않았다.


수줍은 답장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편지교류가 시작됐다. 비록 얼굴을 본적은 없지만 둘은 서로 잘 맞았다. 특히 남자는 생각이 깊고 대단히 어른스러웠다. 여학생이 미처 경험하지 못했던 사회의 일면도 폭넓게 알고 이해하고 있었다. 편지는 그녀가 학교를 졸업하고 계명여학교 교사로 일하는 중에도 꾸준히 이어졌다. 편지를 통해 그녀는 일제치하의 민족이 당면한 현실에 대해 깊이 인식하기 시작했다. 민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일, 민족의 미래에 대한 고민도 깊어졌다. 두 사람의 교류는 5년간 이어졌고  그 동안 써내려간 편지만 수백 통에 달했다. 그러면서 서로에 대한 애정과 신뢰도 차곡차곡 쌓였고, 결국 결혼이라는 사랑의 결실로 맺어질 수 있었다.


일제 치하의 암울한 시기에 피어오른 이 훈훈한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은 조선불교여자청년회 초대회장이자 근대 여성불교 운동의 선구자로 알려진 ‘우봉운’이다. 기독교 학교를 다니며 기독교를 신앙하던 여학생이 로맨틱한 결혼 이후에는  불교로 개종해 본격적인 불교운동의 길을 걸었으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뿐만 아니라 편지를 통해 부부의 연을 맺은 남편 ‘기태진’ 역시 결혼 이후 출가해 스님으로 활동하게 되니 대단히 흥미롭다. 결과적으로 기독교라는 공통의 종교로 맺어진 인연이, 결혼 이후에는 개종과 함께 적극적인 불교행보로 변화한 셈이다.


개종은 남편이 먼저였으니 두 사람의 결혼 생활 역시 남편의 출가로 자연스레 끝을 맺은 것으로 보인다.


남편 기태진은 본명보다 ‘기석호’라는 법명으로 더 알려진 인물이다. 그 또한 우봉운과 마찬가지로 민족해방과 불교 자립을 위해 활발한 대사회 운동을 전개했다. 석호 스님은 특히 경허, 만봉, 혜월 스님으로 이어지는 법맥을 전수하고, 각종 사회 참여 및 불교계 강연에 강사로 이름을 올리는 등 불교계 중심인물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다. 1921년 서울 안국동에서 선학원이 창립할 때 기석호라는 이름으로 동참한 기록이 있으니, 아마도 그의 출가는 1915~1921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남다른 정신적 교감을 나눴던 만큼 남편의 출가는 우봉운의 개종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남편의 출가가 개종의 결정적인 이유라고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외부적인 요인으로 인한 개종으로 보기에 그녀의 행보가 대단히 극단적인 변화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편이 출가한 후에도 해외에서 기독교인으로 활동하다가, 1922년 국내로 들어온 뒤 본격적으로 불교운동에 나선다. 재가여성불자들을 결집해 조선불교여자청년회 창립을 주도하고 초대회장까지 맡았는데, 이는 재가 여성불자들의 지도자나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그녀가 다른 여성불자들보다 두드러진 행보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우봉운은 1920~1930년대 불교여성운동의 구심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는 기독교계 신여성 중심으로 움직이던 당시 여성운동계에 불교여성의 존재감을 당당히 드러냈을 뿐 아니라, 이후 부인선우회을 이끌면서 기복 위주로 이어지던 여성 신행문화에 ‘교리 교육’과 ‘선 수행’을 도입했다는 점에서 남다른 면모를 보인다. 특히 그녀를 주축으로 창립한 조선불교여자청년회는 불교여성운동의 시발이자 최초의 재가여성조직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우봉운은 조선불교여자청년회뿐 아니라 근우회, 조선동우회, 부인선우회 등 다양한 조직을 이끌며 여성불자들의 인식개혁 및 대사회 참여를 이끌며 여성불교운동에 매진했다.


그러나 이 같은 활발한 활동에도, 정작 그녀의 이름은 그닥 알려져 있지 않다. 가장 큰 요인은 그녀에 대한 기록이 극히 제한적이라는 점이다. 그녀의 삶은 당시 일간지나 잡지 등을 통해 단편적으로 드러날 뿐 그 궤적을 소상히 추적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게다가 해방 이후에는 북으로 넘어가 이후 그녀에 대한 연구나 조사활동 역시 그리 활발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때문에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채 변화시킨 개종의 계기는 짐작조차 할 수 없 으니 아쉬운 노릇이다.

어쩌면 그녀는 남편의 출가 이후부터 국내로 들어오기 전의 시기, 불자로 거듭나는 결정적 변화를 맞지 않았을까. 그 변화의 계기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이를 통해 불교에 깊이 귀의하고 재가불자여성 계몽을 위한 심도 있는 고민으로 조선불교여자청년회 창립을 주도했을 것이다.


실제 우봉운은 조선불교여자청년회의 활동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여성들을 향한 교리 교육을 통해 당시 기복불교 중심이던 여성신행문화를 개혁하기 위해 힘썼으며, 각종 강연회와 토론회, 부인강좌, 불교연구 등을 통해 계몽운동에 나섰다. 종로구 사간동의 회관을 임대해 능인여자학원을 운영함으로서 서민층 여성들에게까지 교육기회를 두루 제공했다. 우봉운은 능인여자학원 교장 및 교수로 활동하며, 중년층 여성불자들을 대상으로 각종 교양과 불교교리 교육에 나서기도 했다.


‘조선불교’ 12호에 실린 조선불교여자청년회 관련 기사에 우봉운에 대한 기록이 전해진다.


“우리 여자사회의 선진인 우봉운 여사는 자애롭게 감동하고 분투하여 부처님의 진정성으로 동지를 규합시켜 여성의 덕성을 함양시키는 지식계발을 위해 조선불교여자청년회라는 단체를 조직했다. 회장 우봉운 여사의 열성과 노력은 일시도 그치지 않아 백여명의 회원을 가진 우리 불교여자계의 유일무이한 기관이 되었다.”


1925년 즈음 조선불교여자청년회는 큰 어려움에 직면했다. 주요사업 가운데 하나였던 능인여자학원의 경영권을 상실하게 된 것. 주된 원인은 재정적 어려움이었지만 김광식 동국대 연구초빙교수에 따르면 당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총무원이 교무회에 편임됨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우봉운은 능인여자학원을 되살리기 위해 중앙교무회 평의원회의에 진정서를 제출했으나 성과는 없었고, 이후 조선불교여자청년회 활동은 급격히 침체된다. 능인여자학원을 떠난 이후에도 우봉운은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조선여성동우회와 경성여자청년동맹의 발기인에 이름을 올렸고, 1927년 창립한 근우회에서도 집행위원 등 간부급 인사로 활동한다.


이 시기 우봉운은 여성운동에 매진하는 한편으로, 무엇보다 참선 수행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고 있다.


1930년 안국동 선학원 참선 수행조직으로 남녀선우회가 결성되는데, 우봉운은 이 중 여성재가불자들의 모임인 부인선우회의 간부로 활동했다. 부인선우회는 하안거, 동안거 수행에도 동참하는 등 스님들 못지않게 대단히 열정적으로 수행하는 단체였다. 스님들도 부인선우회의 수행공간을 선방이라 부르는 등 여성의 수행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특히 만해 스님은 부인선우회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자주 설법을 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여성불자들은 염불과 기도를 통해 신행생활을 하는 것이 대체적인 흐름이었던 만큼, 참선을 기본으로 한 부인선우회의 용맹정진은 이례적인 관심을 모았다. 기복으로 흐르던 여성불교가 선불교와 만나는 구심점이 바로 부인선우회였던 셈이다. 부인선우회의 강령이 단체의 성격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부처님의 정신을 체달하여 자선을 선포실행하며 부인들을 인도하고 견성성불하기로 한다.”


깨달음을 궁극적인 목표로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자선활동과 포교 등 실천행에 나서겠다는 다짐이다. 우봉운은 1931년 정기회에서 동포구제사업을 공식 제안하는 등 부인선우회의 대사회적 활동에도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 우봉운의 제안이 만장일치로 받아들여져 현금 7여원과 의복 80점을 모연해 동포구제회에 보시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우봉운이 출가한 전 남편 석호 스님과 지속적인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활동한 시기와 장소가 일치하는 등 점점이 이어지고 있어 눈길을 끈다.


우선 1920년대 초 우봉운이 국내로 들어와 조선불교여자청년회 준비를 하던 시기, 석호 스님 역시 서울의 석왕사 포교당에 머물며 불교청년 운동의 일환으로 강연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조선불교여자청년회가 창립한 1922년보다 1년 앞선 시기, 석호 스님이 안국동 일대에서 선학원 창립에 동참한 기록도 전해진다. 비슷한 시기와 장소에서 불교운동을 이끌던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교류 관계를 유지했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우봉운이 ‘부인선우회’를 조직하고 간부로 활동하던 1930년대 역시 마찬가지다. 부인선우회의 활동기반은 바로 안국동 선학원이었는데, 곧 석호 스님이 활동하던 곳이다. 1930년대 석호 스님은 이곳에서 불교수좌대회 의장으로 조선불교선종 창종을 기해 선서문을 낭독하기도 했다.


물론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기석호 스님의 존재는 어떤 방식으로든 우봉운이 불교여성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굳건한 의지처가 됐을 지도 모를 일이다.


“우봉운 여사는 동아일보사를 다니며 신문 권유원 노릇을 하다가 이마저도 그만두고 안국동 여자 선학원에 거처를 정하고 있었다. 한동안 여사가 스님이 됐다는 소문이 퍼졌으나 그 진위는 알 수 없다.”1930년대 이후 그녀의 삶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단지 1935면 9월 발간된 ‘삼천리’ 잡지에 따르면 불교와 밀접한 여생을 살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근대 불교여성운동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여성불자 우봉운. 그녀가 전개했던 다양한 불교 활동들은 당시 여성불자들의 삶을 크게 변화시켰다. 그녀는 여성들로 하여금 기복불교를 벗어나 당당한 깨달음의 주체로 바로 서게 했으며, 가정이라는 협소한 테두리를 벗어나 민족의 미래를 위한 큰 꿈을 꾸게 했다. 이런 우봉운의 노력은 결과적으로 여성불자의 대사회 참여 및 결집의 원동력이 됐다. 따라서 그녀야말로 우리 시대 여성불교 위상 재고와 사회화의 초석을 다진 선각자라 평할 수 있지 않을까.


송지희 기자 jh35@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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