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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안견, ‘몽유도원도’

기자명 법보신문

석가모니의 위대한 선택, 감로비 되어 세상을 적시다

 

▲안견, ‘몽유도원도’, 1447년, 비단에 연한 색, 38.7×106.5cm, 일본 나라 천리대도서관.

 

 

햐아. 요 놈 보라 요거. 진짜 5학년짜리 맞아? 정답을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어떻게 저렇게 모범답안을 훔쳐본 듯 정확한 답을 할 수 있을까. 아니다. 정답보다 더 훌륭하다. 문제를 낸 나조차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150점짜리 대답이 아닌가. 가르침의 보람을 확인할 수 있는 놀라운 답변이었다.


나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발표하는 아이의 얘기를 듣는 내내 감탄을 멈출 수 없었다. 광명시에 있는 도서관에서 특강을 하면서 겪은 일이다. 방학 동안 초등학교 5학년을 대상으로 기획된 독서 캠프에서 우리 그림을 소개하는 특강이었다. 초등학생한테 하는 특강은 언제나 힘들고 긴장된다. 돈도 별로 되지 않으면서 힘들기는 성인들 대상 강의보다 몇 곱절 더해 강사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강의다. 현란한 원색에 길들여진 아이들에게 먹빛이 많은 동양화를 보여준다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첫눈에 반한다는 통념을 용납하지 않는 분야가 동양화다.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귀를 기울여야 마음을 여는 도도한 분야다.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할 때마다 김홍도나 신윤복의 작품처럼 잘 알려진 그림을 선택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렵다고 포기하면 아이들은 우리 그림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영영 사라진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어린이들에게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교육은 계속해야 한다. 처음 본 그림이 흑백인데다 낯설기까지 하면 어린이들이 흥미를 잃기 쉽다. 우선은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김홍도의 ‘씨름도’부터 보여줘야 자신감을 갖고 그림을 쳐다본다. 그 정도 그림이라면 저도 이미 알고 있는데요. 자부심에 넘쳐 당당하게 동양화와 맞설 때쯤 전혀 낯선 그림을 보여줘도 거부하지 않는다. 어렸을 때 본 그림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기억에 남는다. 어떻게든 어린이들에게 좋은 그림을 많이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윤두서, ‘늙은 말’, 17세기, 종이에 연한 색, 23.9×19.4cm, 국립중앙박물관.

 

 

윤두서의 ‘늙은 말’은 그렇게 해서 선택 된 그림이다. 아마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특이한 그림이었을 것이다. 대부분 말 그림은 천리마처럼 늠름하고 잘 달릴 것 같은 멋진 말이 주인공이다. ‘늙은 말’은 그런 예상을 단번에 뒤엎는 생소한 말이다. 이 그림을 보고 자기 생각을 얘기해 볼 수 있는 사람? 그 날도 역시 시작부터 긴장했다. 어떻게 두 시간을 때우나. 귀찮은 생각도 없지 않았다. 사명감도 좋고 정체성도 좋지만 두 시간 내내 목이 쉬도록 떠들어봤자 5분도 되지 않아 한 눈 파는 아이가 생기는 것이 다반사다. 그림을 보여주며 아이들에게 질문을 던진 것도 순전히 관심을 끌기 위한 수단이었지 특별히 어떤 답을 기대하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한 어린이가 손을 번쩍 들더니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아기 말이 엄마 말의 젖을 빨고 있는데 엄마 말은 힘들어서 고개를 수그리고 있어요.”


여기까지 대답했더라면 평범하게 넘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다음 설명이 압권이었다.


“엄마 말이 힘들어도 아기 말한테 젖을 먹이고 있는 것처럼, 우리 부모님도 자식들을 위해 저렇게 고생하며 꾹 참고 사시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린 그림 같아요.”

 

무명에 쌓인 중생을 위해 감로의 법문을 펼치리라

 

석가모니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으신 후 49일 동안 그 기쁨을 충분히 누렸다. 출가 수행한 목적은 완벽하게 이뤄졌다. 진리의 세계에서 노니는 즐거움은 부족하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은 보름달처럼 완전했다. 사천왕, 대지의 신, 마왕의 권속 등 수많은 신들과 보살들이 꽃과 향을 바치며 예배드렸다. 그들은 새로 탄생한 부처님의 덕을 찬탄하며 한결같은 목소리로 노래했다. 석가모니부처님이 보리수 아래 사자좌에 앉아 깨달음을 얻은 찰나에 헤아릴 수 없는 기이하고 상서로운 모습이 나타났다. 만일 그 일을 모두 말한다면 몇 세대에 걸쳐서도 다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라고.


흡족하게 깨달음의 세계를 노닌 석가모니부처님은 생각했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진리를 나만 홀로 알고 끝낼 것인가. 아니면 중생들에게 전해줄 것인가.


‘나는 이제 위없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나 이 진리는 지극히 깊고 미묘해서 이해하기도 어렵고 보기도 어렵다. 고요하고 청정하며 지혜로운 자만이 알 수 있을 뿐 보통 사람은 도저히 알 수 없다. 이 세상 사람들은 탐욕과 분노에 불타고 있어 이 법을 깨닫게 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 법은 세간의 상식을 초월하고 미묘하고 난해하므로 욕망의 격정에 빠진 자, 무명으로 휩싸인 자에게 알게 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만일 내가 이들에게 법을 가르쳐도 그들은 틀림없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지난 시간을 되돌아봤다. 목숨을 걸고 자신이 걸어온 길은 아무에게나 권할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어디 그뿐인가. 깨달음의 세계 또한 그에 못지않다. 모처럼 애써 발견한 진리인데 보통 사람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렵다. 오직 부처만이 알 수 있는 세계다. 만일 이 진리를 알려준다 해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결국 버려질 것이다. 사람들에게 설법(說法)하는 것은 단념해야겠다. 석가모니부처님의 마음이 설법을 포기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때 석가모니부처님의 마음을 안 범천(梵天)이 탄식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범천은 석가모니부처님 앞에 나타나 오른쪽 무릎을 꿇고 다음과 같이 간청했다.


“석가모니부처님이시여.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이전부터 마가다국에서는 때 묻은 자들이 부정한 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청정한 부처님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들려주십시오. 이 세상에는 눈이 먼지로 가려져 있지 않은 중생도 있습니다. 그들이 법을 듣는다면 깨달을 수 있을 것이나 법을 듣지 못한다면 그들조차 타락해 버릴 것입니다.”
범천(梵天)의 거듭 된 권청(勸請)에 석가모니부처님은 세상의 중생들을 부처의 눈으로 관찰했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사람들의 능력에 있어 세 가지 차별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근기(根機:교법을 받는 중생의 성능)가 서로 달랐다. 근기가 가장 낮은 사람들은 부처가 진리를 가르쳐 주거나 가르쳐 주지 않거나 깨닫지 못할 것이고 근기가 가장 높은 사람들은 부처가 진리를 가르쳐주거나 가르쳐주지 않거나 반드시 깨달을 것이다. 문제는 중간 근기의 사람들이다. 세상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속해 있는 중간 근기의 사람들은 부처님의 진리를 들으면 깨달을 것이고 듣지 못하면 깨닫지 못할 것이다. 이들은 마치 연못에 핀 연꽃과 같았다. 물속에 잠긴 채 있는 연꽃과 물 위로 솟아오른 연꽃 그리고 물 위에 닿을락 말락한 연꽃이 그것이다. 앞의 두 종류의 연꽃은 어느 것이나 손댈 필요가 없지만 세 번째 연꽃은 기회만 주면 물 위에 솟아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세 번째 연꽃 같은 근기의 사람들을 위해 진리를 들려주시기로 결심했다.


결심을 굳힌 석가모니부처님이 이렇게 선언하셨다.


“내가 그대의 청을 받아들여 감로(甘露)를 비처럼 내리리라. 모든 세상의 중생들과 신들과 용들과 믿음이 있는 자는 이 진리를 들으라.”


부처님의 선언은 자비(慈悲)의 실행이자 전법(傳法)의 출발이었다. ‘감로’는 ‘단이슬’이다. ‘단이슬’이 어떤 것인지 느낌이 오지 않는다면 지금처럼 한여름 온도가 40도를 넘는 날 뜨거운 뙤약볕 아래를 걷다 마시는 생수라고 생각하면 된다. 타들어가듯 갈증이 심할 때 벌컥벌컥 마시는 물은 목을 적시고 몸을 적시고 마음까지 적셔줄 것이다. 더구나 인도처럼 뜨거운 곳에서 황톳길을 맨발로 걸어간다고 생각해보라. 범천을 비롯한 여러 신들은 석가모니부처님의 결심을 알고 크게 기뻐하며 환호했다.

 

1447년 4월 20일 밤이었다. 안평대군(安平大君:1418-1453)은 졸음에 밀려 이내 잠이 들었다. 정신이 아련해지는가 싶더니 홀연히 어느 산 아래에 이르렀다. 박팽년이 곁에 서 있었다. 두 사람 앞에는 우뚝 솟은 봉우리와 깊은 골짜기가 이어진 우람한 산이 펼쳐져 있었다. 험준하고 그윽한 산세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수십 그루의 복숭아꽃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나무 사이에는 오솔길이 나 있었다. 오솔길을 따라 숲 가장자리에 이르자 갈림길이 나왔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할까. 잠시 머뭇거리고 있을 때 이 동네 사람인 듯한 남자가 지나갔다. 그를 불러 어디로 가야 할지 길을 물었다. 그는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를 한 후 말했다.


“이 길을 따라 북쪽 골짜기에 들어가면 도원(桃源)에 이릅니다”   


안평대군과 박팽년은 말을 채찍질해 북쪽 골짜기로 들어갔다. 절벽이 깎아지른 듯 날카로운 기세로 솟아있었다. 숲은 앞을 가릴 만큼 빽빽하고 울창했다. 계곡물은 콸콸 소리를 내며 낮은 곳으로 굽이쳐 흘렀다. 외줄기 길은 백 번이나 꺾여 돌아가야 할 만큼 아찔하게 구불구불했다. 또 길을 잃은 건가. 골짜기에서 갈 곳을 모르고 헤맬 즈음 갑자기 하늘이 탁 트이는가 싶더니 믿지 못할 정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복숭아꽃나무였다. 눈에 보이는 곳은 모두 농밀한 연분홍 꽃잎이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복숭아꽃밭에 구름과 안개가 자욱이 내려앉았다. 고혹적인 아름다움의 자취만 드러낸 채 숨어 버린 절정의 배후가 궁금해지는 곳. 도원이었다. 도원은 전설 속에 나오는 서왕모의 정원이 아닌가.


눈을 거둬 대나무 숲속을 바라보니 띠풀 집이 보였다. 사립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흙으로 만든 섬돌은 거의 다 부스러져 있었다. 그 흔한 닭이나 개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태초부터 시간이 정지된 공간처럼 움직임이 없었다. 마을 앞 시내에서 물결 따라 흔들리는 조각배 한 척만이 적막한 침묵의 가장자리를 건드렸다. 무욕한 삶을 즐기는 신선이 아니라면 누릴 수 없는 쓸쓸함이었다.


온 몸에서 언어가 다 빠져 나간 듯 한참을 말없이 걷던 안평대군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바위에 기둥 엮고 골짜기 뚫어 집 짓는다,는 표현이 이런 경우가 아니겠는가? 이곳이 정녕 도원동이로다.”


안평대군의 운(韻)을 받아 최항과 신숙주가 시를 지었다. 꿈이 항상 그러하듯 멀쩡하게 서 있던 사람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생뚱맞은 사람이 느닷없이 등장하기도 하는 법이다. 함께 출발했던 박팽년은 보이지 않고 대신 언제 왔는지 최항과 신숙주가 뒤따르고 있었다. 세 사람은 신발을 가다듬고 함께 산을 내려 왔다. 좌우를 둘러보며 풍경에 취해 시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순간 홀연히 꿈에서 깨어났다.


“이 꿈을 그대가 그려줘야겠어.”


안견에게 꿈 얘기를 한 안평대군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아무리 하늘이 내린 신필(神筆)이라는 칭찬을 듣는 자신이지만 어떻게 남의 꿈을 그릴 수 있을까. 안견(安堅:조선 초기)은 막막했다. 정작 안견 본인은 믿을 수 없는 실력을, 타인인 안평대군은 당연하게 해내리라 믿었다. 그의 믿음처럼 안견은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사흘 만에 완성했다. 제목은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로 ‘꿈에 복숭아꽃밭을 거닐다’는 뜻이다. 한 사람의 믿음이, 불가능을 가능케 한 믿을 수 없는 작품이다.


안견은 안평대군의 꿈을 그리면서 원칙을 정했다. 인간이 사는 현실세계와 신선이 사는 도원의 세계를 대비되게 표현한다는 원칙이었다. 그 결과 생각한 구도가 왼쪽에는 낮은 야산을, 오른쪽에는 높은 암산을 배치하는 형식이었다. 두 세계를 대비가 되게 배치한다면서 정작 그림은 도원의 세계에 쏠려 있다. 현실세계인 왼쪽의 야산이 도원의 세계인 오른쪽보다 상대적으로 비중이 적은 것은 안평대군의 주문이 꿈속의 도원이었기 때문이다. 안평대군의 얘기는 현실세계에서 잠이 든 것에서 시작해 꿈에서 끝났다. 현실세계는 잠이 들 때 잠깐 언급했을 뿐 주 무대는 복숭아꽃이 분분히 날리는 꿈속의 세계였다. 이것이 야산을 적게 그린 이유다. 비록 야산의 비중이 암산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적지만 그것 때문에 오히려 암산의 세계는 더욱 강조된다.

 

 

▲정선, ‘금강전도’, 1734년, 종이에 연한 색, 130.7×94.1cm, 삼성리움미술관.

 


안견이 구상한 낮은 야산과 험한 바위산의 대비는 정선(鄭敾:1676-1759)의 ‘금강전도(金剛全圖)’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정선은 왼쪽의 토산과 오른쪽의 암산의 배치를 통해 음양(陰陽:-+)이 맞물려 태극을 이루는 우주의 기(氣)를 보여주고자 했다. 그 원류가 안견의 ‘몽유도원도’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안견과 정선은 그들이 보여주고자 한 세계가 달랐을 뿐이다. 안견이 한 사람의 의식세계를 관통한 꿈과 현실의 세계였다면 정선은 자연에 내재된 자연의 질서와 근원이었다. 이것은 두 사람의 세계관의 차이이자 지향점의 차이였다.   


물론 ‘몽유도원도’가 명작이 된 것은 이런 대비되는 구도 외에도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조감도법으로 내려다본 도원의 세계, 다양한 각도에서 산을 바라보면서 그린 여러 시각의 혼재, 구름기둥처럼 연결된 바위산에 의해 느껴지는 웅장함, 바위산의 날카로움과 복숭아밭의 부드러움의 대비 등 조선 전기를 대표한 안견의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되었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원인은 안견에 대한 안평대군의 한결같은 신뢰였다.  


만약 석가모니부처님이 자신의 깨달음을 세상에 전하지 않고 혼자 만족하고 끝났더라면 독각(獨覺:혼자 수행해 깨달은 사람)은 되었을지언정 사생자부(四生慈父: 태(胎)·란(卵)·습(濕)·화(化)의 네 가지 형태로 태어난 모든 중생의 아버지)에 이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독각의 경지에 오른 것이 구도심(求道心)이었다면 자신이 성취한 결과를 온전히 나누어주는 행위는 자비심(慈悲心)이다. 자비심은 구도심보다 위대하다. 자비심이 바탕이 된 전법은 출가만큼 중요하다. 출가가 ‘위대한 버림’이었다면 전법은 ‘위대한 선택’이다.

 

▲조정육

석가모니부처님의 위대한 선택에 의해 우리는 사문 고타마가 겪었던 고생을 겪지 않고서도 진리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게 됐다. 무명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석가모니부처님과 똑같은 해탈의 즐거움을 누리게 됐다. 2500여 년의 세월 뒤에도 값없는 영혼을 환희심에 춤추게 한 놀라운 소식이었다. 타인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꽃 피운 결과였다.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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