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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고구려 혜자 스님과 쇼토쿠 태자

기자명 법보신문

일본 최고 사찰서 고구려스님 제사 모시는 까닭은?

섭정이던 태자의 교육담당
사상·이념 확립에 큰 영향
외교정책에도 깊이 관여
‘일본서기’ 성인으로 추앙

 

 

▲쇼토쿠태자는 혜자 스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세 가지 경전의 소를 찬술하는 등 일본 아스카(飛鳥)시대 불교중흥을 이끌었다.

 


일본 최고의 사찰 호류지(法隆寺)의 쇼료인(聖靈院)이란 전각에서는 매년 2월21일 일본인들이 신으로 받들고 있는 쇼토쿠태자(聖德太子)의 제사를 모시고 있다. 그런데 이 날은 쇼토쿠태자뿐만 아니라 고구려 승려 혜자(慧慈)의 제사도 함께 모신다. 둘은 한 해 차이로 같은 날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대단한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우연이 아니었다.


고구려의 승려 혜자(慧慈)는 일본의 스이코(推古)천왕 3년(595)에 왜로 파견되어 20년 동안 체재하였고, 스이코(推古)천왕 대신 섭정했던 쇼토쿠태자의 스승이었던 인물로 유명하다.


그런데 아쉽게도 우리 국내 문헌에는 혜자 스님에 대한 어떤 기록도 없다. 다만 일본서기 등 일본에 남아 있는 기록으로 그의 행적을 더듬어 볼 수 있는데, 일본서기 권22의 내용을 보면 “서기 595년 3월에 고려 승 혜자가 귀화하였다”며 “같은 해에 백제 승 혜총(惠聰)도 왔는데 이들은 불교를 널리 알렸고, 아울러 삼보의 동량이 되었다”고 되어있다. 그리고 이 두 분의 승려는 새롭게 건립된 호코지(法興寺, 훗날 飛鳥寺)에 주석하게 된다.


그러면 일본에서 혜자는 어떤 역할을 했을까? 일본서기를 비롯한 기타 모든 문헌은 스이코천왕의 섭정이었던 쇼토쿠태자의 교육을 담당하였다고 쓰여 있다. 태자는 내전 즉 교육은 혜자에게서 받았고, 외전 즉 유학은 박사 각가(覺)에게서 받았다고도 전해지고 있으나 혜자, 혜총 두 승려 모두 내·외학에 통달해 있었으므로 거침없이 교육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내전 교육에 있어서는 혜자와 혜총 중 혜자가 주교사였을 것이고, 혜총이 부교사 역할을 했을 것이라 짐작된다. 그것은 혜자가 615년에 고구려로 돌아가기까지 20년 동안 태자의 교육을 담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치고문으로서의 역할까지 한 것을 알 수 있다. 즉, 쇼토쿠태자가 사상과 정치이념을 확립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혜자라고 할 수 있다.


쇼토쿠태자는 혜자의 가르침에 힘입어 세 가지 경전의 소(疏)를 찬술하게 된다. 그것이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과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 ‘승만부인경(勝夫人經)’이다. 이러한 경전을 연찬할 때는 법륭사 몽전(夢殿)에 들어가 관음보살 앞에서 행했다고 한다. 그런데 ‘묘법연화경’이나 ‘유마힐소설경’은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도 일찍부터 신봉되었던 경전이기는 하지만 태자가 직접 이러한 삼경을 선택한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먼저 ‘묘법연화경’의 요지는 ‘會三乘 歸一乘’이라고 할 수 있다. 삼승이라 함은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을 가리키는 것이고, 일승은 불승을 말한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일체중생의 근기에는 차등이 있다는 말인데, ‘묘법연화경’에서는 이 삼승의 차별이 회통해서 모두 불타가 될 수 있다고 설하고 있다. 즉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는 불교의 보편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쇼토쿠태자는 사상가적 또는 정치가적 입장에서 이러한 사상을 갖고 있는 ‘묘법연화경’을 통치의 기반으로 삼았을 것이다. 또한 이것을 실천함에 있어서 남녀의 차별이 없고, 승속의 차별도 없다는 것을 유마힐거사와 승만부인을 예로 들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기 위해 ‘유마힐소설경’과 ‘승만부인경’을 선택했을 것이다.


이처럼 혜자가 쇼토쿠태자를 통해 초기 일본불교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혜자라는 고구려 승려가 일본에 왔던 까닭은 성덕태자에게 불교를 가르치기 위해서만은 아니라는 견해가 있다. 혜자는 한·중·일 동양 삼국의 역사 속에서 정치적으로도 중추적인 역할을 했으리라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충분하다. 우선 혜자가 왜에 체재한 기간이 수(隋)나라의 4회에 걸친 고구려 원정 기간에 해당하고, 더구나 그 시기에 왜가 수나라로 견사(遣使)를 보낸 시기와 겹친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것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왜의 견수사(遣隋使)에 대해서는 중국에 대한 대등한 외교였다고 높이 평가되며, 일본 외교사의 획기적인 일로 자주 강조되기도 하는데, 그 외교의 실행자는 쇼토쿠태자였다고 할 수 있다. 6회에 걸쳐 왜가 견수사를 파견했던 시기는 모두 혜자가 왜에 체재하던 동안의 일이며, 더구나 쇼토쿠태자의 배후에 혜자가 있었다는 점에서, 왜가 수나라와의 외교에서 고자세를 취하게 된 원인은 혜자를 파견한 고구려 영양왕의 의지가 작용하고 있었다는 견해는 설득력이 있다.


이처럼 정치적인 면에서도 큰 영향력을 미쳤던 혜자와 태자의 관계는 매우 돈독했던 모양이다. 특히 두 사람의 깊은 인연관계를 나타내는 일화가 있다. ‘일본서기’에는 이 해의 오월에 죽은 태자의 소식을 고구려에서 전해들은 혜자가 다음해 같은 날에 죽어 정토에서 쇼토쿠태자와 만날 것을 서원하자 그 말대로 되었다고 전해지며, 두 사람이 모두 성인(聖人)이었던 점을 기록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후세인들이 쇼토쿠태자를 성인으로까지 여기게 되는 마음이 짙게 반영되어 있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두 사람의 이별 후에도 그 소식이 동해를 건너 전해졌다는 점에서 혜자가 체재한 20년간 두 사람이 예사롭지 않은 관계였음을 느낄 수 있다. 이 점은 당시 고구려가 20년간 외압에 의해 핍박받던 매우 곤란한 시대였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당시의 고구려가 처해있던 상황을 감안한다면, 고구려의 전략적 외교와 혜자의 왜국 파견은 깊은 관계가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외에도 현재 일본에는 혜자와 쇼토쿠태자를 성인으로 추앙하고 있는 사례가 남아있다. 비록 전설 같은 이야기여서 그다지 신뢰할 수는 없지만, 관련있는 사찰로는 햐쿠사이지(百寺)와 하츠우마데라(初馬寺)를 들 수 있다.


햐쿠사이지는 시가현 히가시오우미시(滋賀東近江市)에 있는 천태종계열의 고찰이다. 사전에 의하면 쇼토쿠태자와 혜자가 와카사(若狹)지역을 여행하다가 만난 백제인을 위해 창건한 고찰로 개창 당시 본존은 태자가 직접 만든 ‘관음상’이었다고 전한다. 또 금당은 백제의 용운사를 모방해서 건축했다고 한다.

 

 

▲일본 최고의 사찰 호류지의 전각인 쇼료인에서는 혜자 스님과 쇼토쿠태자의 제사를 함께 모시고 있다. 20년 동안 교류해왔던 두 사람이 한 해 차이로 같은 날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햐쿠사이지의 연기에 의하면, 혜자와 함께 여행 중이던 쇼토쿠태자가 요카이치시(八日市)의 마을에서 투숙할 때, 매일 밤 동쪽의 산중에서 서광을 보게 되었다. 태자는 혜자에게 그 이유를 물었고, 혜자는 태자를 동쪽의 산 속(현 햐쿠사이지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였다. 숲을 헤치고 들어가자 거대한 삼나무가 위, 아래로 이등분되어 광명을 발하며 서 있고, 그 주위에는 한 무리의 원숭이가 열매를 먹고 있었다. 태자가 이상하게 생각하고 혜자에게 이유를 물었다. 혜자는 이 삼나무 윗부분의 절반이 백제에 옮겨져 용운사 본존 11면관세음보살상이 되었다고 답했다. 그 곳에서 태자는 나무의 밑 절반에 11면관세음보살상을 조각하기 시작하였다. 태자가 처음으로 칼을 잡은 날(入刀日)이 스이코 14년(606) 10월 21일 이었다고 ‘사찰연기’에 기록되어 있다.


또 다른 사찰은 미에현 쓰시(三重津市)에 있는 진언종어실파(言宗御室派)의 사원인 하츠우마데라이다. 이 사찰의 본존은 쇼토쿠태자가 42세 액년의 해(612)에 직접 조각한 액막이 관음이었다고 전한다. 그 해 태자는 동쪽에 사천왕사를 건립하기 위해 이 지역에 오게 되었는데, 갑자기 수도에서 온 사신이 태자의 모친과 비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전한다. 곤혹스러웠던 태자가 혜자에게 상담하자, 혜자는 “마두관음상을 조각해 가람의 북동쪽에 안치하면 재난으로부터 법을 지킬 수 있다”고 교시하였다. 그 자리에서 태자는 칼을 꺼내어 이 사찰의 본존불을 조성하고, 혜자와 혜총에 대일여래와 아미타여래를 조각해 안치하게 한다. 그리고 나라 호코지의 센토쿠(善德)승정을 초대해서 액난 제거법을 베풀게 하니 태자와 가족의 병이 치유되었다고 한다. 이에 스이코 26년(618)에 이 지역에 사천왕사도 준공될 수 있었다고 전한다.

 

▲임석규 실장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혜자 스님은 단순한 전법승이 아니고 급박했던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중요한 외교적 역할도 수행한 인물이다.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정치적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혜자는 승려였기 때문에 그의 정치적이고 외교적인 역할과는 별도로 20년이라는 긴 일본 생활 속에서 앞의 두 사례와 같은 이야기들도 남기고 있다. 모두 태자가 곤경에 빠졌을 때 지혜로운 교시를 주었다는 내용이다. 이런 정황들로 미루어 혜자 스님이 쇼토쿠태자와 더불어 성인으로 추앙받았다는 ‘일본서기’의 기사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임석규 불교문화재연구소 연구실장  noalin@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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