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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이인문, ‘강산무진도’

기자명 법보신문

깨달음의 순간, 찬란한 빛은 삼천대천세계를 비추고

마음속의 욕망과 잡념이 사라졌다. 세상이 그윽한 고요 속에 잠겼다. 오직 청정하고 맑은 기운만이 텅 빈 허공 속에 충만했다. 마왕을 물리친 사문 고타마는 고요 속에 앉아 유원한 기쁨을 마음껏 누렸다. 번뇌를 여의고 마음을 한 곳에 모아 삼매에 들었을 때의 기쁨이었다. 몸이 사라지고 보리수나무가 사라지고 하늘과 땅이 사라졌다. 아니 사문 고타마의 몸이 곧 보리수나무요 하늘이요 땅이었다. 바라보는 대상과 전혀 분리됨이 없이 완전한 일체를 이룰 수 있었다.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로웠다. 무한대로 확장된 정신의 자유로움 속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충분히 누렸다. 시간이 가뭇없이 흘렀다. 번뇌가 사라지듯 기쁨이라는 감정도 사라졌다. 즐겁되 즐거움에 빠지지 않고, 기쁘되 기쁨에 휘둘리지 않는 관조적인 상태가 지속됐다. 희로애락을 초월했다. 이런 흔들림 없는 편안함 속에서 사문 고타마는 드디어 부처로써의 깨달음에 도달했다. 진리를 있는 그대로 파악할 수 있는 명료한 깨달음이었다. 깨달음은 초저녁과 한밤중과 새벽의 세 단계로 천천히 진행됐다.


사문 고타마는 초저녁에 모든 것을 꿰뚫어볼 수 있는 천안통(天眼通)을 얻었다. 천안통으로 중생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관찰했다. 중생들은 죽어서 다시 태어나고 태어나서는 또다시 죽었다. 살아있는 동안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 다음 생에는 지옥이나 천상에 태어난다. 인과의 법칙은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중생의 윤회를 지배했다.

한밤중에는 마음을 자유자재로 움직여 과거의 일을 알 수 있는 숙명통(宿命通)을 얻었다. 자신의 과거는 물론 다른 중생들의 무수한 과거 생을 알 수 있는 지혜였다. 누가 어디서 태어나 어떤 일을 했으며 어떤 음식을 먹고 어느 지점에서 죽었는지 훤히 알 수 있었다. 어느 곳에 환생해서 어떤 옷을 입고 살았는지 세밀한 과거까지 낱낱이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들여다보니 중생들이 참으로 가엾게 살고 있었다. 생로병사를 겪으면서도 그것에서 벗어날 줄 모르고 하루하루 허덕이며 살고 있었다. 한없이 측은하고 불쌍한 존재들이었다.


왜 사람들은 생로병사를 겪는 걸까. 이 질문은 태자 싯다르타가 아버지 슛도다나왕에게 출가한 이유를 설명할 때 했던 질문이었다. 사문 고타마는 깊은 선정 속에서 자신의 의문점을 끝까지 밀고 나갔다. 새벽이 되었다. 어둡던 하늘에 새벽별이 떴다. 그 순간 우주의 진리가 사문 고타마의 마음속에 별처럼 반짝거렸다. ‘모든 법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누진통(漏盡通)을 얻어 위없이 바른 깨달음을 얻었다. 오랫동안 사문 고타마를 괴롭히던 모든 의혹이 말끔히 사라졌다. 태양이 어둠을 거둬내듯 캄캄한 의문은 사라지고 모든 것이 명확하게 빛났다. 이제 다시는 삶과 죽음을 되풀이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과거부터 수많은 생을 되풀이해 온 생사윤회는 끝이 나고 수행이 완성되었다. 드디어 사문 고타마는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을 성취한 부처님이 되었다. 석가족 출신의 깨달은 사람 석가모니 부처님의 출현이었다. 무상정등각은 산스크리트어를 음역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도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도달한 흔들림 없는 지혜와 통찰력을 의미한다. 태자 싯다르타가 출가해 사문 고타마가 된 지 6년 만인 기원전 535년 12월 8일 새벽이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얻은 천안통, 숙명통, 누진통은 ‘세 가지 밝은 지혜’라는 뜻으로 ‘삼명(三明)’이라 한다. 삼명에 신변통(神變通:몸을 마음대로 나타내는 지혜), 타심통(他心通: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는 지혜), 천이통(天耳通:남들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듣는 지혜)을 합하면 육신통(六神通)이다. ‘여섯 가지의 신통력’인 육신통 중 누진통을 제외한 오신통은 부처님이 아니라도 누구든지 수행을 깊게 하면 얻을 수 있다. 도력이 높은 선사들이 타심통을 했다거나 천이통을 했다는 이야기는 여러 자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우주의 진리를 꿰뚫어보는 누진통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처음이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진리에 도달한 사람만이 가 닿을 수 있는 경지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누진통을 얻어 부처가 되었다. 우주의 모든 진리와 법칙을 선명하게 꿰뚫어볼 수 있는 지혜였다.

 

 

 

▲ 이인문, ‘강산무진도’(부분), 비단에 연한 색, 44×856.6cm, 국립중앙박물관

 

 

강산은 끝없이 계속되고

 

햇볕이 따뜻한 가을이다. 무엇을 해도 좋은 날이다. 바다에 나갔던 배들은 만선의 여유로움을 즐기려는 듯 느린 속도로 포구로 돌아온다. 강물은 절벽을 끼고 휘돌아가며 제 갈 길을 향한다. 석양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물 위로 돛을 올린 채 고기잡이하는 배들이 오가느라 시끌벅적하다. 유유히 흐르는 물결 위로 뱃놀이 중인 기녀의 노랫소리가 간간히 흘러나온다. 강은 고함소리와 호통소리가 뒤범벅된 생업의 터전이자 젓대소리와 생황소리가 애간장을 녹이는 유희의 장소다. 생업을 품었든 풍류를 품었든 사람이 내리려면 배는 포구에 닿아야 한다. 배가 닻을 내리고 정박하자 기다리던 사람들의 손과 발이 분주하다. 시끄러운 강나루 곁길에는 가마를 탄 벼슬아치와 어깨에 짐을 진 농부가 길이 엇갈린다. 말을 타고 달리는 관리는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는 선비들을 쳐다 볼 새도 없이 채찍을 휘두른다.


사방이 온통 험한 절벽으로 막혀 있는 이곳은 걸어서는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곳이다. 언제부터 이곳에 들어와 살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였다고도 하고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였다고도 하는 걸 보면 꽤 오래전부터 이곳 산 속에 들어와 살았던 것만은 확실하다. 육대 조 할아버지가 경치 좋은 곳을 찾다 이곳에 반해 눌러 앉았다는 얘기도 전설처럼 전해 내려온다. 물론 그 전설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말이다.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외줄에 매달려 오르락내리락해야 하는 도르래밖에 없는 곳이 좋아 눌러 앉을 바보는 없을 것이다. 모르긴 해도 세상 사람들과 떨어져 살아야만 할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 이곳 사람들을 험한 눈으로 쳐다보는 사람들이 많이 줄어들었다. 위험하지만 절벽 사이로 난 길을 통해 바깥세상 사람들이 찾아올 때도 있다. 그래도 이곳 사람들은 여전히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을 낯설어한다.


아무리 험준한 지형이라 해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은 없다. 길이 없으면 길을 내고 바위가 앞을 막으면 바위를 뚫는다. 계곡 위로는 다리를 짓고 절벽 위로는 잔도를 꽂는다. 비탈길에는 계단을 만들고 언덕위에는 누각을 짓는다. 아슬아슬한 벼랑 위에는 탑을 쌓고 계곡과 계곡 사이에는 구름다리를 걸친다. 그렇게 자연을 달래고 타협하고 부탁하며 살아온 것이 인간의 역사다.


그 유구한 인간의 역사를 담은 그림이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다. 강산은 끝이 없고 무궁무진한 것처럼 인간의 역사도 끝이 없고 영원하다. 조선 후기의 화가 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 이인문(李寅文:1745-1821)이 끝없이 계속된 인간과 자연의 역사를 ‘강산무진도’ 속에 담았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산과 바다와 호수가 있듯 그림 속에도 다채로운 자연경관이 펼쳐져 있다. 바다에 수십 척의 배가 떠 있는가 하면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험준한 기암괴석이 나그네의 발길을 가로막는다. 그 자연 속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한 줌의 흙만 있어도 풀이 자라고 나무가 자라듯 한 치의 땅만 있어도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

 

석가모니 부처님이 천안통과 숙명통을 거쳐 누진통으로 깨달은 것은 ‘무명(無明)’이었다. 사람이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는 원인이 바로 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 사람이 생로병사를 겪는 것은 태어났기 때문이다. 무엇으로 인해 태어났는가. 생존(有)으로 인해 태어났다. 무엇으로 인해 생존하는가. 집착(取)으로 인해 생존한다. 무엇으로 인해 집착하는가. 갈망(愛)으로 인해 집착한다. 무엇으로 인해 갈망이 생기는가. 느끼는 감수(受)로 인해 갈망이 생긴다. 무엇으로 인해 느끼는 감수가 생기는가. 우리의 감각기관과 대상이 인식해 결합된 접촉(觸)으로 인해 감수가 생긴다. 무엇으로 인해 접촉이 생기는가. 우리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 육처(六處:眼耳鼻舌身意)로 인해 접촉이 생긴다. 무엇으로 인해 육처가 생기는가. 인식의 대상인 모양과 물체(名色:色聲香味觸法)로 인해 육처가 생긴다. 무엇으로 인해 모양과 물체가 생기는가. 인식(識)으로 인해 모양과 물체가 생긴다. 무엇으로 인해 인식이 생기는가. 현상(行)으로 인해 인식이 생긴다. 무엇으로 인해 현상이 생기는가. 무명으로 인해 인식이 생긴다. 그러므로 무명은 모든 고뇌의 이유이자 생로병사의 원인이었다. 이것이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은 ‘12연기(緣起)’다. 12연기를 깨닫는 순간 우주의 모든 진리가 그대로 드러났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연기법을 순서대로 사유하시며 거듭 확인하셨다. 


무명이 생로병사의 원인이고 모든 고뇌의 근원이라면 무명을 없애면 원인도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석가모니 부처님의 물음은 계속됐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면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이 사라진다. 원인이 있으니 생겨나고 원인이 소멸하면 존재도 소멸한다. 무명도 그러하지 않은가.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고, 행이 멸하면 식이 멸하고, 식이 멸하면 명색이 멸하고, 명색이 멸하면 육처가 멸하고, 육처가 멸하면 촉이 멸하고, 촉이 멸하면 수가 멸하고, 수가 멸하면 애가 멸하고, 애가 멸하면 취가 멸하고, 취가 멸하면 유가 멸하고, 유가 멸하면 생이 멸하고, 생이 멸하면 생로병사의 모든 괴로움이 멸한다. 무명에서 시작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연결고리 즉 무명-행-식-명색-육처-촉-수-애-취-유-생-노사의 전모가 파악됐다. 모든 법이 생생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무명을 없애면 생로병사도 없다.


부처님은 최고의 깨달음을 얻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는 순간 찬란한 광명이 삼천대천세계를 비추었다. 그 빛을 본 모든 부처님들과 보살들은 석가모니부처님의 깨달음을 축복하며 찬탄했다. 삼매에서 깨어난 석가모니 부처님은 해탈의 즐거움이 얼마나 크셨던지 이레마다 자리를 옮겨가며 49일 동안 그 기쁨을 음미하셨다. 2주째에는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무화과나무 아래로 자리를 옮기셨다. 5주째에는 비가 내리고 찬바람이 불자 용왕이 나타나 자신의 몸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비바람을 막아 주었다.

 

강산무진도를 실견하다

 

그날의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 ‘강산무진도’는 8m가 넘는 대작이다. 아무리 좋은 화보집이라 해도 8m 그림이 온전하게 실려 있는 책은 없다. 사정이 그렇다보니 화보집을 통해 그림을 감상할 수밖에 없는 감상자들은 그림의 일부만 보고 만족해야 한다. 부분도는 전체 그림 중에서 이야기가 가장 풍부한 클라이맥스가 실려 있다. 작가의 필력이나 특징이 잘 드러난다. 그러나 화가가 어떤 의도로 그림을 제작했는지 알기 위해서는 그림 전체를 봐야 한다. 전체를 다 보지 않는 상황에서 그림의 전모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위에서 필자가 ‘강산무진도’를 설명하면서 연결되지 않는 여러 개의 이야기를 두서없이 서술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것은 화보집에 실린 부분도의 설명이었다.


필자는 실제 그림을 보지 못하고 조각난 그림만 보고 만족해야 하는 것이 항상 아쉬웠다. 화첩(畵帖)이나 축화(軸畵)처럼 한 번만 봐도 전체가 파악되는 그림은 다르지만 ‘강산무진도’같은 두루마리 그림은 처음부터 절정을 보여주지 않는다. 소설이나 드라마의 구성처럼 발단, 전개, 절정, 결말로 짜여있다. 두루마리 그림의 부분도를 보는 것은 한참 진행된 드라마의 앞뒤는 보지 않고 오직 중간 한 부분만 보고 전체 이야기를 추정해야 하는 것과 같다.


그런 갈증과 아쉬움을 느끼던 차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강산무진도’ 전체를 전시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펼쳐진 실물을 직접 보며 그림의 기승전결을 확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설레는 마음으로 박물관에 갔다. 내 앞에 온전한 그림이 펼쳐져 있을 때의 감동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을 모를 것이다. 나는 온전한 그림을 여러 차례 봤다. 첫 번째 볼 때는 처음부터 끝까지 쓰윽 봤다. 전체적인 구성이 어떻게 되어 있는 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볼 때는 마치 그림 속 골목골목을 걸어서 다니듯 천천히 들여다봤다.


그림의 첫 부분은 구름과 안개에 휩싸인 언덕이 나왔다. 언덕위에 올라보니 사선으로 배치된 언덕 위의 소나무가 시선을 아래로 이끌었다. 그렇게 시작된 ‘강산무진도’는 강과 기암괴석과 절벽과 폭포를 지나더니 안개와 구름 속으로 아스라이 사라졌다. 비로소 30회분짜리 드라마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전시장을 나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림을 다시 한 번 가볍게 봤다. 전체 그림을 처음부터 끝까지 통째로 본 터라 쓰윽 봐도 작가 이인문의 제작의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내게 그것은 마치 한 세계를 관통해서 작가의 정신과 만난 것 같은 쾌감이었다.

 

▲조정육

필자는 석가모니 부처님 같은 누진통을 얻지 못했다. 그 경지에 가 닿지 못했으니 부처님의 기쁨과 즐거움을 전할 수가 없다. 그저 필자가 그림을 통해 느꼈던 감정을 통해 부처님의 기쁨과 즐거움을 짐작만 할 뿐이다. 짐작이라는 단어조차 감히 쓸 수 없을 정도로 필자의 느낌을 침소봉대한 것일 지도 모른다. 이렇게밖에 전할 수 없는 필자의 한계와 부족함을 독자제현들이 용서해주기를 바란다.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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