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노봉달도(路逢達道)
34. 노봉달도(路逢達道)
  • 법보신문
  • 승인 2013.09.20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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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은 자는 말과 침묵으로도 흔들리지 않는다

타인의 평판에 신경쓰면
스스로 주인공 될 수없어


부처와 같은 깨달은 이는
말과 침묵 어떤 수단에도
결단코 동요되지 않는다

 

오조(五祖) 법연(法然) 화상이 말했다. “길에서 도(道)에 이른 사람을 만나면, 말로도 침묵으로도 대응해서는 안 된다. 자, 말해보라. 그렇다면 무엇으로 대응하겠는가!”

무문관(無門關) 36칙 / 노봉달도(路逢達道)

 

 

▲그림=김승연 화백

 

 

1. 태양을 가리니 비켜주시오

 

깨달음에 이르렀다는 것, 혹은 부처가 되었다는 것, 그것은 우리가 자신의 삶을 주인공으로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주인으로 사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당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그는 어떤 것에도 쫄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주인과는 달리 손님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항상 무엇인가에 눈치를 보면서 삽니다. 당연히 이런 사람은 자신의 본래면목에 따라 살기 힘들 겁니다. 주인이 원하는 가면을 쓰면서 살아갈 테니까 말입니다. 주인이 사람일 수도 있고, 권력일 수도 있고, 아니면 자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타인이나 권력, 혹은 자본은 손님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그는 결코 그런 것 때문에 자신의 본래면목을 상실하지는 않을 겁니다. 깨달음에 이른 선사(禪師)들이 어떤 것에 대해서든 당당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자신을 제외한 일체의 것들을 주인이 아니라 손님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당당함! 이것은 불교 전통에서만 강조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서양의 경우에서도 주인으로서의 당당함을 강조했던 오래된 전통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특히 서양 고대철학 전통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철학자는 아마 디오게네스(Diogenēs of Sinope, BC 400?~BC 323)만한 사람도 없을 것 같습니다. 당시 최고의 권력자였던 알렉산더 대왕(Alexandros the Great, BC 356~BC 323)은 디오게네스에게 원하는 것을 하나 들어주겠다고 했던 적이 있습니다. 통 속에 살고 있던 디오게네스는 귀찮은 듯이 대답했다고 합니다. “태양을 가리니 비켜주시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권위에 머리를 숙이고 있다고 생각했던 알렉산더 대왕으로서는 당혹스런 일이었을 겁니다. 결코 자신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는 당당한 사람, 심지어 자신을 태양을 가리는 나뭇가지나 솜털구름정도로 가볍게 보는 사람을 만났으니까 말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어떻게 디오게네스에게 대응했을까요.


고대 그리스의 전기 작가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Diogenēs Laertios)의 ‘유명한 철학자들의 삶과 견해(Lives and Opinions of Eminent Philosophers)’는 디오게네스의 삶과 사유를 알려주는 유일한 책입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알렉산더 대왕이 디오게네스의 말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알렉산더 대왕이 무례한 디오게네스를 감옥에 넣거나 혹은 죽이지 않은 것은 확실합니다. 디오게네스를 해치기는커녕 알렉산더 대왕은 그를 존경하기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디오게네스를 만나고 난 뒤 알렉산더는 측근들에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나는 알렉산더가 되지 않았다면 디오게네스가 되었을 것이다.” 자! 여러분이 알렉산더 대왕이었다면 “태양을 가리니 비켜주시오!”라고 당당히 말했던 디오게네스에게 어떤 식으로 반응했을까요? 생각하지 말고 빨리 말해보세요!


2. 깨달은 이에게 화두는 명료하다

 

알렉산더와 디오게네스 이야기를 꺼낸 것은 ‘무문관(無門關)’의 서른여섯 번째 관문을 제대로 통과하기 위해서입니다. 황매산(黃梅山)이라고도 불리던 오조산(五祖山)에서 제자들을 가르쳤기에 오조(五祖)라고 불렸던 법연(法然, ?~1104) 스님은 서른여섯 번째 관문에 똬리를 틀고 앉아서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희들이 알렉산더 대왕이었다면 디오게네스와 같이 당당한 사람에게 어떻게 대응했겠는가?” 그렇지만 법연 스님은 더 친절하게 묻습니다. “길에서 도(道)에 이른 사람을 만나면, 말로도 침묵으로도 대응해서는 안 된다. 자, 말해보라. 그렇다면 무엇으로 대응하겠는가!” 여기서 ‘도에 이른 사람’은 깨달은 사람, 그러니까 주인으로서 당당한 삶을 영위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한 마디로 부처와 같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그와 관계해야 할까요?


먼저 우리는 화두의 속성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화두는 깨닫지 않은 사람에게는 딜레마나 역설로 보이지만, 깨달은 사람에게는 전혀 모순이 없는 명료한 이야기로 들립니다. 그러니까 화두는 깨달았는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를 구분하는 시금석으로 작동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법연 스님의 화두를 처음 보았을 때,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하는 부분이 어디인지를 먼저 파악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왜 부처와 같은 사람을 만나면 말로도 침묵으로도 대응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이렇게 물을 수 있을 때, 우리는 법연 스님의 화두에 한걸음 더 접근할 수 있을 겁니다. “부처와 같은 사람을 만나면 말로도 침묵으로도 대응해서는 안 된다”는 법연 스님의 말은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일반 사람을 만나면 말이나 침묵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가르침일 겁니다. 물론 여기서 말이나 침묵은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을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평범한 사람은 어쨌든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이지요.


깨닫지 못한 사람을 상대할 때, 우리는 말과 침묵을 적절하게 사용하여야 합니다. 상대방이 무엇인가 대답을 원한다면, 그에게 말을 해주어야 합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타인의 인정에서 행복을 느끼고, 반면 타인의 무시에서 불행을 느끼기 때문이지요. 인정과 무시의 가장 큰 수단은 법연 스님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바로 말과 침묵 아닐까요. 상대방이 무엇인가를 물어보았을 때 친절히 대답하는 것만큼 가장 극적인 인정 행위도 없을 것이고, 반대로 이 경우 침묵은 상대방에 대한 가장 치욕적인 무시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반대로 일일이 말대꾸하는 것은 상대방을 무시하는 행위로 비쳐질 수도 있는데, 이 경우 침묵하는 것이 아마 상대방을 인정하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겁니다.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을 좋아하고 무시당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주인으로서 삶을 살아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주인은 사실 타인의 평판일 테니까 말입니다.


3.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돼야

 

“왜 부처와 같은 사람을 만나면 말로도 침묵으로도 대응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이제 대답을 찾으셨나요. 깨달은 사람, 그러니까 주인공으로 삶을 당당히 영위하는 사람은 타인의 평판, 그러니까 타인의 말이나 침묵으로도 동요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말과 침묵은 타인을 나의 뜻대로 지배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부처와 같이 깨달은 사람은 어떤 수단으로도 동요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글자 그대로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사람인 셈이지요. 언어로 그 사람에게 이를 수 있는 길은 깨끗하게 끊어진 것이니까요. 드디어 이제 법연 스님이 우리에게 던진 화두는 90% 정도 풀린 셈입니다. “말과 침묵으로도 깨달은 사람과 관계할 수 없다면, 이제 그와 어떻게 관계해야 할까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말과 침묵으로도 깨달은 사람과 관계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순간, 우리 자신도 이미 깨달은 사람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무문관’의 서른여섯 번째 화두를 마무리하면서 무문 스님은 “턱을 잡고 맞바로 면상에 주먹을 날려야 한다(攔腮劈面拳)”고 이야기합니다. 이건 물론 깨달은 사람에게 자신도 깨달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극단적인 방법일 겁니다. 임제 스님이 이야기한 것처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야 한다”는 임제(臨濟, ?~867)의 가르침이나, 혹은 “부처는 마른 똥 막대기에 불과하다”는 운문(雲門, ?~949)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한 셈이니까요. “너도 깨달은 사람이니 나도 깨달은 사람이다”라는 당당함이 있어야만 가능한 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면상에 주먹을 제대로 한 방 맞은 상대방은 이런 주먹질에 겁을 내거나 화를 내거나 하지는 않을 겁니다. 왜냐고요. 주먹질에 얼얼해진 얼굴을 감싸며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성불(成佛)하기를 간절히 바랬던 그로서는 자신 앞에서 당당함을 유지하는 사람을 보고서 어떻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시 알렉산더와 디오게네스의 사례로 돌아가 볼까요. 알렉산더 대왕은 제국의 주인이었습니다. 당연히 그의 제국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알렉산더의 눈치를 살피는 손님일 수밖에 없습니다. 처음 알렉산더는 디오게네스도 자신의 집에 기숙하는 손님 중 하나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러니 은혜를 베풀려고 했던 겁니다. 그런데 디오게네스는 알렉산더 앞에서 전혀 쫄지 않았습니다. “태양을 가리니 비켜주시오!”라고 말하면서 디오게네스는 자신도 당당한 삶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으니까요. 그렇다고 디오게네스를 감옥에 가둘 수도 죽일 수도 없는 일입니다. 왕으로서의 자신의 권위를 부정하는 디오게네스를 무서워하고 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실토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돌아보면 알렉산더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 바로 디오게네스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강신주

알렉산더는 자신이 정복했던 지역에서만 주인 노릇을 하였지만, 디오게네스는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든 주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었던” 임제처럼 디오게네스도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나는 세계 시민이다!” 이런 그에게 작은 영역을 다스리며 주인 행세를 하던 알렉산더가 얼마나 작아 보였겠습니까.

 

강신주 contingent@naver.com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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