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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나귀에게 정법안장이 멸각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기자명 법보신문

 

▲혜능 스님의 의발탑이 남아있는 광효사에서 기도를 하고 있는 중국 불자들.

 

 

到鳳林하니 林이 問, 有事相借問得麽아 師云, 何得剜肉作瘡고 林이 云, 海月이 澄無影이어늘 游魚獨自迷로다 師云, 海月이 旣無影이어늘 游魚何得迷오 鳳林云, 觀風知浪起하고 翫水野帆飄로다 師云, 孤輪이 獨照에 江山靜하니 自笑一聲天地驚이로다

 

해석) 임제 스님이 봉림 스님이 계신 곳에 이르렀다. 그러자 봉림 스님이 물었다.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는데 괜찮겠는가?” 임제 스님이 대답했다. “무엇 때문에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려고 하십니까?” 봉림 스님이 말했다. “바다에 비친 달이 너무나 밝아서 그림자가 없는데, 노니는 물고기 저 혼자 스스로 미혹할 뿐이다.” 임제 스님이 말했다. “바다에 비친 달은 이미 그림자가 없는데, 노니는 물고기가 어찌 미혹할리 있겠습니까?” 봉림 스님이 다시 말했다. “바람을 보고 물결이 이는 것을 알고 물이 좋아서 돛대를 단 배를 바다에 띄운다.” 임제 스님이 말했다. “강산을 홀로 비추는 둥근 달은 고요하기만 한데, 스스로 크게 웃는 그 소리에 천지가 놀라는구나.”

 

강의) 봉림 스님은 시문에 아주 뛰어난 스님이었던 것 같습니다. 임제 스님에게 아름다운 시를 사용해 묻습니다. “바다에 비친 달이 너무나 밝아서 그림자가 없는데, 노니는 물고기 저 혼자 스스로 미혹할 뿐이다.” 여기서 물고기는 임제 스님을 지칭한 것일 겁니다. 진리는 바다에 비친 달처럼 밝아서 티끌 하나 없는데, 이리저리 행각을 한다면서 미혹되게 묻고 다니는 임제 스님을 타박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임제 스님의 대답은 명확합니다. 스스로는 미혹함이 없이 그저 진리의 바다에서 노닐고 있을 뿐이라는 대답입니다.


그러자 봉림 스님이 다시 말합니다. “바람을 보고 물결이 이는 것을 알고 물이 좋아서 돗대를 단 배를 바다에 띄운다.” 바람이 부는 것을 보고 파도가 이는 것을 알듯이 자네가 이리저리 기웃거리는 것을 보고 방황하는 것 아닌가 생각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물이 좋으면 배나 띄울 것이지 왜 자꾸 번뇌의 파도를 일으키느냐는 질책의 의미도 담겨있는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한 임제 스님의 말씀이 아주 시적입니다. “강산을 홀로 비추는 둥근 달은 고요하기만 한데 스스로 크게 웃는 그 소리에 천지가 놀라는구나.” 홀로 산에 올라 크게 웃었다는 약산유엄(藥山惟儼, 751~834) 스님의 고사를 인용한 것인데 스스로의 활달한 깨달음의 경지를 드러낸 것으로 보입니다.

 

林云, 任將三寸輝天地하나 一句臨機試道看하라 師云, 路逢劍客須呈劍이요 不是詩人莫獻詩로다 鳳林이 便休하니 師乃有頌호대 大道絶同하야 任向西東이라 石火莫及이요 電光罔通이로다

 

해석) 봉림 스님이 말했다. “세치 혀를 가지고 천지를 아름답게 비추는 것은 알아서 할 일이니, 이 상황에 맞는 한마디 말을 일러보라.” 임제 스님이 말했다. “길에서 검객을 만나면 칼을 바쳐야 하지만, 시인이 아닌 사람에게 시로 말하지 마십시오.” 그러자 봉림 스님이 입을 다물었다. 이에 임제 스님이 게송을 지었다. “큰 도는 동일함을 넘어서 있으니 동서남북 어디를 향하든 자유자재해서 부싯돌 불도 미치지 못하고 번갯불로도 통할 수 없다.

 

강의) 임제 스님의 자화자찬(自畵自讚)에 봉림 스님이 미사여구는 그만두고 지금 당장 깨달음에 대해 일러보라고 다그칩니다. 이에 대해 임제 스님은 “길에서 검객을 만나면 칼을 바쳐야 하지만 시인이 아닌 사람에게 시로 말하지 말라”는 말로 정리합니다. 이 구절은 당시의 관용구라고 하는데 아마도 상대방의 경지나 근기를 보아가면서 물어야 한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이 말을 못 알아들었을 봉림 스님이 아닙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입을 다물었다는 대목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임제 스님의 다음 게송을 보면 봉림 스님에 대한 임제 스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큰 도는 동일함을 넘어서 있으니 동서남북 어디를 향하든 자유자재해서 부싯돌 불도 미치지 못하고 번갯불로도 통할 수 없다.” 봉림 스님의 깨달음이든 임제 스님의 깨달음이든 깨달음은 동일함을 넘어서 있기에 서로 인정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같은 장미꽃이라도 하나하나 살펴보면 전혀 같지 않습니다. 깨달음도 이와 같아서 같은 깨달음 일지라도 각자의 개성을 가진 깨달음입니다. 또한 큰 도는 부싯돌의 불도 번갯불도 미치지 못합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수천 년 전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을 부처님의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고 있는 지금 우리가 또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潙山이 問仰山호되 石火莫及이요 電光이 罔通이어늘 從上諸聖이 將什麽爲人고 仰山이 云, 和尙은 意作麽生고 潙山이 云, 但有言說이요 都無實義니라 仰山이 云, 不然하니다 潙山이 云, 子又作麽生고 仰山이 云, 官不容針이나 私通車馬니다

 

해석) 위산 스님이 앙산 스님에게 물었다. “부싯돌의 불도 미치지 못하고 번갯불도 통할 수 없는데 이제까지 여러 성인들은 무엇으로 사람들을 가르쳤겠는가?” 앙산 스님이 대답했다. “스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위산 스님이 말했다. “오로지 말만 있을 뿐 진실한 뜻은 전혀 없다.” 앙산 스님이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위산 스님이 물었다. “그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앙산 스님이 말했다. “공적으로는 바늘 하나도 용납할 수 없으나 사적으로는 수레나 말도 다 통과합니다.

 

강의) 근기에 따른 방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앙산 스님이 공적으로는 바늘 하나도 용납할 수 없으나 사적으로는 수레나 말도 다 통과한다고 말한 것도 그런 뜻입니다. 말과 글이 진리 그 자체는 아니지만, 결국은 이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의 길로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到金牛하니 牛見師來하고 橫按拄杖하야 當門踞坐라 師以手로 敲拄杖三下하고 却歸堂中第一位坐하니라 牛下來見하야 乃問 夫賓主相見은 各具威儀어늘 上座從何而來건대 太無禮生고 師云, 老和尙은 道什麽오 牛擬開口어늘 師便打한대 牛作倒勢라 師又打하니 牛云, 今日에 不著便이 潙山, 問仰山호되 此二尊宿이 還有勝負也無아 仰山이 云, 勝卽總勝이요 負卽總負니라

 

해석) 임제 스님이 금우 스님에게 갔다. 금우 스님이 임제 스님이 오는 것을 보고 주장자를 가로로 뉘어 잡고 문에 걸터앉아 있었다. 임제 스님이 손으로 주장자를 세 번 두드리고 선방으로 들어가 첫 번째 자리에 앉았다. 금우 스님이 선방으로 내려와 그 모습을 보고 물었다. “손님과 주인이 만나면 서로 위의를 갖춰야 하는 법인데 그대는 어디서 왔기에 이렇게 무례한가?” 임제 스님이 말했다. “노스님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 겁니까?” 이에 금우 스님이 입을 열려고 하자 임제 스님이 곧바로 후려쳤다. 금우 스님이 넘어지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임제 스님이 또 때렸다. 금우 스님이 말하였다. “오늘은 일진이 영 좋지 못하군.” 위산 스님이 앙산 스님에게 물었다. “이 두 큰 스님에게 이기고 짐이 있었는가?” 앙산 스님이 대답했다 “이겼다면 양쪽이 다 이겼고, 졌다면 양쪽 다 졌습니다.”

 

강의) 금우 스님이 임제 스님을 시험하기 위해 그물을 펼쳤지만 임제 스님은 전혀 걸려들지 않습니다. 주장자를 가로로 잡고 문처럼 버티고 있었지만 임제 스님은 그 문을 노크하는 것으로 통과해 버립니다. 그리고 상석에 앉아버립니다. 시험을 하려다 오히려 자리를 빼앗긴 금우 스님이 예의범절을 논하며 임제 스님에게 따지지만 이미 승패는 결정이 나 버렸습니다. 말을 하려다 얻어맞고 넘어지는 척하다 얻어맞습니다. 임제 스님의 뜻은 이런 것이겠지요. “금우 스님 이미 승패가 갈렸는데 그만하시지요.” 이런 임제 스님을 보며 금우 스님이 말합니다. “오늘은 일진이 영 좋지 못하다.” 이에 대해 앙산 스님은 말합니다. 이겼다면 양쪽이 다 이겼고 졌다면 양쪽 다 졌습니다. 한마디로 우열을 가릴 수 없다는 말입니다. 표면적으로는 금우 스님이 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임제 스님의 근기를 확실히 알아냈으니 금우 스님 또한 소정의 목적은 달성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師臨遷化時에 據坐云, 吾滅後에 不得滅却 吾正法眼藏이어다 三聖이 出云, 爭敢滅却和尙正法眼藏이니고 師云, 已後에 有人問儞하면 向他道什麽오 三聖이 便喝한대 師云, 誰知吾正法眼藏이 向這瞎驢邊滅却고 言訖하고 端然示寂하니라

 

해석) 임제 스님이 입적에 들 때 자리에 단정하게 앉아 말했다. “내가 죽은 다음에 나의 정법안장이 멸각되지 않도록 하여라.” 삼성 스님이 나와 말했다. “어찌 감히 큰스님의 정법안장을 멸각 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임제 스님이 물었다. “뒷날 누가 그대에게 물으면 무엇이라고 대답하겠는가?” 삼성 스님이 곧 바로 “할”하고 고함을 질렀다. 임제 스님이 말했다. “나의 정법안장이 이 눈먼 당나귀한테서 멸각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임제 스님은 말을 마치고 단정하게 앉아 열반에 들었다.

 

강의) 삼성 스님은 ‘벽암록’ 68칙에도 등장합니다. 오가칠종 중 하나인 위앙종의 앙산 스님과 법거량을 벌여 앙산 스님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은 인물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앙산은 그곳에 머물던 삼성이 하직하고 떠나려 하자 주장자와 불자를 전해주려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삼성은 “저에게 스승 임제 선사가 계십니다”라며 사양하고 떠납니다. ‘벽암록’의 원오극근의 말처럼 삼성 스님은 임제 스님의 적자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임제의 제자라는 말에 앙산 스님이 섭섭해 했을 정도로 뛰어났던 삼성 스님은 도대체 왜 “할”을 했던 걸까요.


임제가 늘 강조했듯 삼성 스님이 ‘자기 목소리’를 냈다면 임제는 흐뭇해했을 겁니다. 스승으로부터 정법안장을 단절시켰다는 얘기도 듣지 않았을 겁니다. 선가에서는 ‘한로축괴 사자교인(韓盧逐塊 獅子咬人)’이란 말이 있습니다. 흙덩이를 던지면 개는 흙덩이를 좇지만 사자는 흙덩이를 던진 사람을 물어버린다는 뜻입니다. 사자가 늑대나 여우새끼를 낳지 않습니다. 삼성 스님은 개가 아니라 사자였던 것입니다. 스승과 제자는 죽음을 앞둔 마지막 대면의 순간까지도 오싹한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법에 철저했습니다. 스승의 뜻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삼성 스님은 스승의 은혜가 수미산 같았기에 인정사정없이 물어뜯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할’입니다. 누구와의 법거량에서도 ‘재범불용(再犯不容)’, 즉 ‘다시 범한즉 용서치 않겠다’고 당당히 외쳤던 삼성 스님이지만 마지막 순간 스승을 향해 ‘할’을 외친 것입니다. ‘할’은 당신의 법이며 나는 나의 법대로 살겠다는 임제선에 대한 자주선언이자 임제 할에 대한 종언이었습니다. 스승이 그토록 바랐던 대로 자신은 개가 아니라 사자라는 스승 앞의 마지막 눈물겨운 포효였던 것입니다. 임제 스님 역시 마지막까지 천하를 벌벌 떨게 했던 선문 제일의 사자였음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눈먼 당나귀처럼 고집 센 제자. 언제 어디서라도 주인공으로 살겠다는 제자에게 내 법(정법안장)의 시대는 이제 가고 네 법의 시대라는, 선종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하고 확실한 전등(傳燈)의 한 장면을 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껄껄거리며 입적에 들었을 임제 스님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정리=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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