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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아스카데라(飛鳥寺)의 석가여래상

기자명 법보신문

고구려 황금으로 감싼 일본 최고사찰 동 부처님

일본왕이 본존불을 조성하자
605년, 고구려왕 황금 보내
불상 도금용으로 사용 추측
인근공방서 작업 가능성 높아

 

긴테츠(近) 카시하라진구마에(原神宮前)역에서 버스로 10여분 거리에 아스카데라(飛鳥寺)라는 사찰이 있다. 행정구역상 주소는 나라켄 다카이치군 아스카무라 아스카682번지(奈良高市郡明日香村飛鳥682)인데, 이곳이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사원이 건립된 곳이다.


몇 해 전, 일본 아사히신문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사찰인 아스카데라(飛鳥寺)가 백제의 왕흥사를 본떠지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했다. 당시 기사는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한 부여의 왕흥사지의 조사결과와 함께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백제 멸망 후 폐허가 된 왕흥사는 백제 제27대 왕인 위덕왕(威德王·재위 554∼598)이 숨진 왕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은 절이다. 그런데 일본 최초의 사찰로 알려진 아스카데라가 과연 백제 사람에 의해 백제의 사찰을 모방해 지어진 것이라고만 생각하기에는 몇 가지 의문이 있다.

 

 

아스카데라는 백제의 왕흥사를 본떠지었다고 알려졌으나 발굴조사를 통해 고구려와도 관련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아스카데라(飛鳥寺)는 1956년과 1957년, 두 해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지금까지 일본에 알려지지 않았던 일탑삼금당(一塔三金堂)이라는 예상외의 가람배치로 조성되었음이 밝혀졌다. 일탑삼금당의 가람배치는 고구려 사원에서 유례를 찾을 수 있다는 점도 주의를 끌었다. 일본서기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에 불사리를 보내고 아스카데라를 만들 때 기술자를 파견한 백제와의 밀접한 관계에 더하여 고구려와도 관련이 있었던 점을 새롭게 알게 된 것이다.


게다가 ‘일본서기(日本書紀)’ 스이코(推古)천왕 12년(605)조에는 고구려의 대흥왕(大興王)(혹은 영양왕(陽王))이 일본왕이 불상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황금 삼백냥을 보내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가람배치뿐 아니라 본존불상의 제작에도 고구려가 적극적으로 관여했다는 이야기이다.


아스카데라가 완성되기까지의 사정을 ‘일본서기’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587년 소가노우마코(蘇我馬子)가 아스카데라의 조영을 발원했다.
588년 백제에서 사리ㆍ승려ㆍ사공(寺工) 등이 왔다.
590년 산에 올라 사원을 건축할 재료를 취했다.
592년 불당과 회랑을 지었다.
593년 불사리를 찰주의 초석 안에 모시고 그 위에 찰주를 세웠다.
595년 고려 승 혜자(慧慈)가 귀화하고, 백제 승 혜총(慧)이 도착했다.
596년 완공. 혜자ㆍ혜총이 거주했다.
605년 쿠라쯔쿠리노도리(鞍作鳥)를 조불공으로 삼아 동(銅)ㆍ수() 장육상 1구씩 을 만들기 시작했다. 고려 대흥왕(大興王)이 황금 삼백냥을 보내주었다. 
606년 동ㆍ수() 장육불 완성. 쿠라쯔쿠리노도리의 기술에 의해 건물을 파괴하지 않고 동불을 칸코지(元興寺)의 금당에 안치할 수 있었다.


위의 기사에 따르면 아스카데라 조영의 마지막 단계에서 고구려왕이 황금을 보내주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이 황금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누구나 불상과의 관계를 가장 먼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안고인(安居院)의 본당(에도(江) 시대의 건축)인 아스카데라 중금당에 현존하는 ‘아스카 대불’, 즉 본존인 석가여래상(현재 높이 2.75m, 중요문화재)이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605년 한반도에서 건너간 공인 쿠라쯔쿠리노도리가 제작한 ‘동과 자수로 만든 장육불상 각 일구’ 중에서 ‘동(銅)’으로 만든 ‘장육불상’에 해당한다는 점에는 대체로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아스카데라의 본존불인 석가여래상. 이 상에는 극히 일부분이지만 지금도 도금이 남아 있어 본래 금동불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56~1957년의 발굴을 통해 이 불상의 위치가 창건 이후부터 옮긴 사실이 전혀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본존은 나중에 보수한 부분이 많고, 원래의 부분이 남아 있는 것이라곤 머리 부분 일부와 오른손 일부에 불과하지만, 행인형(살구씨 모양)의 눈 등 상의 모습이 도리(止利) 양식의 특색을 가진 불상이어서 호류지(法隆寺)의 상들과 함께 잘 알려져 있다.


이 상에는 극히 일부분이지만 지금도 도금이 남아 있어 본래 금동불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석조대좌에 협시를 고정시켰다고 여겨지는 구멍도 있어서 삼존불이었다는 점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고구려왕이 보내 준 금의 용도를 불상과 관련지어 생각해보면, 금동불의 완성단계에서 사용되었던 도금용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그런데 고구려왕이 보냈던 금에 대해서는 앞에서 예로 든 ‘일본서기’ 이외에도 중요한 사료가 있다. ‘칸코지연기(元興寺起)’에서 이어 ‘장육광명(丈六光銘)’의 관계기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以銅二万三千斤, 金七百五十九兩, 敬造尺迦丈六像銅二侍, 高麗大興王,
方睦大倭, 尊重三, 以喜, 金三百兩助成大福, 同心結(중략)’


‘일본서기’의 기록과 비교해보면, 황금의 양이 다른 점, 동과 금의 양을 구체적으로 나타낸 점 등 몇 군데에서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금의 용도에 대해서는 위의 사료에 의해 알 수 있듯이 불상 본체의 도금용이었다고 한정하기 보다는 광배와 협시, 천개와 각종 장엄구 등 금제품과 금동제품에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조금 범위를 넓혀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1956년의 발굴조사에서 탑의 심초(心礎)에서 출토된 사리장엄구 안에 금제품이 들어 있던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 금제품이 고구려왕이 헌상했던 금일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의하면, 사리를 탑의 초석에 매장한 것은 593년으로, 장육불의 제작이 개시되자 고구려왕이 황금을 보냈던 605년 보다 앞선 시대이므로 연대적으로 맞지 않는다. 더구나 이 사리는 ‘일본서기’의 기록에 의하면 588년에 백제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여겨진다. 따라서 직접적으로 고구려와의 관계를 찾아낼 수는 없다.

 

▲ 아스카데라 출토 사리장엄구는 조성시기를 고려하면 고구려왕이 보내준 황금과는 관계가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다만 최근 일본에서 발표된 이 금제품의 재질분석에 대한 견해는 고구려가 보냈다고 하는 금의 형태를 추정하는 데에 참고가 될 수도 있다.


분석의 대상이 된 것은 금을 얇은 판 모양으로 늘여서 만든 금제연판 7점과 낱알처럼 생긴 1점 등 모두 8점 이었다. 이 유물들은 1196년의 화재에 의해 소실된 탑 유적에서 발굴되어 다시 매장된 것이다.


분석 결과에 의하면, 8점 중에서 7점은 지금까지 출토된 고대의 금 성분의 경향과 일치하며, 나머지 1점은 가마쿠라 시대의 추가품일 가능성도 있지만 단정할 수는 없다고 한다. 더욱이 조사결과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금은의 연판이 제품이라고 하기 보다는 소재로써 한반도에서 가져와 그대로 매장한 것은 아닐까 라고 추측하고 있는 점이다.


이것을 참고하여 생각해 볼 때, 고구려에서 가져 온 금의 형태는 어떤 모양을 한 제품이 아니라 그냥 늘려서 얇게 만든 판 모양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 외에 금제품과 아스카데라와의 관계에 대해 아스카데라의 동남쪽 근처에서 발견된 연못 유적을 주목할 수 있다. 이 유적은 후혼센(富本錢 1999년 1월 나라에서 출토된 일본 동전. 7세기 후반부터 사용됐다)의 주조를 비롯하여 7세기에 많은 작업을 행했던 종합적인 공방유적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 발굴할 때는 아스카데라의 본존인 석가여래의 주조에 관한 자료가 나와 주길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 유적에는 금속제품의 공방도 포함되어 있고, 금세공을 시행한 장소도 있으며, 금 부스러기나 금가공 때 날린 금입자 등이 발견되었다. 이 유적의 조성연대에 대해서는 석가여래를 주조한 605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자료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아스카데라와 직접 관련이 있다고 얘기할 수는 없지만, 아스카데라의 여러 가지 금제품을 생각한다면, 다양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가장 중요한 유적임에 틀림없다.


아스카데라 창건 이후의 과정을 살펴보면, 헤이죠쿄(平城京) 천도(710)에 즈음하여 아스카데라는 칸코지(元興寺)로 이름을 바꿨고, 헤이죠쿄로 옮긴 후에는 모토칸코지(本元興寺)로 불렸다. 건물의 일부는 기와와 함께 옮겨졌지만, 몇몇 건물은 아스카에 남아 있었다. 이후 카마쿠라(鎌倉) 시대인 1196년에 벼락과 화재로 탑이 소실되는 등 아스카데라는 상당히 큰 타격을 받았다. 다음해 1197년에는 탑의 심초에서 사리가 발견되었으나 다시 매장되었다. 이 화재로 중금당의 석가여래도 커다란 손상을 입었다.


아스카데라와 관련한 문헌사료에는 고구려 승려와 고구려왕의 기사가 보이고, 발굴조사를 통한 가람배치에서 고구려의 영향이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앞에서도 말했듯이 아스카데라가 조영되던 당시에는 백제에서도 사리를 비롯해 승려와 각종 조영기술자가 파견돼 활동하고 있었다.

 

▲임석규 실장

이와 같이 창건되던 당시의 아스카데라는 고구려출신 혜자스님과 백제출신 혜총스님이 함께 주석하였을 뿐 아니라 여러 나라의 사람, 기술, 자재가 복합되어 있던 국제기술박람회장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을까?

 

임석규 불교문화재연구소 연구실장  noalin@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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