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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배츨러 불교명상지도자

기자명 법보신문

화두, ‘고요에 머물려는 마음’ 깨달음으로 이끄는 원동력

현대 명상의 호흡 관찰은
마음의 고요 불러오지만
고요에만 머무는 경우 많아
구산 스님의 화두선 지도는
끊임없는 질문에 대한 강조

 

 

▲ 마틴 배츨러

 


구산 스님은 전통적이면서도 현대적이었습니다. 그가 가르치는 스타일은 한결같았습니다. 70년대 당시 스님은 한국인 선사로서는 최초로 서양인들을 제자로 받아주었고 나중에는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 온 사람들까지 송광사의 비구·비구니로 받아주었습니다. 한국의 예절이나 연장자를 대하는 올바른 태도를 알지 못하는 서양인들을 다그치지 않았고 매우 친절했습니다. 구산 스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들이 열심히 수습하고 큰 의심을 계발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구산 스님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스님을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젊은 여자일 뿐이었습니다. 스님은 통역을 맡은 로버트 버스웰(당시 해명 스님)을 사이에 두고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머뭇거리며 “두 사람이 마주보고 미소 짓는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스님은 “나쁜 대답은 아니지만 자신의 마음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무엇인가(이뭣고)”라는 질문을 명상하라고 했습니다.


나는 수년에 걸쳐 한국어를 배웠고 구산 스님이 외국인 손님들과 있을 때 통역을 돕기도 했습니다. 나는 스님이 나이, 성별, 지위, 국적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이뭣고’라는 똑같은 화두를 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선사들의 전설이나 일화들에 매혹된 젊은 현대 여성이었던 나는 처음에는 구산 스님이 ‘오리지널 선사’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나는 ‘선사란 기이한 일들을 하거나 같은 말을 두 번 하는 법이 절대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날 나는 구산 스님이 ‘위대한 믿음’을 보여주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누구든지 화두로써 수습하고 깨달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만난 사람들 하나하나가 깨달을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고 ‘이뭣고’는 그들의 깨달음에 대한 직접적인 길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구산 스님은 법문하실 때 종종 “계율, 선정, 지혜라는 세 가지를 함께 닦아야 한다”고 강조하셨는데 이것은 우리의 수행을 적절하고 완전하게 확립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스님은 이것을 다리 세 개로 지탱하는 주전자 받침과 비교하면서 다리가 하나나 둘 일 때는 그 주전자 받침이 쓸모없게 된다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수행에 대한 이러한 접근이 오늘날에는 그다지 강조되지 않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선정이 계율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도덕성에 관해서는 쉽게 잊으며, 명상의 돌파구들과 깊이를 동일시하기 쉽습니다. 서양 문화에서 명상을 가르칠 때 시급한 문제 중 하나가, 구산 스님처럼, 생활 전반에 적용되고 영감을 주는 엄격한 윤리적 전통을 기억하고 본보기로 삼는 것입니다. 원효대사는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습니다. ‘선정을 잘 닦았더라도 계율을 지키지 않은 자는 보물 창고로 가는 길을 보고도 가지 않는 것과 같다.’


이것이 구산 스님이 육바라밀을 가르친 이유의 핵심입니다. 스님은 여기에 일곱 번째 바라밀을 추가하여 일주일의 칠일에 각각 대응시켰는데 이는 매우 현대적이었습니다. 특히 바라밀을 사람들과의 만남이나 법문을 가르치는 방법으로 참신하고 다양하게 적용할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영국에 있는 불교센터에 갔을 때 나는 주말동안 선 강습을 요청받았습니다. 우리는 한국 선방에서 하던 방식 그대로 50분 앉고 10분 걷기를 하루 종일 반복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르쳤던 사람들은 앉아서 명상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말이 끝날 즈음에는 거의 걸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화두선은 매우 중요해서 반드시 가르쳐야 했기 때문에 우리는 앉는 시간을 좀 줄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35분 앉아 있고 10분 걷는 것을 반복했고 그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더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우리는 또 그들이 원하면 의자에 앉는 것도 허용했습니다.


구산 스님은 명상에 들어 있을 때의 ‘성성적적’ 상태에 대해 강조하곤 했습니다. 그는 자주 우리가 그것들을 똑같이 계발하도록 고무시켰습니다. ‘성성’은 수행의 밝은 성질을 의미하고 ‘적적’은 평온한 성질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깊은 집중 상태와 탐구를 똑같이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화두는 우리가 계속해서 다시 돌아올 수 있는 닻의 역할을 합니다. 그와 동시에 만트라처럼 ‘이뭣고’만을 되풀이하지 않는습니다. 반대로 당혹감과 큰 의심을 계발할 필요가 있는 만큼, 질문에 대해 엄청난 감각으로 탐구를 계속 해야 합니다.


현대의 명상은 일반적으로 숨을 관찰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수행자는 숨을 관찰하는 것 뿐 아니라 숨을 세거나, 그것의 무상함과 조건 지어진 본성을 알아차리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종종 사람들이 단지 마음을 고요하게 하기 위해 숨에 집중하여 머물기만 하고 거기에 멈춰버리고 더 이상 진전하지 않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뭣고’라고 질문하는 것을 신선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수행에 활기를 불어넣고 수행을 더욱더 신선하고 활력 넘치게 하기 위해 ‘질문’이라는 요소를 부여합니다. 영가 현각 스님이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수행자가 앎 없이 고요함에만 머문다면 그것은 어리석음에 빠지는 것을 뜻하고, 고요함 없이 앎에만 머문다면 그것은 자신의 생각에만 얽매이는 것을 뜻한다. 수행자가 앎도 고요함도 없는 상태에 있다면 그는 생각에 얽매일 뿐 아니라 어리석음에 잠식된 것이다.”


내가 느끼는 이것이 간화선이 현대 명상에 가져온 것입니다.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에 대해 강조하고, 기분 좋은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는 것. 구산 스님은 그것을 가르치는 선사였고 우리는 그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르는 제자들로서 그러한 질문을 우리의 수행 뿐 아니라 삶속에서도 살아있도록 유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구산 스님 아래 10년 동안 송광사에서 수행하며 느낀 또 하나는 돈오점수의 계보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과학적 배경을 가진 현대인들에게는 돈오돈수(頓悟頓修)보다 훨씬 더 쉬운 개념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깨달았다고 말은 하지만 그들 중 대부분은 그 전과 다르지 않게 행동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현대인들에게 충격적인 부분이고 그들은 ‘명상이 소용 있는가? 없는가?’, ‘깨달음이 나의 고통을 멈출 것인가?’, ‘명상하는 핵심이 무엇인가?’, ‘깨달음은 무엇인가’, ‘나와 주변에 고통을 주는 오랜 습관들에서 벗어나도록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 등의 질문을 합니다. 그들은 이번 생에서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열망합니다.


명상 속에서 경험하고 갑작스러운 깨달음을 얻는 것은 쉽지만 그것을 일상생활에서 실체화시키고 그 관점을 견지하며 사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리고 보조 스님께서 지적하셨듯이 우리를 제한하고 막는 것은 우리의 습관입니다. 우리는 많은 정신적·감정적·신체적·관계적 습관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해체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립니다. 수행은 그러한 해체의 과정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화두로 되돌아오는 매 순간마다 정신적인 확산을 멈출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그러한 힘을 줄이고, 그로 인해 그 본래의 창조적인 기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구산 스님은 말년에, 송광사에서 내가 머물던 화엄전으로 오셔서 함께 산책하자고 제안하시곤 하셨습니다. 병석에 눕기 얼마 전에도 스님과 함께 잠깐 산책을 했는데, 어느 정도 걸었을 때 스님은 늙은 나무 둔치에 앉았습니다. 그리고서 스님은 우리가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준비된 상태로 마지막 숨을 거두기 위해 끝까지 명상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수행해야 하는 이유였습니다. 나는 매우 감동받았고 그의 말에 숙연해졌습니다. 그것은 겸손과 무상함에 대한 위대한 수업이었습니다.


법문하는 도중 스님은 종종 시계가 ‘똑딱’이는 것을 가리켜 위대한 다르마의 스승이라고 했습니다. 똑딱거리는 소리 각각마다 우리의 삶이 지나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자기 자신과 타인을 위해 수행하고 지혜와 자비를 계발하는 것은 매우 시급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스님이 말했던 또 다른 것은 우리의 삶이 숨 한 번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이것은 우리가 안주하지 않고 우리와 타인의 생명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말라는 절박함의 메시지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수행해야 합니다.


정리=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이 강연은 구산 스님 열반 30주기를 맞아 보조사상연구원이 ‘구산 스님의 생애와 한국 선(禪)의 세계화’를 주제로 10월4일 법련사 대웅보전에서 개최한 국제학술대회에서 불교명상지도자 마틴 배츨러씨가 ‘화두선과 현대의 만남’을 주제로 발표한 내용을 요약 게재한 것입니다.

 



마틴배츨러

열여덟살 때 ‘법구경’을 처음 접한 후 ‘세상을 바꾸는 것 보다 나 자신을 바꾸는 것이 낫다’는 결심을 하고 22세 되던 1975년 한국에서 출가했다. 송광사 구산 스님 문하에서 십 년간 간화선을 수행하며 구산 스님의 유럽 강연에 통역으로 동행하기도 했다. 1985년 환계 후 고국으로 돌아가 한국선과 수행가풍을 전하는 불교명상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에서의 수행경험과 인연담을 엮은 저서 ‘출가 10년 나를 낮추다’를 2011년 출간했다.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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