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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원주 대안리사지와 춘천 법화사지

기자명 법보신문

무관심 속에서 방치되고 파손된 강원의 사찰들

우리문화재 최초의 조사
강점기 일본인들이 시작
당시 조사로 알려졌지만
현재 사라진 유적지 다수


발굴돼도 방치로 이어져
정비·관리 이뤄지지 않아
지속적인 훼손 안타까워
적극적인 대책 마련 절실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대안리 야산 기슭 절터가 약사암터라는 것과 사방불상이 새겨진 탑신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세노키 타다시의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 덕분이다.

 

 

우리 문화재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는 아쉽게도 일제강점기 일본인 연구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근대적인 조사의 맹아는 야기 소우사브로(八木裝三郞)에 의하여 1900년에 최초로 행해졌다. 그는 도쿄대학(당시 동경제국대학) 인류학 교실의 일원으로 조선에 파견되어 낙랑시대의 전(塼)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문화유산이라는 개념으로 조사를 한 이는 1902년 세키노 타다시(關野貞)가 최초였고, 1905년에는 도리이 류조(鳥居龍藏)가 심양성 집안의 고구려 유적을 답사하였다. 이어서 이마니시 료(今西龍)가 1902년 세키노가 이미 조사한 경주, 한성, 개성을 답사한 일이 있다. 이들 중 한국의 문화재연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은 역시 세키노 타다시이다.


세키노가 한국의 문화유적을 조사하기 시작한 때는 일본인 연구자로서는 아주 이른 시기인 1902년부터이다. 이 조사는 1901년 동경제국대학의 조교수로 취임한 세키노가 이듬해 대학으로부터 의뢰받은 것으로 한국건축의 개요를 파악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 후 1909년에는 대한제국도지부의 촉탁으로 초청되어 한국의 고건축과 고분에 대한 전면 조사를 시작한다.


이후 거의 매년 한국에 건너와 문화재 조사를 진행하는데, 1910년부터 1914년 사이에는 매년 9월부터 12월에 걸쳐 2~3개월간 조사했다. 다수의 고분과 법주사, 부석사 등 불교유적이 주요 대상이었으며, 1913년 10월에는 압록강을 건너 중국 길림성 집안 고구려광개토왕비를 조사하기도 했다. 세키노는 1915년에 조선총독부의 고적주임이 되었으며, 1915·1916·1917년에는 각각 백제·낙랑·고구려의 고분을 조사했다. 1918~1920년에는 2년3개월에 걸친 중국·인도·유럽 등의 조사로 한국조사는 중단되었다. 일본 귀국 후 1921년 낙랑군유적 조사를 시작으로, 1922~1926년도에도 조선고적조사를 진행하였으며, 이러한 행보는 그가 사망하기 전해인 1934년까지 계속되었다.


세키노 타다시는 건축학, 미술사학, 고고학 등 근대 한국의 문화재 관련 학문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우리 학계에서도 그에 대한 논의와 연구를 꾸준히 진행해 왔는데, 특히 미술사학계에서는 세키노의 식민사관을 비판하는 연구가 다수 발표되었다.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일본인 관학자들의 조사와 연구를 순수하게 학문적인 입장에서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당연히 당시 정세 속에서 그들의 의식이나 사관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특히 세키노가 기록하고 모아 놓았던 조사 당시의 기초자료에 대한 실태파악과 정리가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세키노 고적조사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조사연구의 성과를 보고서로 엮어 지속적으로 출간한 것이다. ‘한국건축조사보고(韓國建築調査報告)’는 1902년의 첫 조사를 보고서로 엮은 것이다. 이외에도 1909년 조사 중 경성에서 개최했던 강연회의 연설문을 모은 ‘카라모미지(韓紅葉)’, 1909년도 조사 보고서인 ‘조선예술지연구(朝鮮藝術之硏究)’, 1914년에 발간된 ‘조선고적조사약보고(朝鮮古蹟調査略報告)’ 등 상당히 많이 있지만, 가장 뛰어난 성과는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도록은 전국 각지의 유적·유물을 시대별로 정리한 것으로, 1915년 3월에 간행을 시작해서 1935년 6월까지 총15책을 조선총독부가 간행한 것이다.


이 보고서들은 제작 동기야 어찌되었든 당시 우리 문화재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기도 하거니와 현재는 훼손되거나 도난당해서 현장에서는 볼 수 없는 문화재들이 큰 사진으로 실려 있어서 아직도 우리 문화재를 연구하는 이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원주 대안리사지 석탑재의 모습.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대안리 야산 기슭에 있는 절터가 약사암터라는 사실과 원래는 사방불상이 새겨진 탑신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 덕분이다. ‘조선고적도보’ 제4책에 ‘약사암은 원주군 금물산면(지금의 대안리 일대)에 위치하고 있다’는 기록과 ‘약사암 석탑 잔석과 조각’이라는 설명이 붙은 사진 2장이 함께 실려 있다. 이곳을 처음 조사한 이는 세키노 타다시(關野貞)이다.


세키노의 원주 지역 조사는 1912년도 고적조사의 일환이었다. 이 조사는 9월18일부터 12월12일까지 거의 3개월간 진행되었는데, 9월부터 10월 초까지는 서울 송파구의 석촌동 고분, 평양 지역의 고구려 고분들을 조사했으며, 10월5일부터 강원도 춘천·양구·회양·금강산·고성·양양·강릉·오대산·평창·원주 등 강원지역 조사를 진행하였다. 아마 대안리사지를 조사한 것도 이 무렵이라고 생각되는데,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을 보면 기단부 갑석 위에 초층탑신이 놓여져 있고, 주위에 다른 탑신석 및 옥개석 들이 보인다. 초층탑신에는 사방불이 새겨져 있고 윗면에는 사리를 봉안했던 것으로 생각되는 네모난 구멍이 나있다.


이후 잊혀진 대안리사지를 재발견한 이는 원주 평원문화연구소 박문성 소장이다. 그는 원주지역의 폐사지를 조사하던 중 ‘조선고적도보’의 내용을 근거로 이 절터를 확인하였으며, 이듬해에는 강원문화재연구소가 정밀지표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결과 석축과 출입시설, 석탑재 등이 확인되었고, 지표상에서는 사찰의 존속기간을 간접적으로 추정할 수 있는 기와편과 자기편이 수습되었다. 보고서에 의하면, 사찰의 조성은 자연경관이 좋은 계곡부에 화강암질의 크고 작은 자연석을 사용하여 높이 3m 가량의 축대를 쌓아 기반을 마련하고 그 기반 위에 2단의 석축단을 계단식으로 마련하여 법당과 석탑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축대 상면에는 팔부신중이 조각된 상대중석 3매와 상대갑석 1매가 흩어져 있다.


2004년도의 조사는 지표조사였기 때문에 사역의 범위나 가람배치 등 사찰의 전모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하지만 팔부중과 사방불이 조각되어 있는 3층 석탑은 국보 제122호 양양 진전사지 삼층석탑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것이어서 세간의 관심이 매우 높았다. 그래서 당시 원주시에서는 석탑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내고, 사라진 부재들도 발견하여 탑을 복원할 수 있도록 바로 발굴조사를 실시하려 했으나, 무언가 여의치 않았는지 절터는 지금까지 방치된 상태로 남아있다. 게다가 ‘조선고적도보’에 실려 있는 사방불이 조각된 초층탑신은 이미 사라져버렸다. 주요 사지에 대한 무관심은 단순한 방치라기보다는 차라리 훼손에 가깝다고 보아야한다. 보다 적극적인 관리가 아쉬운 대목이다.


이렇게 유적을 조사한 이후 정비나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다시 한 번 더 훼손되는 경우는 상당히 많다. 유사한 예로 춘천 법화사지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일제강점기인 1935년 고노반세이(河野萬世)가 쓴 ‘춘천풍토기(春川風土記)’에는 ‘법화사지 불상은 사북면 양통리 부락의 동쪽 지점 중태곡에 있으며, 석축의 일부가 남아있다. 1구의 불상이 있는데 높이 약 3척9촌의 입상으로 파손되지 않고 완전하다. 법화사의 옛 흔적이라고 한다‘고 기록돼있다.

 

 

▲춘천 법화사지 사자상 석조물(왼쪽)과 금당지의 도굴흔적(오른쪽).

 


법화사지는 춘천지역에서 청평사에 버금 갈만한 큰 사찰로 주목되는데, 수천여 평에 이르는 넓은 터가 남아 있다. 법당의 주초석과 돌계단, 축대가 원형에 가깝도록 남아 있으며, 석등의 대석, 석탑의 상대갑석 그리고 다양한 와편들이 흩어져 있다. 법화사지가 주목되는 이유는 구산선문 중 하나인 굴산문의 2대조 낭공과의 관계 때문이다. 낭공대사가 범일국사의 전심을 받은 후 굴산문의 법맥이 계승된 사찰은 문수원과 화악사 2개소뿐이고, 청평사에 건립되었던 문수원기에 의하면 화악사는 청평사 인근에 있었다고 하므로 위치나 규모면에서 볼 때 법화사지를 화악사로 보는 홍성익의 견해는 일리가 있다. 현재 법화사지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금당지가 초석을 포함하여 불상 지대석까지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고려초기로 보이는 석탑 상대갑석, 불상 대좌의 일부로 생각되는 사자상이 부조된 석조물 등이 사지 내에 산재하고 있다. 고려 초부터는 대규모의 사찰이 경영되었다고 생각되는데 해당 지역의 유력한 호족세력에 의해 창건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까지는 절터에 남아있던 석불입상이 지금은 사라져버렸고, 석재들 또한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다. 게다가 2004년에는 금당지가 도굴을 당하는 일까지 생겼다.

 

▲임석규 실장

앞에서 살펴 본 원주 대안리사지에 남아 있는 석탑재는 비록 사방불이 새겨져 있는 초층탑신은 없어져 버렸지만 상층 기단부의 팔부중상은 강원지역의 석탑 팔부중상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춘천 법화사지도 국사급의 승려가 주석했을 것이라 여겨지는 소중한 사찰이지만 발견된 지 수년이 지난 지금도 도굴당한 채 숲 속에 방치되고 있다. 모두 인적이 드문 곳인데다가 재차 도난의 우려마저 있어 이에 대한 대책이 시급하다.

 

임석규 불교문화재연구소 연구실장  noalin@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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