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 문경 도천사지

기자명 법보신문

한국 불교사에서 등장하는 유일한 3탑 양식 가람

1970년 문경 도천사지서
통일신라 석탑 3기 발견

도천사 탑지 조사 결과
창건 때부터 나란히 배치


1탑·2탑 가람이 전통양식
3탑은 역사 기록에도 없어
새 가람양식 이해의 단초

 

 

▲문경 도천사지에서 발견된 3기의 석탑들은 현재 직지사로 이전돼 대웅전 앞에 2기, 비로전 앞에 1기가 복원돼 세워졌다. 사진은 직지사 대웅전 앞의 2기.

 


1970년 1월13일자 한국일보에는 문경에서 통일신라시대 석탑 3기가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사진과 함께 크게 실렸다. 석탑들은 모두 무너져있으나 복원하면 8m가 넘는 국보급 석탑이라고 보도하였다. 바로 현재 김천 직지사에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3기의 석탑들이다. 신문에 등장하고 4년 뒤 이 탑들은 직지사에 이전 복원되었으나 원래대로 3기가 같이 있지 못하고, 2기는 대웅전 앞에, 1기는 비로전 앞에 세워졌다. 3기 모두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안내판에는 문경 도천사지에서 옮겨온 것이라 되어있다.


도천사라는 사명은 道川寺, 道天寺, 道泉寺 등 다양하게 불리고 있지만, 현존 조선시대 상주 및 문경지역 고문헌에서 도천사란 사명이 보이는 자료는 없다. 지금의 도천사라는 폐사지의 개창 및 폐사 시기 역시 알 수 없다. 다만 개창 시기는 현재 직지사로 옮겨간 삼층석탑의 제작시기를 통해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고, 아울러 폐사지에서 수습되는 각종 유물, 특히 기와편 등을 통해서도 가능하리라 판단된다.


먼저 사명을 살펴보면, 일제강점기 때 공문서 기록인 1916년 8월19일과 9월20일 고탑도매(古塔盜賣) 사건 기록을 보면 당시 폐사지의 변화양상과 사명, 석탑을 매매하려는 사건 연유 등을 살펴볼 수 있다. 기록을 정리하면, 경상북도 문경군 산북면 청구리 4통 5호 채국진(蔡國鎭)이란 사람이 면내 서중리 수계원 폐사지에 유존하는 3기의 석탑을 자기 소유라고 하고, 1916년 1월에 경성 파송관(巴城館) 호텔의 송본민개(松本民介)에게 매각하였다. 같은 해 1월19일 면장에게 석탑의 소유자임을 증명하고 헌병파견소장이 반출허가를 줌에 따라 이에 보고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경무총장은 고탑도매 사건을 보고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산북면 채광진을 취조한 결과, 폐사지에 석탑 3기는 역사상 기록이 없지만 마을 주변의 전설에 신라시대 영원사에 있던 것이라고 한다.


폐사지에는 주변 지역 양반들의 집합소인 도천사(道川祠)라는 건물이 건립되었고, 건물은 후에 연계소(蓮桂所)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30년 전에 채광진이 폐사지내 건물부지를 비롯해 지상에 존재하는 석탑 및 부속물 일체를 60원에 매수한 것이었다. 석탑을 운반하려고 상부를 내려놓은 3기 중 2기는 원상으로 복원하고 매매계약을 해약케 했다. 또 이후로 매매 또는 타인에게 이전하지 않도록 방지책을 마련하기도 했다. 즉 채광진 소유의 폐사지에 있던 석탑을 채국진이란 사람이 몰래 경성의 파성관 호텔 주인인 일본인에게 매각하려다 고소된 사건이다.


이 기록에서 크게 세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먼저 사명인 도천사는 1916년경의 일제강점기 때까지만 해도 사용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즉 주민들은 신라시대에 개창된 영원사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도천사라는 사명은 조선후기 폐사지에 지역 양반들의 집합소였던 도천사(후에 연계소)가 건립됨에 따라 이를 지금의 사명으로 잘못 부르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지역 주민들에게 전해져 오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문헌기록이 없는 상황에서 도천사보다는 오히려 영원사라는 사명이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두 번째로 사찰이 폐사된 이후 지역 유지의 집합소 건물이 건립되는 등 뚜렷한 토지 소유자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880년경에 산북면에 사는 채광진이 폐사지 부지 및 석탑과 부속물일체를 매수한 것이다. 이것이 지금까지 사역 일부가 인천 채씨 문중의 소유로 된 연유로 보여진다.


세 번째로 채국진이 폐사지에 있던 석탑 3기를 반출하려고 당시에 해체하였고, 이들 2기는 원상대로 복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74년 김천 직지사로 옮겨가지 전, 석탑은 거의 도괴된 상태로 남아 있었다. 도매사건이후에 인위적으로 도괴한 것으로 보인다.

 

 

▲1960년대 문경 도천사지 석탑 사진.

 


현재 폐사지의 사역은 넓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장조사 결과, 석탑의 제작시기에 상응하는 기와편, 전돌편, 귀면와 등의 유물이 확인되었다. 유물의 산포 범위는 현재 구릉의 남동사면에 있는 3기의 인천 채씨 묘역이 있는 산북면 서중리 57-1번지를 포함한 그 남쪽의 서중리 56, 65, 66, 67번지일대 계단식 밭 일대까지이다. 대체적으로 추정 사역 내에서는 기와편, 전돌편, 토기 및 자기편 등이 확인된다.


도천사지 삼층석탑은 동일 규모에 동일 양식으로 제작된 3기가 존재한 점은 우리나라 사찰 가람 내 석탑의 배치 및 구성 체계상 주목할 가치가 있다. 통상 1탑 가람이 유행했던 삼국시대와 2탑식 가람이 성행했던 통일신라시대와 달리 3탑 가람의 예는 없다. 다만 신라 847년에 창건된 충청남도 보령군 소재의 성주사지(聖住寺址)에 4기의 석탑 중 금당지 뒤로 3기의 동형 석탑이 일렬로 배치된 예가 있다. 성주사지 석탑 중 5층석탑은 금당지 정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중문, 석탑, 금당이 일직선상에 놓여 1탑1금당의 고식배치 체계이다. ‘성주사사적기’에 따르면 석가여래사리탑이라고 한다. 그리고 금당지 뒤쪽에 일렬로 배치된 3기의 석탑은 정광여래, 석가여래, 약사여래의 삼존상이 다층방탑형의 석탑으로 배치된 특이한 형태라는 견해가 있다.


그런데 성주사지 발굴보고서에 의하면 3기의 성주사지 삼층석탑들은 원위치가 아니고 14세기 이후에 옮겨온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렇다면 도천사지의 탑들은 모두 창건기에 조성된 것일까? 다행히 문경시에서는 도천사지가 자리잡고 있는 금천(錦川) 주변의 마을과 유적을 정비하여 관광자원화하기 위해 우선 탑지에 대한 조사를 불교문화재연구소에 의뢰하였다.


시굴조사 결과 석탑 3기가 있던 장소를 확정할 수 있었다. 지상의 탑은 모두 옮겨져 아무런 흔적도 없었으나, 지하에서 탑을 세우기 위해 설치한 적심시설을 확인한 것이다. 성주사지의 경우는 적심시설이 발견되지 않았고, 탑 하부에서 조선시대 자기가 발견되어 조선시대 이후 탑을 이건한 것으로 밖에 생각할 수 없지만, 도천사지는 명실공이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3기의 거대한 석탑이 나란히 있었던 유일한 사지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식으로 석탑을 배치한 배경은 무엇일까? 아직 이와 관련된 아무런 연구성과도 없다. 다만 일본의 돗도리켄 사이하쿠군 요도에죠 후쿠오카지(鳥取縣西伯郡淀江町福岡地)에 있는 카미요도(上淀) 폐사에도 삼탑의 흔적이 있어서 주목된다. 카미요도폐사는 7세기말에 건립된 사찰의 유적이다. 사찰의 원 명칭을 알 수 없어서 지역명과 관련지어 카미요도폐사라고 부르고 있다.


이 지역은 일본해와 접해있는데, 현재 논으로 사용되고 있는 요도에(淀江)평야는 이전에는 천연의 포구로서 여러 지역과 교류가 활발했던 대외활동의 거점이었다.


이 사찰에 대한 발굴조사는 1990년부터 1993년까지 5차에 걸쳐 이루어졌다. 발굴 결과 유적에서는 금당과 탑지를 확인했으며, 부속 건물지도 다수 발견되었다. 전체적인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금당 동쪽에 남북으로 2기의 탑이 있었으며, 다시 1기의 탑 심초가 더 설치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창건 당초는 3탑의 건립을 계획했었다고 생각되지만 제3의 탑 심초에는 기단이 설치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는 2탑을 건립했었다고 추정된다. 다른 곳에서는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매우 독특한 가람배치이다.

 

 

▲문경 도천사지 탑지 노출 현황.

 


창건 시기는 북탑 유적에서 계미년(癸未年, 683)명 기와가 출토되어 적어도 이 무렵에는 사원이 조영되었고 또한 헤이안시대 중, 후기에 화재에 의해 폐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금당지의 규모는 남북 12.4m, 동서 14.8m이고, 2중 기단을 사용하였으며, 남향하고 있다. 금당 내에는 많은 불상이 안치되어 있었으며, 내벽에 채색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탑지는 금당의 동쪽에 3기의 탑지가 남북으로 나란히 발견되었으나 실제로 존재했던 것은 중탑과 남탑 2기라고 보여 진다. 탑지에서 주목할 부분은 기단부인데 이 사찰에서는 기단을 기와로 쌓은 와적기단으로 장식하였다. 돗토리현 내에서 와적기단을 사용한 예는 다이지(大寺)폐사 뿐이고, 인근 시마네현에서도 와적기단을 사용한 예를 전혀 찾을 수 없다. 일반적으로 일본에서 와적기단을 사용한 사찰은 대부분 도래계 씨족이 관계된 사찰인데, 교토 야마시로죠(京都府山城町)에 있는 코마데라(高麗寺)는 고구려계 고마씨가 단월로 참가한 사찰이다.


카미요도폐사는 와적기단뿐 아니라 출토된 벽화편들에서도 고구려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되는 사찰이기 때문에 고대 한일교류관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생각되는 곳이다.

 

▲임석규 실장

문경의 도천사지는 동일한 석탑 3기가 나란히 세워져 있던 국내 하나 뿐인 사찰이었다. 훗날 복원되어 금천 건너편에서 탑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면 그 위세가 대단할 것으로 생각된다. 국내에 동일한 석탑 3기가 나란히 세워진 예도 없을 뿐만 강안에 연이어 건립된 모습은 매우 아름다운 전경이 될 것이다. 그 날을 기대한다.

 

임석규 불교문화재연구소 연구실장  noalin@daum.net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