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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작자미상, ‘석가모니고행상’/ 양해, ‘석가출산도’

기자명 법보신문

고행으로는 다다를 수 없었던 해탈의 세계

 

▲작자미상, ‘석가고행상’, 인도 라호르박물관.

 

 

라자그라하를 떠나 서남쪽으로 향한 사문 고타마는 고행림(苦行林)으로 들어갔다. 고행림은 우루벨라의 가야산에 있었다. 고행을 수행법으로 선택한 수행자들이 찾는 장소였다. 고행은 명상과 함께 당시 수행자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수행법이었다. 사문 고타마도 고행을 택했다. 명상이라면 이미 최고의 선인이었던 알라라 칼라마와 웃다카 라마풋타를 통해 그들의 경지까지 가봤기 때문이다.


고행림에 들어 온 사문 고타마는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시도해 본 적이 없는 모진 고행을 시작했다. 가시덤불 위에 눕기도 하고 쇠못을 박은 판자 위에 눕기도 했다. 거꾸로 매달리기도 하고 양다리를 엇갈리게 한 후 무릎을 세우고 앉기도 했다. 한여름 지글거리는 뙤약볕에 몸을 태우기도 하고 한겨울 추위 속을 맨몸으로 지내기도 했다. 호흡을 멈춘 채 온 몸이 터져버릴 것 같은 고통도 느껴봤다.


사문 고타마는 음식을 점점 줄여 나가는 감식(減食)을 수행했다. 쇠똥을 먹기도 하고 참깨 한 알과 쌀 한 톨만으로 견뎠다. 때론 음식을 전혀 먹지 않는 단식(斷食)도 결행했다. 감식과 단식이 거듭될수록 사문 고타마의 몸은 쇠약해졌다. 피골이 상접했고 정수리에 종기가 생겨 가죽과 살이 떨어져 나갔다. 머리는 부서진 호리병 같았고, 눈에는 별이 어른거렸다. 몸은 부서진 수레처럼 허물어졌고 엉덩이뼈는 낙타의 다리 같았다. 손으로 배를 만지면 등뼈가 잡혔고 등을 만지면 뱃가죽이 잡혔다. 피부 색깔은 바래 잿빛이나 검은빛이었다. 살아 있으되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지나가던 아이들이 콧구멍과 귓구멍을 찔러 보며 장난을 할 때도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와서 보고는 침을 뱉고 오줌을 누기도 했다. 사문 고타마는 마음의 흔들림 없이 꿈쩍하지 않고 고행을 계속했다. 그렇게 6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사문 고타마는 아무런 이익도 얻지 못했다. 위없는 깨달음은 더더욱 얻지 못했다.

 

밥 한 끼의 절실함

 

몇 년 전에 단식을 했었다. 열흘 동안 오로지 물만 마시면서 굶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하루 세 끼를 준비하지 않아도 되니 편하고 좋았다. 아침 먹고 점심, 점심 먹고 저녁, 하던 일과가 사라지자 하루가 온통 나의 것이었다. 이번 기회에 차분하게 책이나 봐야지 생각했다. 책을 펼쳤다. 정신은 맑은 물에 씻어낸 듯 개운했다. 세상에 대한 욕심이 사라지면서 전에 없던 너그러움까지 생겼다. 단식하기를 참 잘 했다. 나도 이제부터 스콧 니어링처럼 일 년에 한 번씩 단식을 해야지. 마지막에 떠날 때는 스스로 곡기를 끊고 자주적으로 생을 마무리해야지. 이런 품위 있는 생각들이 줄을 이었다.


품위 있는 생각은 딱 하루 굶는 것으로 끝났다. 아침을 굶고 점심을 굶고 저녁까지 굶었을 때였다. 책을 보고 있는데 비빔밥이 번개처럼 스쳐갔다. 다시 책을 보고 있는데 짜장면 냄새가 사람을 홀리듯 흘러나왔다. 잠시 후에는 된장찌개가, 또 잠시 후에는 칼국수가, 북어국이, 콩나물, 시금치, 감자볶음, 미역무침이 연속적으로 눈앞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된장찌개를 생각하면 구수한 된장냄새가 진동을 했다. 칼국수를 생각하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칼국수가 눈앞에 금세 나타났다. 홀로그램 같았다. 집에서는 음식을 차린 적이 없는데 모두 생각이 만들어낸 맛과 냄새였다. 삼매(三昧)에 들기 위해서는 화두를 간절하게 들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나는 완전히 삼매에 들었다. 그렇게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간절함이라니. 먹고 싶다는 생각이 나를 먹어 치운 것 같았다.

 

 

▲양해, ‘석가출산도’, 중국 송, 13세기, 비단에 색, 117.6×51.9cm, 일본 도쿄 국립박물관.

 


인터넷에 올라온 음식관련 블로그는 전부 검색해서 저장했다. 신문과 함께 배달된 맛집 소개 전단지는 귀한 보물처럼 모았다. 내가 언제 입맛이 없다고 했던가. 내가 언제 고민 때문에 식욕이 없다고 했던가. 전부 엄살이었다. 진짜 밥을 굶어본 적 없이 입버릇으로 한 소리였다. 내게 밥 한 끼는 그토록 절실하고 강렬한 욕구였다. 밥만 먹을 수 있다면 어떤 것이라도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흘 굶어 도둑질 안하는 사람 없다는 속담을 몸으로 배웠다. ‘밥그릇 싸움’이라는 표현이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진짜 밥그릇을 놓고 서로 먹기 위해 끌어당기는 싸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이 정도로 먹을 것에 집착하고 살았던가. 눈이 감기고 기운이 없는 것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이 먹는 것에 대한 집착이었다. 겨우 열흘의 시간이 내게는 십 년만큼이나 아득했다.


그런 고행을 사문 고타마는 6년이나 계속했다. ‘석가고행상’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만 진정성을 가르쳐준다는 점에서 아름다운 작품이다. 움푹 들어간 눈과 불거진 광대뼈, 머리를 받쳐주는 목뼈와 방패 같은 갈비뼈는 살갗이 덮여 있어 사람일 뿐 살아있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다. 해부학 책에서나 볼 수 있는 뼈의 구조가 그대로 노출돼 있다. 그런데도 사문 고타마는 육체 따위는 내 알바 아니라는 듯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결가부좌한 자세로 두 손을 모은 채 깊은 선정에 잠겨 있다. ‘석가고행상’이 보는 사람을 숙연하게 만든 것은 바로 이 지독한 구도열 때문이다. 사문 고타마는 굶주림을 체험하기 위해 굶는 것이 아니라 수행의 방편으로 굶는 중이다. 그러니 굶주림은 빨리 벗어나야 할 장애가 아니라 더 큰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꼿꼿하게 앉아 있는 자세가 수행자의 단호함을 반영한다.

 

인도 간다라불상의 백미

 

사문 고타마의 구도열이 경이롭다면 ‘석가고행상’은 감동적이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수행자의 모습을 경전에 언급된 몇 줄의 묘사만으로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작품을 만들었다. 작가가 곧 수행자 같다. 이런 위대한 작품은, 단순히 작가의 예술적인 상상력이 뛰어나서 만들 수 있었다고 간단히 평가해 버리면 너무 인색하다. ‘석가고행상’은 재주로 빚은 작품이 아니다. ‘석가고행상’을 만든 조각가는 분명히 고행 당시의 사문 고타마를 영적(靈的)으로 만났을 것이다. 어쩌면 그도 사문 고타마와 같은 굶주림과 피로와 고통을 느꼈을지 모른다. 수행자와 예술가는 같은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다. 다만 산을 오르는 길이 다를 뿐이다. ‘석가고행상’은 이름을 남기지 않은 무명씨의 혼이 만든 작품이다. 예술작품에 영성(靈性)이 깃들인다는 표현은 이런 작품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인도 간다라 불상의 백미다.


사문 고타마는 결국 고행림을 나왔다. 6년 동안 고행을 극한까지 밀고 나갔지만 고행으로는 해탈의 세계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양해(梁楷:13세기 전반)가 그린 ‘석가출산도(釋迦出山圖)’는 사문 고타마가 막 고행림을 나서는 모습에 주목했다. 겨울인가. 아니면 해탈에 이르지 못한 출가 사문의 마음 세계를 표현한 걸까. 빠른 필치로 그린 나뭇가지가 거칠고 황량하다. 사문 고타마가 걸어 나온 고행림은 추상화처럼 애매하게 처리했다. 거대한 암벽을 세워놓은 것 같다.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한 암벽은 6년 동안 온갖 고행을 다해봤지만 결코 열리지 않은 깨달음의 세계처럼 완강하다. 왼쪽 바위는 고목의 배경이고, 오른쪽 바위는 수행자의 배경이다. 수행자의 배경이 된 바위는 힘없이 뒤로 물러나 있고, 고목의 배경이 된 바위는 수행자를 덮칠 듯 기우뚱하다. 한겨울 침묵에 잠긴 고목에서는 도통 새싹이 돋아날 것 같지 않다. 사문 고타마에게도 봄은 오늘 걸까. 맨발 차림의 수행자는 표정이 어둡다. 오랜 수행으로 쇠약해져 겨우겨우 내딛는 걸음걸이가 맛문하다. 심하게 주름진 가사만이 수척한 몸을 감싸줄 뿐이다. 그러나 아무리 무거운 바위라도 수행자의 고귀한 영혼을 짓누르지는 못할 것이다. 결연한 눈빛이, 꼭 다문 입술이 사문 고타마의 의지가 확고함을 말해준다. 비록 고행림을 나왔지만 그곳에서 보낸 6년 세월이 전혀 의미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해 볼 만큼 해봤기 때문이다. 해보지 않았더라면 미련과 아쉬움이 남았을 지도 모른다. 할 만큼 했으니 이젠 됐다. 고행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충분히 검토했으니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중국 남송(南宋)대는 선종화(禪宗畵)가 특히 발달했다. 남송화원의 대가였던 양해는 감필법(減筆法)을 사용한 선종화와 인물화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감필법은 최소한의 필선으로 대상의 정수를 간략하게 묘사하는 기법이다. 선승화가(禪僧畵家)들이 즐겨 그린 기법으로 절제된 필묵이 장점이다. 양해의 대표작 ‘이백행음도(李白行吟圖)’는 시선(詩仙)이라 불리는 이백(李白)이 시상(詩想)에 잠긴 모습을 그린 감필화인데 시인의 자유로운 영혼의 세계를 대담한 필치로 형상화한 걸작이다.

 

▲조정육

수척한 고행승의 모습을 세밀한 필치로 그린 ‘석가출산도’는 감필법으로 그린 ‘이백행음도’와는 전혀 다르다. 한 작가의 손에서 이렇게도 다양한 표현이 가능할 수 있을까, 놀라울 정도로 두 작품 세계의 표현법은 다르다. 후대의 많은 화가들은 양해의 인물화법을 추종했다. ‘석가출산도’만으로도 후배 화가들의 심정을 이해하기에 충분하다.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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