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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강희언, ‘사인사예’/김홍도, ‘활쏘기’, ‘빨래터’

기자명 법보신문

“고행으로는 얻을 수 없었던 깨달음…중도의 길을 찾다”

 

▲강희언, ‘사인사예’,(사인삼경 중), 종이에 담채, 26×21cm, 서울 개인.

 

 

세 명의 선비가 활을 쏘기 위해 냇가에 나왔다. 시원한 소나무 그늘에서 자리를 잡고 시합을 시작한다. 숨을 멈추고 막 시위를 당기려는 선비는 온 몸이 팽팽하게 긴장돼 있다. 등을 보인 선비는 허리춤에서 새로 활을 빼고 있고, 앉아 있는 선비는 활에 활시위를 걸고 있다. 저 멀리 계곡 상류에서 방망이로 빨래를 두드리는 여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일과 놀이가 한 공간에서 진행되지만 같은 공간에 있어도 서로가 무관심하다. 활 쏘는 선비는 선비대로, 빨래하는 여인들은 여인네대로 따로 논다. 선비와 여인은 그저 한 공간에 있다는 것 뿐 그들 사이에 어떤 유기적인 연관성도 발견할 수 없다. 담졸(澹拙) 강희언(姜熙彦:1738-1784년 이전)은 두 그룹을 한 화면에 배치해야 하는 필연성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어쩌면 심각한 고민 없이 자신이 직접 눈으로 본 풍경을 솔직하게 그리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인사예도(士人射藝圖)’는 강희언이 살았던 시대의 풍경을 짐작하기에 적합한 작품이다.


강희언의 ‘사인사예도’는 선비들이 활쏘기를 하는 장면을 생생하게 보여준 풍속화다. 사예(射藝)는 선비가 갖춰야 할 육예(六藝:禮, 樂, 射, 御, 書, 數)의 하나로 활쏘기를 의미한다. 강희언이 여러 운동 중에서 굳이 활쏘기를 선택한 것은 자신들이 비록 신분상으로는 중인(中人)이지만 그들 역시 공맹(孔孟)의 학문을 따르는 유자(儒者)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사인사예도’는 세 폭짜리 ‘사인삼경도(士人三景圖’ 중의 한 작품이다. 다른 두 작품은, 선비들이 글씨 쓰고 그림 그리는 ‘사인휘호도(士人揮毫圖)’와 선비들이 시를 읊는 ‘사인시음도(士人詩吟圖)’인데 역시 중인들의 문무예(文武禮)를 보여주기 위한 의도로 제작됐다.


사인(선비)들의 풍속장면은 고려시대 때 모임 장면을 그린 ‘계회도(契會圖)의 유행과 함께 제작되어 조선시대로 이어졌다. 양반을 중심으로 제작되던 사인풍속화는 18세기 후반에 새로운 문화담당자로 부각되기 시작한 중인들에 의해서도 제작됐다. 강희언의 ‘사인삼경도’가 대표적이다. 강희언은 당시 중인으로 고화고동(古畵古董)의 대수장가였던 석농(石農) 김광국(金光國:1727-1797)과 교유가 있었다. 김광국은 의과(醫科) 출신 기술직 중인으로 중국에도 다녀올 정도로 재능을 인정받아 공사(公私)적 의료 활동과 약재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김광국은 넉넉한 부(富)와 뛰어난 감식안으로 많은 작품을 소장했다. 그의 소장품은 국내와 중국 작품을 비롯해 네덜란드 판화와 18세기 일본 ‘미인도’까지 관심의 폭이 넓었다. 당시 중인들의 문화 활동의 폭이 이러하다.

 

 

▲김홍도, ‘활쏘기’(풍속화첩 중), 종이에 연한 색, 27×22.7cm, 국립중앙박물관(좌), 김홍도, ‘빨래터’(풍속화첩 중), 종이에 연한 색, 27×22.7cm, 국립중앙박물관(우).

 

 

김홍도, 강희언의 작품을 보고 영감을 얻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강희언의 ‘사인사예도’를 보고 영감을 얻은 김홍도(金弘道:1745-1718년 이전)가 한 작품을 두 개의 주제로 분리해 그렸다는 점이다. 김홍도보다 7살 많은 강희언의 ‘사인사예도’는 누가 봐도 무릎을 칠 정도로 충분히 재미있는 작품이다. 재미있지만 김홍도는 조금 아쉬움을 느꼈다. 왠지 주제가 분산된 듯한 느낌이었다. 강희언의 ‘사인사예’가 실제 현실을 더 정확하게 묘사했을지 모르지만 계곡 상류에서 빨래하는 여인들은 활쏘기와 전혀 상관없는 풍경이다. 그저 주변 환경을 보충해주는 부가적인 요소일 뿐이다. 그림은 있는 그대로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종이 한 장에 세상의 모든 풍경을 한꺼번에 다 담을 수는 없다. 그림 속 세상은, 세상의 연장선이 아니다. 화가는 사각의(혹은 원형의) 틀 안에 자신의 설정한 세상을 압축시켜 넣어야 한다. 그림에서 완결성이 중요한 것은 그림 틀 안에 담겨있는 부분만큼만 세상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구구절절이 설명하는 것은 김홍도 방식이 아니다. 간략하면서도 주제를 부각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오랜 고민 끝에 김홍도는 강희언의 ‘사인사예’를 두 개의 주제로 나눴다. 주제가 다른 만큼 독립된 작품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활쏘기’와 ‘빨래터’다. 김홍도에게는 실제 풍경보다 자신이 창조한 화면 속 세상이 더 중요했다. 강희언의 ‘사인사예’가 단순한 풍속화라면, 김홍도의 ‘활쏘기’와 ‘빨래터’는 풍속화이면서 단일한 주제가 돋보이는 수작이다. 김홍도의 ‘활쏘기’와 ‘빨래터’는 현실을 그렸으면서도 매우 추상적이다. 김홍도는 배경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하다. 움직이는 사람만이 중요하다. 배경은 오직 주제에 필요할 때만 그려 넣었다. 불필요한 부분은 과감하게 생략했다. ‘빨래터’에 냇가를 그려넣은 것은 빨래하는 여인들이 행동하는 근거지로 배경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여인들을 훔쳐보고 있는 부채 든 남자 뒤쪽은 빈 공간으로 남겼다. ‘활쏘기’에는 그마저 배경도 없다. 장소에 대한 최소한의 안내도 없이 오직 인물만 그렸다. 덕분에 감상자는 아무런 방해 없이 인물에 집중할 수 있다. 전혀 다른 곳에 신경쓰지 않으면서 ‘이봐. 활은 어깨로 쏘는 게 아니야. 허리힘으로 쏴야 해’하면서 초심자의 어깨를 툭툭 치는 교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김홍도의 작품은 강희언의 작품에서 힌트를 얻었지만 오로지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해 전혀 새로운 작품을 창조해냈다. 다른 작가의 작품을 일방적으로 모방하면 아류다. 다른 작가의 작품에 자신의 사상과 의지를 담아내면 비슷해도 독창적이다. 김홍도의 ‘활쏘기’와 ‘빨래터’는 청출어람이다.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다. 김홍도의 ‘활쏘기’와 ‘빨래터’를 보고 강희언이 ‘사인사예도’로 꿰맞춰 그린 경우다. 조금 아득해진다. 강희언의 스타일은 살아 있으되 청출어람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다.


그런데 과연 김홍도는 강희언의 ‘사인사예’를 직접 봤을까? 두 사람의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남아 있다. 대수장가 김광국과 함께 서화감상으로 소일하면서 운치 있는 생활을 한 마성린(馬聖麟:1727-1798이후)은 그의 책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별제 김홍도, 만호 신한평, 주부 김응환, 주부 이인문, 주부 한종일, 주부 이종현 등 유명한 화사들이 중부동 감목관 희언의 집에 모였는데 공사(公私)의 수응(酬應:남의 요구에 응함)에 볼만한 것이 많았다. 나는 본래 그림을 좋아하는 버릇이 있어 봄부터 겨울까지 드나들었으며 감상을 하기도 하고 혹은 화제(畵題)를 쓰기도 했다.”

 

신한평은 신윤복의 아버지다. 김응환은 산수화로 이름을 날렸고 이인문은 ‘강산무진도’를 남긴 작가다. 이들은 모두 ‘유명한 화사들’로 도화서 소속 화원(畵員)이었다. 두 사람뿐 아니라 여러 명의 기라성 같은 화원들이 함께 어울려 작업했다. 그런데 강희언은 특이하게 화원이 아니라 감목관(監牧官)이다. 감목관은 운과(雲科)에 소속된 관직명으로 천문(天文), 지리학(地理學), 측후(測候) 등을 관장하기 때문에 관상감(觀象監)이라 부른다. 농업이 주업이었던 조선시대 때 관상감은 매우 중요한 부서였다. 감목관인 강희언이 화원들과 친하게 된 것은 이전에 조지서(造紙署)에 근무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조지서는 종이를 공급하는 관청이다. 종이를 많이 쓰는 부서인 도화서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을 것이다.


강희언은 감목관이 되기 전부터 그림에 관심이 많았다. 그의 외조부가 시문(詩文)으로 이름을 떨친 정래교(鄭來僑)였다. 강희언을 비롯한 중인 자제들이 모두 정래교에게 교육을 받았는데 그에게서 학생들이 글을 배우고 돌아갈 때면 ‘마치 큰물이 한 골짜기로 흐르는 것처럼 많았다’고 한다. 강희언은 외조부를 통해 진경산수화의 대가 정선(鄭敾:1676-1759)을 만나 그림을 배웠다. 강희언은 고령 신씨 여인과 결혼했다. 그의 장인을 통해 처가쪽과 먼 친척 관계인 신한평을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강희언이 김홍도와 절친했다는 기록은 또 있다. 김홍도가 여행칼럼니스트인 정란(鄭瀾 :1725-1791)과 만난 자리에 강희언이 있었다. 세 사람의 만남은 깅홍도의 ‘단원도’로 그려져 지금까지 그 역사성을 증명하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김홍도가 강희언의 ‘사인사예도’를 보고 영감을 얻었을 거라 추측한다.

 

 

 

▲정선, ‘인왕제색도’, 1751, 윤5월29일, 종이에 연한 색, 79.2×138.2cm, 삼성리움미술관(위), 강희언, ‘인왕산도’, 종이에 연한 색, 24.6×42.6cm, 서울 개인(아래).

 

 

강희언, 정선의 작품을 보고 영감을 얻다


위에서 필자는 김홍도가 강희언의 작품을 보고 영감을 얻었을 거라 얘기했다. 만약 강희언이 김홍도의 작품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면 ‘아득해진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강희언이 스승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보고 영감을 얻어 제작한 ‘인왕산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정선이 76세에 그린 ‘인왕제색도’는 한 여름 긴 장마가 끝나고 맑게 개인 인왕산의 모습을 힘찬 필치로 완성했다. 산자락에서 피어오르는 흰 구름과 검은 색으로 칠한 인왕산이 대조를 이루며 부드러움과 강함, 진한 먹과 연한 먹이 조화를 이루는 정선의 대표작이다. 정선의 인왕산은 과감한 생략과 먹의 대비로 인해 산세(山勢)가 기운생동하다. 정선은 산을 그리되 자신의 느낌을 중시했다. 자연물로 배치된 인왕산이 아니라 자신이 보고 느낀 인왕산이어야 했다. 그는 실경은 실경이되 완전히 자신만의 시각으로 재해석된 풍경을 원했다. ‘인왕제색도’속의 인왕산은 오직 정선의 눈에만 비치는 인왕산이다. 인왕산을 본 날 또한 다른 어떤 날도 아닌 1751년 윤 5월 29일 인왕산 앞에 선 정선의 느낌과 현장감이어야 한다. 그래서 정선의 ‘인왕제색도’는 단순한 풍경화가 아니라 사의적(寫意的)인 풍경화라 할 수 있다.    


강희언은 스승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보고 감동을 받아 ‘인왕산도’를 그렸다. 그러나 그림을 풀어나가는 방식은 사뭇 다르다. 강희언은 자신이 본 인왕산에 감정이 개입되기를 원치 않았다. 그저 자신의 눈으로 본 풍경을 객관적으로 전해주는 것으로 만족했다. 산자락마다 들어 서 있는 사찰과 집과 정원수까지 세밀하게 그려 넣어야 안심이 되는 사람이 강희언이다. 판단은 감상자의 몫이어야 한다. 바위의 무거운 질감을 보여주기 위해 흰 바위를 검게 칠한 스승의 재주는 탄복할만하지만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전달법이 아니다. 강희언의 붓질은 조심스럽다. 그래서 그의 ‘인왕산도’에서는 스승의 작품에서 뿜어져 나오는 ‘포스’가 느껴지지 않는다.


붓을 드는 두 사람의 태도는 옳고 그름의 잣대로 평가할 수 없다. 개성의 차이이자 성격의 반영이다. 정선이 과감하고 거침없다면 강희언은 신중하고 조심스럽다. 정선이 대상을 왜곡, 축소, 과장을 해서라도 자신의 감동을 전해주고자 했다면, 강희언은 감동이 부족하더라도 대상을 정직하고 객관적으로 전달해주고자 했다. 그것이 그림 그리는 자의 임무라 생각했다. 이것이 필자가 강희언의 ‘사인사예’를 보고 김홍도가 ‘빨래터’와 ‘활쏘기’를 그렸을 것이라 판단한 이유다. 강희언은 아무리 자기방식이 옳다 해도 남의 작품을 함부로 분리하고 조합해서 자기화할 수 있는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다. 이것이 어쩌면 김홍도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는 강희언의 한계였는 지도 모른다.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


사문 고타마는 6년 동안 온갖 고행을 다 해봤으나 고행으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행림을 나서는데 문득 어린 시절 농경제 때의 기억 한토막이 스쳐 지나갔다. 양육강식의 현장을 보고 충격 받은 태자가 홀로 숲 속에 들어가 고요히 명상에 잠겼던 추억이었다. 그 때 태자는 특별히 고행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짧은 시간 내에 내면 깊숙이 침잠해 들어가 정신적으로 높은 단계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바로 이거다, 싶었다. 내가 지금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고행하는 것이 목적이 아닌 만큼 몸도 마음도 가장 평온한 상태에 있을 때 자신이 원하는 세계에 가 닿을 수 있지 않은가. 육체는 도구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몸이 필요하다. 몸은 채찍질해서 학대하는 대신 몸을 가진 인간이라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알맞은 조건을 갖춰줘야 한다. 지나친 쾌락도 지나친 고행도 깨달음을 얻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방법을 따라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사문 고타마는 중도를 실천하기로 했다. 중도는 대립되는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적극적인 행위다. 중도가 옳다면 그 길을 가야 한다.  낯선 길이라 해도 걸어가야 한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시도해 본 적이 없지만 확신이 있으면 그 길을 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쇠약해진 몸을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다. 몸과 마음은 하나다. 몸이 편안하지 않은데 편안한 생각이 나올 수 없다. 회복하려면 음식을 섭취해야 한다.


사문 고타마는 부다가야로 방향을 잡았다. 네란자라 강에서 몸을 깨끗이 씻은 후 다른 수행자들처럼 공양을 받기 위해 마을로 내려갔다. 마침 그 마을의 수자타라는 처녀가 사문 고타마를 보고 공경하는 마음이 생겨 우유죽을 공양했다. 사문 고타마는 곧 기력을 회복했다. 우유죽을 먹자 부처의 특징인 32길상이 드러났다.


그 모습을 보고 실망한 다섯 비구는 사문 고타마 곁을 떠났다. 다섯 비구는 웃다카 라마풋타의 제자였는데 사문 고타마의 용맹스런 정진에 감동 받아 줄곧 그의 뒤를 따라 다니며 수행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토록 믿었던 사람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식사를 하는 것을 봤다. 그들은 사문 고타마가 고행을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고행을 더 심하게 해도 최고의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는 마당에 포기라니. 그들은 사문 고타마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바라나시 교외에 있는 녹야원으로 가서 자기들끼리 수행을 계속하기로 했다. 사문 고타마는 그들이 떠난 것을 말리지 않았다. 언젠가 자신이 깨달음을 얻으면 가장 먼저 제도해야 할 중생이었다.


수자타의 공양을 받고 체력을 되찾은 사문 고타마는 팝필라 나무 밑으로 걸어갔다. 팔필라 나무는 부처님이 그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인연으로 나중에 보리수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때 소티야라는 사람이 근처에서 풀을 베고 있었다. 향기롭고 청정한 풀이었다. 사문 고타마는 그에게 풀을 얻었다. 소티야는 길상(吉祥)이라는 뜻이라서 그가 준 풀은 길상초(吉祥草)라 한다.

 

▲조정육

 보리수 아래 길상초를 깔고 앉은 사문 고타마는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을 얻지 않고서는 결코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마지막 수행에 들어갔다. 무상정등각은 최고의 바르고 완전한 깨달음이란 뜻이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기까지 전혀 움직이지 않으셨고 그 자리는 ‘금강좌(金剛座)’가 되었다. 중도의 세계가 어떤 결론을 내릴지 사뭇 궁금하다. 김홍도의 작품처럼 청출어람이 될 수 있을까.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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