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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부여 만수산 무량사

기자명 법보신문

풍자로 세속 경책한 김시습의 기상, 예서 가을에 젖다

통일신라때 범일 국사 창건
보물 석탑서 다라니경 발견
소조삼존불 동양 최대 규모

 

김시습이 생 마쳤던 고찰
무진암 가는 언덕에  시비
문학관 조성…창작 산실로

 

"매월당 설잠 김시습을 3년 후 장사지내려
빈소를 여니 얼굴빛이 산 사람 같았다.
승려들이 모두 놀라
‘부처’라고 탄했다."

 

 

▲시국이 수상할 때면 무량사 경내가 분주했고 이곳에서 세 번의 역모 모의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비에 젖은 무량사는 한 폭의 수묵화였다. 그 속에 안기면 누구나 풍경의 일부가 됐다. 무량사, 곱게 늙었다.

 

 

마음 속의 부여는 애틋하다. 찾을 때마다 부여는 야트막하다. 그만그만한 길에 그만그만한 산이 풀어져 있다. 과거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마을들은 그 길 옆에, 그 산 밑에 다소곳이 모여 있다. 그래서인지 부여의 절들은 요란하지 않다.


부여의 절, 만수산 무량사(주지 제민 스님)를 찾아간 날 종일 비가 내렸다. 산사로 가는 길은 ‘무량마을’ 표지석 뒤편으로 곧게 뻗어있다. 마을을 빠져 나온 길은 비에 젖었지만 정갈했다. 이윽고 일주문이 나타났다. ‘萬壽山 無量寺’(만수산 무량사). 일주문 지붕이 무거워 보였지만 다행히 이를 받치는 두 다리가 튼튼했다.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에 이르는 길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다리를 건너 무진암으로 가는 언덕에 매월당 김시습의 시비가 서 있다.


“새로운 반달이 나뭇가지 위에 뜨니/ 산사의 저녁종이 울리기 시작하네/ 달그림자 아른아른 찬 이슬에 젖는데/ 뜰에 찬 서늘한 기운 창틈으로 스미네.”


무량사는 김시습이 생을 마친 곳이다. 그가 가을 저녁 산사에서 바라본 달은 어떠했을까. 천왕문을 지나 경내에 들어서자 너른 마당이 펼쳐졌다. 그리고 정면으로 극락전이 보였다. 그 뒤로 만수산이 기꺼이 병풍을 자처하고 있었다. 극락전은 참으로 실로 우아했다. 절은 곱게 늙어있었다. 단청이 벗겨진 모습이 오히려 단아했다. 깊게 휜 처마선은 엄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헤프지도 않았다. 지붕선은 주변 만수산 능선을 닮아있었다. 거대한 지붕을 받들고 있는 배흘림기둥은 정겹다. 저렇게 자연을 불러들여 하늘 아래 편한 집을 지은 이들은 누구일까.

 

 

▲비가 가을을 끼얹은 부여 만수산에 고찰 무량사가 한갓지다.

 


경내 아름드리 느티나무 한 귀퉁이에 단풍물이 들었다. 비가 가을을 끼얹으면 만수산의 단풍이 서둘러 내려올 것이다. 극락전 앞에는 석등(보물 제233호), 오층석탑(보물 제185호)이 일직선으로 서 있다. 석등과 석탑은 신라 말이나 고려 초에 조성됐을 것으로 추정됐다. 등은 경쾌하고 날렵하며 탑은 묵직하고 미더웠다. 1971년 오층탑 보수 때에는 5층 몸돌에서 수정병, 다라니경, 향가루 등이 1층 몸돌에서는 고려시대 금동아마타삼존불이 나왔다.


극락전은 밖에서 보기에는 2층이지만 안은 통층으로 천장이 높다. 그 안에 거대한 소조 삼존불(보물 제1565호)을 모셔놓고 있다. 가운데 아미타불, 좌우에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모셔놓았다. 흙으로 빚은 소조불로는 동양 최대의 규모라고 한다.


무량사는 통일신라 문성왕 때 범일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다. 문헌마다 조금씩 다르다. 5층 석탑이 백제 양식임을 감안해 백제시대 때 창건했을 것이라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 무량사는 고려시대 고종 때 크게 중창되었다. 60만평에 대웅전, 천불전, 극락전 등이 있었다. 천불전은 5층이었다. 9개의 문을 넘어야 경내가 나타났고, 12개의 부속 암자에 승방 수가 무려 30여 채였다. 주지 제민 스님은 문헌에 전해진 옛날의 무량사를 그려보면 지금의 법주사 모습이 떠오른다고 했다.

 

 

▲주지 제민 스님은 설렌다. 김시습 문학관이 생길 순간 때문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고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그 후 1633년 (조선 인조 11) 진묵 스님에 의해 중수되었다. 지금의 극락전은 그때 조성되었다.


무량사에는 매월당 김시습의 부도와 영정이 있다. 김시습이 누구인가. 김시습(1435~1493)은 어릴 때부터 총명해서 그 이름을 세상에 떨쳤다. 5세 때 세종에게 불려가 그 앞에서 시를 지어 백관들을 놀라게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름 대신 ‘김오세(五歲)’라고 불렀다. 세종은 훗날 장성하면 나라의 일꾼으로 쓰겠다는 약조까지 했다.


그러나 그의 재주는 나라를 위해 쓰이지 못했다. 21세 때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했기 때문이었다. 삼각산 중흥사에서 공부하던 시습에게는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읽던 책을 불태우고 통곡했다.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방랑길에 올랐다. 승명은 설잠(雪岑)이었다. 전국을 돌다가 경주 남산, 당시 이름으로는 금오산에 은거해서 첫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었다. ‘금오신화’는 속세의 명리를 좇지 않는 순수한 인간상을 그렸다.


김시습의 성품과 인간관을 잘 드러내 보여 주는 일화가 있다. 10년이 넘은 오랜 은거 끝에 잠시 서울에 머물었을 때의 일이다. 그때에 길을 가다가 한명회가 지은 정자(압구정)에 걸린 현판시를 보게 되었다. 한명회는 세조의 정변에 합세해서 부와 권세를 움켜쥔 당대의 세도가였다.


“젊어서는 사직을 붙잡고, 늙어서는 강호에 묻힌다(靑春扶社稷 白首臥江湖).”


이 글을 보고 시습은 붓을 들어 ‘부(扶)’ 자를 ‘망(亡)’자로, ‘와(臥)’자를 ‘오(汚)’자로 고쳐 버렸다. 그러니 그 뜻이 이렇게 바뀌었다.


“젊어서는 사직을 망치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힌다.”


통렬한 풍자였다. 세상을 등진 김시습이었기에 가능했지만, 또 세상이 그를 알아줬기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는 만인이 알아주는 생육신이었다.


율곡 이이(李珥)는 왕명을 받고 지은 ‘김시습전’에서 이렇게 평했다.


“그의 뜻은 일월과 그 빛을 다투게 되고 그의 품성을 듣는 사람들은 겁쟁이도 용동하는 것을 보면 가히 백세의 스승이 되고 남음이 있다.”


시습은 1483년 무량사에 들었다. 유교의 근간을 흔든 세조의 패륜을 조소하고 영혼을 파는 무리를 꾸짖으며 거침없는 삶을 살았던 그에게도 안식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는 생을 마감하기 위해 무량사에 들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기 위해, 영원한 삶을 살기 위해 부처님 앞에 엎드렸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무량사에서 입적했다. 그의 나이 59세였다. 율곡은 무량사에서의 마지막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김시습은) 유언으로 화장을 하지 말라 했다. 임시로 절 옆에 묻었다가, 3년 후에 장사지내려 빈소를 여니 얼굴빛이 산 사람 같았다. 승려들이 놀라 모두 ‘부처’라고 탄했다. 다비 의식을 치르고 그 뼈를 모아 부도를 만들었다.”


승려들이 부처라고 여겼다면 그는 고승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설잠 스님 부도비’라 하지 않고 ‘김시습 부도비’라 했을까. 그것은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의 풍조로는 빼어난 사상가가 불교에 귀의했음을 전적으로 수긍하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비록 뛰어난 유학자이고 노장사상의 대가였지만 최후는 불자였다. 따라서 ‘행적은 승려지만 본 마음은 유학자’라는 비승비속(非僧非俗)의 평가는 새롭게 정리해야 할 것이다.


그는 비록 유학에 젖어 살았지만 마지막은 분명 승려였다.

 

 

▲극락전 안 거대한 소조 삼존불은 흙으로 빚은 소조불로 동양 최대 규모라고 한다.

 


지난 해 주지로 부임한 제민 스님은 무량사가 그 옛날 그 모습을 찾는데 작은 초석을 놓겠다고 했다. 스님은 무량사에 깃들어 있던 많은 문화재들이 분실되었다고 안타까워했다. 최근까지도 무량사지에서 나온 거대한 돌 수백 트럭분이 어디론가 실려 갔다고 한다. 산사 아래 무량마을에서 떠도는 얘기도 소개했다. 해방이 되자 일본인들이 무량사지에 산재한 문화재들을 우물에 묻었단다. 그리고 우물을 메워 그 흔적을 지우고 도망쳤단다. 지금도 마을 노인들은 어딘가 우물 속에 성보들이 묻혀있다고 믿고 있다. 실제로 그런 소문을 좇아 마을 사람들이 떼지어 무량사 주변을 파헤치기도 했단다.


제민 스님은 또 1971년에 석탑에서 나와 조계종 박물관에 계신 금동아미타삼존불을 다시 모셔오고 싶다고 했다. 물론 부처가 계실 것은 박물관이 아니라 절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부처가 다시 오실 신행공간은 어떻게 조성해야 할 것인가. 스님은 그런저런 생각에 가슴이 뛰기도 하고 또 그런 설렘에 경내를 서성거리는 일이 잦다고 했다. 스님은 또 김시습문학관을 만들어 무량사를 창작의 산실로 만들고 싶어 했다.


시국이 수상할 때면 무량사 경내가 분주했고, 이곳에서 세 번의 역모 모의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비에 젖은 무량사는 한 폭의 수묵화였다. 그 속에 안기면 누구나 풍경의 일부가 되었다. 이제는 옛날의 비범한 신열을 다 씻기고 절은 편안하다. 다가가면 절보다 가을이 먼저 반기는 부여의 무량사. 

 

본지 고문 김택근 wtk22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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