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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광덕산 광덕사

금강석같은 호두껍질 속 마음밭서 천년 신심 키우다

자장 율사 창건했다는 천년고찰

호서제일선원 일주문 현판 눈길

1300여년간 면면히 법등 밝혀와

 

700년전 호두나무 시배지 유명

금·은물로 쓴 묘법연화경 소장

효령대군 사경한 부모은중경도

 

 

▲호두나무는 400년간 늘 그 자리에 서 있었지만 외롭지 않았다. 천안 광덕사 문턱을 넘나들었을 수많은 기도객들 마중은 그의 몫이었으니…. 호두나무가 여름내 잘 여문 열매를 떨궜다. 하늘도 여름 떨쳐내고 가을로 물들었다. 우리네 마음엔 어떤 열매가 떨어졌을까.

 

 

‘왜일까.’


깊은 밤 호롱불빛은 효령대군 마음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효령의 눈은 어두운 광덕산을 정처 없이 더듬었다. 광덕사 경내를 넘실대던 달빛이 곰삭고 있었다. 잠을 청하지 못할 때면 으레 벗 삼던 달빛이었다. 달빛은 그와 60여년이 넘도록 말을 섞었던 벗이지만 쉽게 답을 내어 주지 않았다. ‘형 양녕대군이 세자에서 폐위되면 세자로 책봉되리라 믿었건만….’ 아버지 이방원의 선택은 책벌레였던 동생 충녕대군이었다. 충녕은 1418년 즉위해 세종대왕이라 불리며 성군이라 칭송받았다.


부처님 품에 안겨 다 내려놓은 줄 알았다. 지워버린 기억으로 알았지만 잊으려고 애썼던 상처였다. 동생이 왕위를 물려받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도피처는 불교였다. 아니다. 왕자의 난을 일으켰던 아비 태종의 성격을 알았기에 하소연 할 수도 없었다. 충녕과 우애가 깊어서였을까. 해서 말없이 동생의 즉위를 축하해야 했으리라. 말 못하는 서운함과 아쉬움이 뒤범벅된 가슴을 부처님에게라도 풀어놔야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깊어지는 체념만큼 불교는 더욱 더 그의 삶에 짙게 드리웠다. 유신들의 반대에도 스님에게 부처님 말씀을 강론토록 했다. 1435년 회암사 중수를 건의했다. ‘원각경’에 푹 빠져들어 국역해 간행하고 싶은 마음도 품었다. 그 동안 세종, 문종, 단종에 이어 세조가 즉위했다. 세월은 그의 상처를 덮는 듯 했다. ‘어리석구나. 60을 넘기고서도 과거에 집착하고 있다니.’ 잠시 바늘구멍만한 틈이라도 보이면 가차 없었다. 집착과 탐욕 덩어리가 괴롭혔다. 어차피 잠은 새벽빛에 쫓겨 사위어갔다. 그는 가부좌를 더 단단히 틀어쥐었다. 내려놓고 비울수록 자유로워진다는 부처님 말씀에 대한 믿음이 몰록 솟았다. 새벽 여명이 광덕산의 어둠을 살랐다.


 

세조 7년, 1461년 5월21일 효령은 상서로운 빛에 놀랐다. 범상치 않은 향기가 광덕산에 그득했다. 예부터 나라에 전란이 일어나거나 불길한 일이 있으면 운다는 전설이 서려있는 광덕산(廣德山)이었다. 이번엔 달랐다. 광덕산이 온통 환희로 떨고 있었다. 광덕사 대중들 모두 홀린 듯 신이한 빛과 향기를 좇았다. 효령도 뒤따랐다. 광덕사에 봉안했던 부처님 사리가 몸을 나누고 있었다. 효령은 감격에 겨웠다. ‘기이하고 기이하도다. 필시 조선에 역사가 일어나리라.’ 수습한 사리 25과를 세조에게 봉정하기로 했다.

 

세조는 상서로운 조짐이라며 자성왕비가 머물던 궁에서 함께 예불을 드린 뒤 부처님 공덕을 찬미하는 노래를 지었다. 효령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금과 은으로 쓴 화엄경과 법화경을 광덕사에 시주했다. ‘부모은중장수태골경 합부’를 자필로 사경해 아내 예성부 부인 정씨와 함께 광덕사에 시주했다. 세조는 광덕사서 조선과 백성의 안녕을 기원하고 광덕사에 땅을 하사했다. 교지까지 내려 불보살상을 조성해 봉안한 뒤 후대까지 전하라 명을 내렸다. 또 광덕사를 왕과 왕비가 발원하는 기도도량으로 삼았다.

 

 

▲ 마애금강역사 옆으로 걸으면 천불전.

 


‘불연일까.’ 천년지장기도도량이라 일컬어지는 충남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광덕사 인근 찻집에서 광덕사의 과거를 만났다. 다탁 위에 책 한 권, ‘광덕사-그 지령과 법력과 명찰’이었다. 효령대군과 세조 그리고 부처님 진신사리와 광덕사의 신이함은 ‘광덕사 사적기’, ‘화산 광덕사 사실 비명 병서’, ‘천안 광덕사 청소당대사 탑명 병서’, ‘화산 광덕사 사리각 기명’에 활자로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었다.


효령대군의 신심은 과거라는 시간의 벽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홀린 듯 호서지역에서 가장 높고 신령하다는 광덕산에 들었다. ‘태화산광덕사’라는 일주문 정면 현판 뒤 ‘호서제일선원’이라는 현판에 시선이 머물렀다. 눈길 준 뒤 광덕사로 걸음을 재촉했다. 마중은 커다란 호두나무였다.

 

2500여년전 부처님이 태어난 곳이며 깨달았던 곳이자 초전법륜을 굴렸던 곳, 입적한 곳에도 늘 나무가 있었다. 부처님 탄생부터 입멸까지 지켜본 유일무이한 목격자가 나무였으리라. 광덕사엔 호두나무가 있었다. 설에 의하면 약 700년전 고려 충렬왕 16년인 1290년 9월 영밀공 유청신 선생이 중국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올 때 호두나무 묘목과 열매를 가져왔단다. 어린 나무는 광덕사에 심고, 열매는 그의 고향집 뜰 앞에 심었다고 전해진다. 이곳이 처음 호두나무를 심었다는 얘기다.

 

 

▲ 광덕사 보화루 앞 천연기념물 제398호 호두나무.

 


광덕사 보화루 앞 호두나무(천연기념물 제398호)는 400년간 외롭지 않았을 터다. 광덕사 문턱 넘나들었을 수많은 기도객들 마중은 그의 몫이었으니…. 마침 호두나무가 여름내 잘 여문 열매를 떨궜다. 하늘도 여름 떨쳐내고 가을로 물들었다. 우리네 마음엔 어떤 열매가 떨어지려나. 모쪼록 잘 여문 신심하나 기원해본다.  보화루 처마와 처마가 끝 맞대고 살짝 꼬리 치켜 올렸다. 꼬리 위 가을하늘이 앉았다.


보화루 밑을 지나면 광덕사 대웅전이다. 호두나무보다 더 속 깊은 1300여년의 얘기가 처마 그늘 밖에 앉았다. 백제 무왕(640)때 창건 됐다고 알려진 광덕사는 신라 자장 율사가 당나라에서 수행을 마치고 귀국할 때인 643년, 진신사리 10과와 법의 그리고 화엄경 등 많은 불구(佛具)를 전했다고 한다. 이후 진산 스님이 중창불사하며 암자 89개를 거느린 대암자로 경기도와 충청도에서 제일가는 사찰이었단다. 그러나 임진왜란은 광덕사를 잿더미로 만들었고 희묵 스님이 광덕사만 복원한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 광덕사는 1972년 주지로 부임한 철웅 스님의 불사원력으로 사격을 갖췄다.

 

 

▲ 보화루 밑을 지나면 광덕사 대웅전이다. 호두나무보다 더 속 깊은 얘기가 처마 그늘 밖에 앉았다.

 


광덕사에는 1300여년 동안 법등을 꺼뜨리지 않았다는 증거가 남아있었다. 감지은니묘법연화경(보물 제269호), 감지금니묘법연화경(보물 제270호), 세조가 내린 문서 감역교지(보물 제1246호), 조선사경(보물 제1247호), 광덕사 노사나불 괘불탱(보물 제1261호) 등.

 

조선사경은 효령대군이 직접 사경한 부모은중경과 장수멸죄호제동자다라니경이다. 특히 광덕사는 철원 심원사, 고창 선운사 도솔암과 함께 국내 3대 지장도량으로 일컬어지는데, 이는 광덕사 고려사경(보물 390호)에 법이 서려있다고 한다. 대웅전 옆 명부전 지장보살의 위엄에 천년지장기도도량이라는 말을 실감했다. 꽃과 잎이 따로 펴 만날 수 없는 상사화가 명부전 뒤를 노랗게 장엄했다. 꽃과 잎이 석별이다. 생과 사가 이별이다.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다. 하나 명부전 지장보살님은 영가를 극락왕생으로 인도하며 유족의 사랑을 전하실터다. 

 

 

▲ 천년지장기도도량의 명부전 지장보살님.

 


보화루를 지나 초록 잔디 가르는 돌길 따라 걸음 옮기면 대웅전이다. 마음은 대웅전 계단 양쪽에 돌사자 한 쌍(문화재자료 제252호)으로 향했다. 왼쪽은 입을 다물고 있고 오른쪽은 입가에 미소를 걸쳤다.

 

들숨에 ‘아’, 날숨에 ‘훔’하는 금강역사처럼 돌사자 한 쌍도 대웅전의 불법을 지키고 섰다. ‘아훔’, 범어로는 시작과 끝이다. 깨달음의 처음과 끝을 흔들림 없이 수호하는 금강역사처럼 돌사자 한 쌍이 대웅전에 들려는 객의 삿됨을 물리치려는 게 아닐까. 대웅전 오른쪽 길을 따르면 산신각, 천불전, 오층석탑, 부도탑을 만날 수 있었다. 부도탑 참배하고 오층석탑 바위 위 돌탑들 바라보며 천불전에 들려는 찰나, 천불전으로 향하는 다리 앞에 버티고 선 마애금강역사 눈빛에 마음이 멎었다.

 

 

▲ 대웅전 계단 초입 돌사자상. 좌우로 하나씩  한 쌍이다.

 


정지한 마음에 ‘우아한 가난뱅이’가 되고 싶다던 주지 석우 스님 말씀이 파고든다. 주름지고 단단한 호두껍질 속에서 호두가 자란다. 부처님 말씀에 대한 금강석처럼 단단한 마음이 거칠지라도 그 껍데기 속에서 여무는 게 신심이다. ‘껍데기는 가라’고 외치지 말라. 알맹이 키운 건 인고의 세월 속 거친 풍파와 벌레를 막아 낸 껍데기다. 껍데기는 볼 품 없어도 열매 안고 있어 우아하다.


광덕사 찾은 날, 주지스님이 호두열매를 거뒀다. 041)567-0050

 

최호승 기자 time@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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