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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내가 만난 활불-4

기자명 법보신문

“환생은 자신의 과거 바꿀 수 있는 기회”

윤회·환생에 대한 질문에
활불은 긴 호흡 끝에 설명
현생의 자아가 미래를 결정
매일 선업 쌓아야하는 이유

 

 

▲티베트인들에게 있어서 ‘활불’은 죽음에 대한 친절한 가이드이다.

 


침을 꼴깍 삼키며 질문을 던졌지만 상대방은 대답이 없다. 침묵이 한동안 계속됐다. 이럴 때는 어찌해야 하는가? 겸연쩍은 표정과 미안한 기색으로 화제를 바꾸어야 하는가? 아님 대답이 나올 때까지 빤히 쳐다보아야 하는가? 내 질문이 너무 노골적이었는지 활불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둘러서 해주셨다. 활불이 먼저 물었다.


“매일 커피를 마시나요? 주로 무슨 커피를 드시나요?”


“저는 한국산 맥심 커피! 입에 쩍쩍 달라붙는 게 죽여요~ 스님!”


활불은 내 표정과 손짓이 웃겼는지 처음으로 잇몸과 치아를 보이시며 느리게 말씀하신다.


“여기서 우리들도 매일 커피를 마셔요. 그것도 하루 종일.”


“네? 커피를 하루 종일이요?”


“그래요. 우리는 ‘죽음’이라는 커피를 매일 마시지요. 새벽부터 밤까지요. 죽음이라는 커피를 여기 사원에서 매일 마십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우리에게는 명상과 수행이 커피와 같습니다. 매일 마시지 않으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지요.죽음과 환생의 관계를 알고 싶나요? 티베트에서는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궁금한 마음에 어떤 것인지 물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이지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나는 울었고,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 나는 웃었고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슬피 울고 힘들어 하였다.’ 이 말은 티베트의 스승이 제자들에게 들려주는 말입니다. 티베트에서는 사원에 출가하면 바로 죽음공부를 시킵니다. 죽음이 오기 전, 죽음이 올 때 우리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수행에 있어 교리는 일종의 지도와 같은 것이지요. 지도가 곧 목적지는 아니지만 지도 없이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산을 올라갈 때 나침반과 지도가 있는 것이 나을까요? 없는 것이 나을까요? 마찬가지로 교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지도 없이 올바른 수행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곳에서 환생한 이유입니다.”


사실상 윤회와 환생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스로의 수행과 체험을 통해 그것을 직접 통찰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윤회라는 보이지 않는 영적 흐름을 직접 감별하는 것은 전문적인 지도 아래서 치열한 수행을 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이 부분에 공부가 누적된 라마승과 활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해가 되는 말씀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어느 정도까지 관조(觀照)할 수 있고 내면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을까? 만일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겨우 자신의 한 귀퉁이 정도만 보고 생을 마감하는 것이라면 그 나머지는 누가 볼 수 있을까? 그 나머지의 내면공간, 그 나머지의 경험, 그 나머지의 이야기들은 누가 볼 수 있고 혹여나 누가 들어와서 해결해 줄 수 없을까? 티베트에서는 이것이 가능하다. 일반인들이 할 수 없는, 볼 수 없는 다른 면들을 티베트에서는 수행이 충분한 활불이나 고승들이 해결해준다. 누군가 말했듯이 우리도 환생자(者)일수도 있다. 그런데 왜 알지 못할까?

 

그것은 바로 누군가가 옆에서 인준하고 확인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티베트와 우리의 차이 점이다.


성철 스님도 윤회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윤회라는 것은 확실히 성립되는 이론인가요? 근래 세계적인 대학자들도 윤회를 한다는 영혼 자체를 설명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윤회를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과학이 물질로서만이 아니라 정신과학도 자꾸 발달함에 따라 영혼이 있다는 것이, 윤회가 있다는 것이, 또한 인과가 분명하다는 것이 점차 입증되어지고 있습니다.”


고(故) 박완서 작가는 생전에 불의의 사고로 아들을 잃었던 심경을 이렇게 토로했다고 한다.


“왜 하필, 다른 사람도 아닌 나에게, 이런 불행이 닥친 것일까? 이것이 생시인가 꿈인가. 너무 절망적이고 가슴이 아프다.”


이 순간이 어떤 순간인가? 아마도 자신의 생애 중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이 아니었을까? 존재와 생사의 모순에 대한 원초적인 고뇌와 의문에서 대작가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삶을 살아가면서 해답이 나오지 않는 현실과 죽음에 대한 의문을 우리는 종종 품곤 한다. 왜 나의 삶은 이렇게 힘들고 잔인할까? 왜 나는 재벌 집에서 태어나지 못했을까?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질까? 등등 말이다.


눈앞의 활불이 알 수 없는 경을 중얼거리시더니 말씀을 천천히 이어가신다.


“영혼이라는 것은 연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윤회와 카르마는 현실이며, 인생은 학교입니다. 즉, 전생의 업이 현생에서 발현되며, 현생의 업이 내생을 확실하게 규정하며, 우리의 자유의지가 운명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윤회’는 현생에서 자아가 얼마나 열심히 자신에게 공을 들이느냐에 따라 내생의 팔자가 결정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루라도 착한 일을 쉬어선 안 됩니다. 매일 매일 선업(善業)을 쌓아야 합니다. 마음에서 우러러 나오지 않더라도 선(善)한 행동을 해야 합니다.”


활불은 말씀을 이어 나갔다.


“죽음은 그저 초원에서 야크를 몰고 유목하다가 초지가 떨어지면 옆의 새로운 공간으로 이동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자, 다시 속세의 표현으로 말해볼까요. 죽음은 이방에서 사뿐히 저 방으로 건너가는 것이 아닐까요? 즉 이것은 문명의 사회에서 TV속의 채널을 돌리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음 이해가 되나요? 받아들이기는 어렵죠? 그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드리죠. 그러니까 말이죠. 한 3년 여기서 저 아래 세상으로 내려가지 말고 여기 죽음학교(사원)에서 매일 ‘죽음’이라는 커피를 마시면 될 거예요! 하하하!”


확실히 티베트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경지에서 판을 벌이고 있는 하늘 위의 공간이란 생각이 든다. 꽃 가게에 들어갔다 나오면 몸에서 좋은 향기가 나듯이, 삶과 죽음에 관한 좋은 스승을 곁에 두고 사는 사람에겐 죽음이 두렵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든다. 사실 환생이 중요한 것은 ‘자신의 과거를 바꿀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계속)

 

심혁주 한림대 연구교수 tibet00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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