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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서운산 청룡사

반야용선 태울 중생 기다리며 세월도 쉬어가다

고려 공민왕 때 나옹 스님 중창

상서로운 구름 피어오른 곳에서

용 오르내렸다해서 청룡사 명명

 

왕실 원찰로 극락왕생 빌던 절

인로왕보살 반야용선 벽화 눈길

 

 

▲ 무슨 미련일까. 안성 청룡사 대웅전에는 시간이 쉬고 있었다. 대웅전 기둥은 몸에 700여년의 세월을 새긴 채 제자리였다. 위아래로 굽이쳐 흐르던 시간이 주름처럼 남았다. 대웅전 위 파란 가을하늘에 흰 구름만 유유히 흘렀다.

 

 

외진 곳은 모든 게 드물다. 인기척도 시간도 드문드문 했다. 가을도 오는 둥 마는 둥이다. 안성 서운산 청룡사가 그랬다. 서운면 청룡리라는 경기도 끝자락에, 충청북도와 마주하는 곳에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세속과는 다르게 시간이 쉬엄쉬엄 흘렀다.


가지런한 돌담장 따라 초목들 사이로 걷다보면 오른쪽 돌계단 위 사천왕문이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돌담장 옆에 있던 장독 몇 개에 눈길이 갔다. 사실 장독에 놓인 염주 두 개가 마음을 빼앗았다. 뒤늦게 일주문을 찾아봐야 도리 없다. 이미 마음은 세속과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 발을 들였으니….


청룡사에는 따로 일주문이 없었다. 서운산이 세속을 멀리하고 있으니 그럴 법도 했다. 548m 높이의 서운산은 예나 지금이나 상서로운 기운이 서려있단다. ‘세종실록지리지’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청룡산(靑龍山)이라고 쓰인 서운산은 서쪽 봉우리에 단(壇)이 있고, 단 아래 세 우물이 있었다. 하늘이 비를 내리지 않아 가물면 우물을 깨끗이 하고 빌면 자못 영험이 있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청룡사와 석남사가 서운산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우제를 지냈던 제단이나 사찰이 있었다고 하니, 옛 사람들이 서운산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 세월 무게로 내려앉는 서까래를 나무가 떠받치고 있는 대웅전.

 


‘서운산 청룡사(瑞雲山 靑龍寺)’ 편액이 걸린 문 없는 사천왕문을 올려다보면 더디 흐르는 시간과 마주한다. 네모난 공간 사이로 보이는 대웅전이 발길을 붙잡는다. 예서 잠시 쉬어가는 시간 속 이야기를 들어보라 속삭인다. 합장하며 사천왕문을 들어서는 순간, 마음은 옛 시간으로 빨려 들어갔다.


고려 원종 6년(1265)에 명본 스님이 대장암으로 창건한 청룡사는 공민왕 13년(1364) 현재의 이름을 갖게 됐다.

 

나옹 스님이었다. 스님은 대장암이 있던 산을 지나면서 놀라운 경험을 했다. 지혜의 해가 거듭 빛났고 자비로운 구름이 광채를 내고 있었다. ‘과연, 이곳에 실로 신비한 징조가 있겠구나.’ 몸과 마음을 하루 의탁한 스님은 신이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꽃비가 내렸다. 하늘엔 상서로운 구름이 일었고, 용이 오르내렸다. ‘불법이 뻗어 나가기에 이만한 곳이 없다.’ 두 눈으로 이 모습을 친견한 스님은 대장암에 주석하며 절을 중창했다. 산 이름을 고쳤다. 상서로울 ‘서(瑞)’자와 구름 ‘운(雲)’자를 써서 ‘서운산(瑞雲山)’이라 했다. 절 이름도 용이 오르내리는 일을 떠올리며 ‘청룡사(靑龍寺)’라 명명했다.


사적비에 따르면 나옹 스님은 대웅전과 지장전, 만세루, 향응각, 극락전, 은적암, 은신암, 청련암, 내원암을 지었단다. 현재 암자는 은적암만 남았다. 숙종 46년(1720) 사간 스님 중심으로 돼 사찰을 중수하고 마을 어귀에 있는 사적비를 세웠다. 유관 스님이 헌종 15년(1849), 하월 스님이 철종 14년(1863)에 보수했으며 고종 18년(1881)엔 한주 스님이 중수했다. 고종 때 중수한 모습으로 현재에 이른단다.


현실로 돌아오기엔 청룡사 대웅전은 매력적이었다. 무슨 미련일까. 시간이 대웅전 곁에서 쉬고 있었다. 대웅전 기둥은 몸에 700여년의 세월을 새긴 채 제자리였다. 위아래로 굽이쳐 흐르던 시간이 주름처럼 남아 있었다. 그렇게 구불구불한 아름드리나무가 껍질만 벗겨진 채 본래 나뭇결 그대로 법당 지붕을 떠받쳤다.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서까래는 새 나무기둥의 어깨를 빌렸다. 대웅전 위 파란 가을하늘에 흰 구름만 유유히 흘렀다.


도량에는 대웅전, 관음전, 종각, 산신각, 명부전, 지봉당, 청룡당, 봉향각 등이 ‘口’ 형태로 모여 앉았다. 대웅전 앞엔 명본 스님이 세웠다는 삼층석탑이 다소곳했다. 대웅전에 들었다. 향도 피우지 않았건만. 법당 안은 자비로운 향기로 그득했다. 석가모니좌상과 문수보살입상, 보현보살입상 등 소조석가여래삼존상(보물 제1789호) 모습에 마음이 먼저 울었다. 자애로운 눈매와 입가에 걸린 미소는 어머니 자궁처럼 법당을 안락하게 했다. 무의식처럼 그리워했던 어머니 품에 대한 향수가 마음을 적셨다.

 

 

▲보물 제1789호 소조석가여래삼존상.

 


찬찬히 눈길을 돌려 법당 안 곳곳을 살폈다. 그러다 다시 벽화에서 시선이 멎었다. 죽은 이를 극락으로 안내하는 인로왕보살이 반야용선에 올라 중생들을 피안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벽화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감동을 전했다.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이 인로왕보살과 함께였다. 숨이 막혔다. 이 자비로운 순간을 그려낸 화공은 누구일까. 인로왕보살이 영가를 인도하는 의식은 고려 때 활발했다는데, 화공은 고려 사람이었을까. 그는 이 장엄한 모습을 붓 끝에 먹인 먹으로 그려내 보는 이를 환희로 물들였다.


대웅전이 그 자체로 보물이라는 말을 실감했다. 실제 보물 제824호이기도 했지만, 대웅전이 간직한 시간과 고풍스러움 그리고 편안함은 마음에 보물처럼 각인됐다. 법당을 나섰지만 계속 주위를 맴돌았다. 서성이는 객을 회주 지봉 정완 스님이 재촉했다. 봉향각에서 차 한 잔으로 환희에 떠는 마음 진정시키라는 말씀이다.


정완 스님이 전한 이야기는 청룡사가 왕실 사찰이자 지장도량임을 알게 했다. 청룡사에 모셔진 고려 공양왕 초상화가 세종 19년(1437) 세종의 명으로 고양으로 옮겨졌고, 후엔 인평대군 초상화를 모시고 나라와 왕실의 안녕을 빌었던 원찰이었단다. 옛날엔 경기 지역 큰 사찰들은 대개 국가의 안녕과 선열들의 원혼을 달래는 종묘로서 역할을 많이 했다고 했다.

임금 무덤인 릉을 세워 범종이 들릴 수 있는 지척 거리에 원찰을 세워 묘를 관장하고 사후 왕생극락을 빌었다는 얘기다. 광릉(세조)에 봉선사, 영릉(세종)에 신륵사, 융릉(사도세자)에 용주사 등이 그랬다. 해서 청룡사도 지장기도도량으로 미뤄 짐작할 만했다. 대웅전 역시 서방정토 극락세계로 향하는 서향집이라고. 법당 내 벽화에 인로왕보살이 계시는 것도 우연이 아닐 터다.


예전에는 길이 녹록치 않았다고 했다. 청룡사에 드는 샛길은 오로지 스님과 기도객 마음이 오가는 곳이었단다. 원체 외진 곳이기 때문이다. 절 아래 마을도 외지보다는 절에 딸린 논과 밭에서 농작물을 길렀고 부처님 전에 올린 공양물 나머지로 끼니를 이었다고 한다. 청룡사 부처님이 청룡마을 생명붙이들을 먹여 살린 셈이다. 안성 청룡사 인근 불당골에서 태어난 남사당패 여주인 바우덕이도 겨울이면 이 도량에서 머문 뒤 민초들의 애환을 달래기 위해 하나 뿐인 목숨 을 걸고 허공에 매달린 외줄을 탔다. 그녀도 청룡사 부처님 가피를 입었으니, 불사에 시주했다는 사실은 어쩌면 당연했다.

 

남사당패 여주인인 바우덕이
청룡사 머물며 민초 애환 달래
사찰 불사에 시주 기록도 남아

 

 

▲ 반야용선을 탄 인로왕보살이 영가를 극락으로 안내하고 있다.

 


정완 스님은 예부터 청룡사가 해왔던 책임을 아직도 하고 있었다. 마을에서 절에 이르는 길을 단장하고, 주말에 서운산을 찾는 등산객이 이용할 주차장도 만들었다. 작은 관광수입이라도 청룡마을에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주차장에 소요된 비용은 삼보정재였다. 청룡사에 기댄 주민들의 삶을 돌보지 않으면 삼보정재도 무슨 소용이랴. 10월12일쯤 주차장 낙성식을 핑계로 경로잔치도 열 생각이었다.


청룡사와 함께 정완 스님은 20년 넘게 주름져 가고 있었다. 대웅전이 보조기둥에 기대 서 있지만 그대로 뒀다. 해체보수는 하지 않을 요량이었다. 부석사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처럼 해본 적도 없다 했다. “아직까진 버틸 만 해.” 스님은 짧게 답했다. 그냥 부분 보수하고 후대에 물려주고 싶어 했다.


정완 스님의 욕심일까, 아니면 미련일까. 안성 서운산 청룡사에는 미련이 많았다. 대웅전은 나무기둥에 기대어 흐르는 세월을 붙잡고 있었다. 인로왕보살은 반야용선에 태울 중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서운산과 청룡사에 드는 사부대중을 위해 마련한 주차장.

 


해 삼킨 구름이 그림자를 드리웠다. 날이 저문다. 더디게 흐르던 시간이 분주해졌다. 이생에 내려둔 반야용선의 닻을 올려야 하는 시간이다.


청룡사, 회주스님 말씀을 되뇐다. “아직까진 버틸 만 해.” 031)672-9103
 

최호승 time@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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