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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나혜석

가부장적 관습에 맞서 여성 주체적 삶 부르짖었던 선각자

일제강점기 신여성의 대명사
일본 유학시절 인권에 눈떠
남녀 평등·여성 해방 주창


이혼 후 사회적 냉대에 봉착
행려병자로 비참한 죽음 맞아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1948년 12월10일 저녁 8시30분. 신원불명의 한 여성이 서울의 어느 병원에서 외로이 죽음을 맞았다. 곁을 지키며 애도하는 이는 없었다. 그녀는 무연고 행려병자로 거리를 떠돌다 한달전 입소했다. 그 당시 이미 중풍에 영양실조, 기타 등등의 합병증이 겹쳐 생사를 가늠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녀의 죽음은 간략한 내용으로 관보에 게재됐으나, 정작 그녀가 누구인지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름과 주소, 연락처 등 신원을 증명할 그 어떤 정보도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행려병자, 실어증 중풍환자, 무연고, 신원불명 등이 당시 그녀를 지칭하던 수식어의 전부였다.


한 행려병자의 죽음. 이 초라하고 애처롭기까지 한 죽음은 바로 한국 최초의 여류서양화가 나혜석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 사실은 그녀가 죽은 뒤 30년이 흐른 뒤에야 나혜석의 일대기를 쓴 작가 정을병에 의해 비로소 확인돼 세간에 놀라움을 전했다.


나혜석(1896~1948). 그녀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성이었다. 행려병자의 비참한 죽음을 연상하기에 그녀의 삶은 너무나도 화려하고 빛이 났다. 무엇을 하든 여성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빼어난 미모에 당돌한 태도, 빛나는 지성과 달변은 그녀를 더욱 특별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한국 첫 여류서양화가인 동시에 언론인이자 사상가, 또 사회활동가, 작가, 시인이었다.


무엇보다 나혜석은 남성 중심 사회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던진 여성운동가였다. 여성도 남성과 대등하게, 인간으로써 주체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외쳤고, 또한 그런 삶을 살고자 몸부림쳤던 여성이었다. 그녀는 여성의 인권과 자유연애, 남녀차별의 부당성, 근대적 여성상에 대해 다양한 글을 쏟아내며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녀는 당시 가부장적 사고와 남존여비 사상이 팽배했던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사회적 편견과 잣대에 맞서 당당히 여성의 목소리를 드높인 실천가였으며, 근대적 신여성의 표본을 만들어나가는 선각자였다.


나혜석은 모든 면에서 남달랐고 특별했다. 여학생 자체가 드물었던 시절, 그녀는 진보적인 성향의 아버지 덕에 삼일여학교와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다니며 누구보다 빠르게 근대식 교육을 접했고 두각을 드러냈다. 학업성적은 1등을 놓치지 않았으며 학급 반장도 도맡았다. 졸업할 때는 ‘매일신보’에 최우등 수석 졸업생으로 사진까지 실릴 정도로 유명세를 떨쳤다. 졸업 후에는 일본으로 떠나 도쿄 여자미술대학 유학과에 입학해 서양화를 공부했다. 당시 서양미술을 정식으로 배운 첫 번째 조선 여성일 뿐 아니라, 남자까지 통틀어도 다섯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 그녀의 행보가 얼마나 특별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일본 유학시절, 그녀는 여성인권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본격적인 여성운동가의 길을 걷는다. ‘세이토’라는 페미니스트 잡지와 입센의 ‘인형의 집’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국내외 잡지 등에 각종 글을 기고하며  여성해방론에 가까운 남녀평등을 주장했다. 1914년부터 국내외 잡지에 실린 글들이 여성의 삶에 대한 그녀의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현모양처는 여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해 부덕을 장려한 것이다. 그렇게 좋은 것이라면 왜 양부현부는 없는가.”


“여자도 인간임을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여자도 남자와 똑같은 교육을 받고 인간답게 살 권리를 누려야 한다.”


다른 여성과 차별되는 신여성의 면모에 뛰어난 외모와  지성과 언변, 사상 등 모든 면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그녀는 그야말로 당대를 대표하는 신여성이자 어디서나 돋보이는 스타 중의 스타였다.


이처럼 파격적인 사상을 가진 나혜석이었지만 자신의 생각과 집안의 전통적인 가치관이 충돌하면서 난관을 겪기도 했다. 공부를 그만두고 돌아와 시집을 가라는 아버지의 요구 때문이었다. 당시 그녀는 둘째오빠의 친구 최승구와 열애 중이었다. 고민하던 나혜석은 결국 아버지의 명령을 거부, 가부장적인 전통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다. 여성으로서 주체적 삶을 살아가겠다는 최초의 실천적 선언이었던 셈이다. 아버지는 당장 학비 송금을 중단했다.

 

나혜석은 휴학을 하고 1년간 여주에서 여학교 선생을 하며 학비를 모아 복학했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혜석은 아버지의 강요를 이기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이후 연인 최승구가 지병인 결핵으로 죽으면서 크나큰 충격을 받는다. 이 일을 계기로 그녀는 자신의 삶에 대한 명확한 신념을 갖게 된다. 바로 여성도 삶의 주체로써 당당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깨달음이자 자기 확신에 다름아니었다.


나혜석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여성인권을 억압하는 봉건적 관념을 비판하고 여성이 스스로 자각해야 한다는 계몽적 글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신교육을 받은 여성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에 대한 모범적 사례를 담은 소설 ‘경희’를 발표한데 이어, 각종 인터뷰와 기고문을 통해 “조선 여자도 사람될 욕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혼도 파격적이었다. 나혜석은 1920년 10살 연상의 법학도 김우영과 결혼했는데, 결혼의 조건으로 남편에게 제시한 4가지 요구로 숱한 화제를 뿌렸다. 조건은 평생 지금처럼 사랑할 것, 시어머니와 함께 살지 않을 것,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않을 것, 전 애인 최승구의 비석을 세워줄 것 등이었다.


여자가 결혼에 조건을 단다는 것도 상상할 수 없었던 당시로써는, 조건 하나하나가 말 그대로 기절초풍할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김우영은 나혜석의 근대성을 높이 평가하던 사람이었다. 조건을 그대로 수용하고 신혼여행으로 최승구의 묘지를 찾아 함께 비석을 세웠는데 이후 소설의 소재로 사용될 만큼 널리 회자됐다.


남편의 전폭적인 지지 덕분인지 그녀는 결혼 후 전성기를 맞는다. 결혼 이듬해 9개월 만삭의 몸으로 개인전을 개최했는데 이틀간 5000여명의 인파가 몰려들었으며 전시된 70여개의 작품이 모두 고가로 낙찰됐다. 이 개인전은 서울에서 열린 최초의 유화전이었다. 이후 그녀는 매년 조선미술전람회 수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작품성을 국내외로 인정받으며 서양화가로 승승장구했다.


그러던 1927년 나혜석은 또 한번의 놀라운 결단을 내린다. 미국과 유럽 시찰에 나선 남편을 따라 구미 여행길에 오른 것이다. ‘조선 최초로 유럽 여행을 떠난 여성’이라는 수식어 하나가 더 보태졌다. 아이 셋은 시어머니에게 맡겨둔 채였다. 그녀는 특히 파리의 매력에 푹 빠졌다. 남편은 독일로 떠나고 그녀는 파리에 홀로 남아 야수파 화가 비시에르 화실에 다니며 그림공부에 열중했다. 서너달 예정됐던 여행은 점점 길어져 급기야 1년8개월로 늘어났다. 그녀 인생의 최고 전성기라 할 만큼 정신적으로 풍요롭고 자유로운 시절이었다.


그러나 불행의 씨앗은 가장 행복한 순간 싹트는 법. 이 시기 만났던 천도교 교령 최린과의 염문설이 그녀를 파탄으로 몰아넣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파리를 관광하며 많은 시간을 함께했는데 이 사실이 호사가들의 입을 통해 일파만파 퍼져나가면서 이혼의 빌미가 됐다. 가정의 불화는 남성보다 여성에게 치명타였다. 특히 이혼은 여류화가로 명성을 드높이던 나혜석의 발목을 잡아 묶었다. 불륜의 꼬리표를 단 그녀를 향한 사회적 시선은 몹시도 냉혹했다. 모두가 그녀를 손가락질했다. 세 아이를 빼앗기고 빈털터리로 물러난 그녀에게 남은 것은 그림, 그리고 세상을 향한 분노였다.


그러나 나혜석은 굴복하지 않고 또다시 세상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낸다. “혼인 후 이성과의 교류는 진보된 사람의 행동”이라는 글을 발표한 것. 그녀는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것도 아니며 오직 취미”라고 주장했으며 자신의 아내와 누이, 딸은 순결하길 바라면서 남의 여자에게는 흑심을 품는 한국 남자들의 이중성을 맹렬히 비판했다. 그녀는 특히 ‘이혼고백서’라는 글을 통해 이혼 과정에서 보인 남편의 불합리성과 이기성을 낱낱이 비난하고, 자신을 버린 최린을 정조유린죄로 고소해 합의금을 받아내는 등 놀라운 행보를 보였다.


그러나 그녀가 분노할수록 세상 사람들은 나혜석에게서 더욱더 등을 돌렸다. 사생활을 이유로 미술전람회 입상을 박탈당했으며 경제적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문을 연 미술강습소 역시 철저히 외면당했다. 자식을 향한 한없는 그리움도 그녀를 고통스럽게 했다. 사람들의 냉대 속에 나혜석은 나날이 피폐해져갔다.


절망의 끄트머리에서 그녀가 의지한 것이 바로 불교였다. 나혜석은 이혼 후 해인사, 범어사, 도솔암 등 사찰들을 떠돌다 수덕사 아래 수덕여관에 짐을 풀고 5년간 머물렀다. 당시 수덕사에는 동갑내기 절친한 친구 김일엽이 출가 수행자가 되어 머물고 있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일엽 스님의 주선으로 만공 스님을 만나 출가를 요청하지만 “출가할 그릇이 아니다”며 거절당했다고 전해진다. 한편으로는 만공 스님이 출가를 권했지만 자식에 대한 그리움과 세속을 향한 미련으로 스스로 출가를 거부했을 것이란 시각도 있다.


어찌됐던 나혜석은 이곳에 머물면서 불교에 깊이 귀의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덕사 법당에 올라 간절한 기도를 올렸으며 종종 일엽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의 고통을 덜어냈다. 그림을 통해 세상과의 교류도 이어졌다. 당시 수덕여관에는 그림에 열정을 가진 청년들의 발길이 잦았는데 고암 이응로가 그녀의 대표적인 수제자다.


나혜석은 자식들을 향한 그리움에 사무쳐 눈물 짓는 날이 많았다. 그녀의 아들 김진 전 서울대 교수가 회고록에 남긴 바에 따르면, 중학교 시절 남루한 옷차림의 늙은 여인이 불쑥 나타난 적이 있는데 그가 바로 나혜석이었다. 일엽 스님의 아들 김태신(일당 스님)은 수덕여관의 나혜석을 또 다른 모정으로 기억했다. 속세 인연을 끊고 수행자가 된 어머니 일엽 스님이 냉혹하게 내치면 그는 서러움에 목매여 수덕여관으로 발길을 돌렸고, 나혜석은 그를 마치 자식처럼 다정하게 품어줬다. 어쩌면 자식을 향한 애틋한 모정이 세속을 향한 그녀의 마지막 미련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수덕여관을 끝으로 그녀의 행적은 더 이상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행려병자로 죽음을 맞았을 때, 실제 나이보다 10여살 많게 기록돼 있었다는 점에서 그녀의 마지막이 얼마나 고됐을지 짐작이 가능하다.


신여성의 대명사로 그 누구보다 화려한 삶을 살다, 끝없는 내리막길 속에서 결국 행려병자로 삶을 마감한 나혜석. 인생의 화려함을 기억 저편에 간직한 채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한 그 순간, 그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혹여 지난 삶에 후회나 원망은 없었을까. 평범한 여성의 삶을 살았더라면 그녀의 마지막은 완전히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회적 관습의 불합리와 불평등에 정면 돌파하며 주체적이고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했던 나혜석. 마치 불꽃과도 같았던 그녀의 도전적 삶은 지금까지도 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송지희 기자 jh35@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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