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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지불시도(智不是道)

기자명 법보신문

성불했다 떠들어도 타인에게 휘둘리면 진짜 아니다

깨달았다 생각하는 것과
실제 깨달음은 전혀 달라
어느 곳에서나 주인돼야
진짜 부처라 할 수 있어

 

남전(南泉) 화상이 말했다. “마음은 부처가 아니고, 앎은 도가 아니다.”

무문관(無門關) 34칙 / 지불시도(智不是道)

 

 

▲그림=김승연 화백

 


1. 선종은 이론 대신 치열한 수행 강조

 

동아시아 대승불교의 양대 산맥은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종이 도시에 기반을 두고 있고 그만큼 엘리트 중심적인 경향을 보였다면, 선종은 시골에 기반을 두고 펼쳐져 민중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릅니다. 교종이 경전과 이론을 강조했다면, 선종은 마음과 치열한 수행을 강조했으니까요. 그래서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선종의 양대 슬로건은 매우 중요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직접 가리킨다는 것”, 그것은 외부 경전에 주었던 시선을 거두고 마음에 둔다는 뜻입니다. 또 이렇게 자신의 마음에서 불성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불성을 본다면 부처가 된다”는 슬로건의 의미이지요. 이제 과감히 경전을 집어던지고 자기 마음에 집중하면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커다란 문제, 즉 내성(內省, introspection)과 관련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내면에 대한 지나친 응시는 우리를 유아론(solipsism)에 빠지게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자신의 마음에서 불성을 찾느라고 우리는 자신의 내면에 갇힐 우려가 있다는 겁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내면이란 거대한 광야에서 길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내성은 자신의 본래 마음을 찾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내면세계 속에서 지나치게 방황하느라 우리는 외부 세계를 쉽게 망각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고민거리에 집착하면 할수록 우리는 친구나 가족들의 고뇌에 그만큼 덜 신경을 쓸 수밖에 없지요. 그렇습니다. 지나친 내성은 자비(慈悲)라는 불교의 핵심 정신을 어기는 아이러니에 빠질 수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느라 우리는 애정과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타자에 대해 무관심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자비의 정신과 부합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이런 수많은 위험에도 불구하고 철저한 내성을 통해 수행자는 자기의 본래면목을 찾으려는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자신의 맨얼굴을 찾지 못하면, 우리는 손님이 아니라 주인으로 삶을 살아낼 수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어떤 수행자가 자신의 맨얼굴, 혹은 불성을 찾았다고 확신한다고 해봅시다. 그렇지만 과연 그는 정말 자신의 본래 마음을 찾은 것일까요, 정말 자신의 불성을 찾은 것일까요. 이런 의문이 드는 것은 당당한 주인으로서의 삶은 세계 속에서 확증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깨달은 것과는 차이가 날 수 있다는 겁니다.


2.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다르다

 

라캉(Jacques Lacan, 1901~1981)이란 정신분석가도 자신의 저서 ‘정신분석의 다른 측면(L'envers de la psychanalyse)’에서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나는 내가 존재하지는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고 말입니다. 지금 라캉은 서양 근대철학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데카르트(Descartes, 1596~1650)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이고 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것이 바로 데카르트의 주장이었으니까요. 그렇지만 라캉은 우리는 생각하는 곳에서 존재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생각 속에 있는 나’는 ‘실제 나’와는 다르다는 겁니다. 라캉의 말이 어렵다면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를 사랑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자신을 ‘한 여자를 사랑하고 있는 남자’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거지요. 그런데 아무리 자신을 이렇게 믿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차가운 겨울 얇은 옷을 입고 온 애인에게 기꺼이 옷을 벗어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는 그녀에게 이야기합니다. “자기야, 오늘 너무 추워 보이니, 일찍 집에 들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내가 데려다 줄게.” 이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자신이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누구나 다 알고 있지 않나요. 사랑한다면 어떤 조건에서든 함께 있으려는 마음을 갖게 되고, 동시에 함께 있으려는 구체적인 노력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당연히 그녀의 추위를 막아주려고 그는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벗어주거나 아니면 함께 추위를 벗어날 방법을 모색하게 될 겁니다. 그렇지만 이 남자는 그녀를 일찍 집에 보내려고 합니다. 이것은 그녀와 함께 있으려는 절실한 마음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이것이 어떻게 사랑일 수 있겠습니까. 이제 라캉의 말이 납득이 되시나요. ‘존재하는 나’와 ‘생각하는 나’ 사이에는 차이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살아가는 나’와 ‘생각 속의 나’는 다를 수밖에 없는 겁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참선과 같은 치열한 내성을 거쳤다고 할지라도, 자신이 불성을 파악했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스스로 불성을 실현하며 사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무문관(無門關)’의 서른네 번째 관문에서 남전(南泉, 748~834) 화상이 속삭이는 목소리가 귀에 제대로 들어오기 시작하시나요. “마음은 부처가 아니고(心不是佛), 앎은 도가 아니다(智不是道).” 아마도 그의 제자들은 ‘직지인심’이나 ‘견성성불’을 슬로건으로 치열하게 수행했나 봅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선종에 속하는 수행자들로서 그들이 어떻게 교종 스님들처럼 경전을 읽으며 그 의미를 지적으로 탐구하는 수행법을 선택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지만 참선을 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오만에 빠졌나봅니다. 드디어 그들은 자신이 자신의 본래 마음을 터득했다고, 혹은 자신이 마침내 자기의 불성을 잡았다고 확신했으니까요. 바로 이 순간 남전 화상은 그들에게 충격적인 가르침을 내리게 된 겁니다. “너희가 붙잡았다고 자신하는 마음이 정말 부처의 마음인가? 너희가 지금 알았다고 자신하는 것이 정말로 실천할 수 있는 것인가?” 간신히 낭떠러지를 기어올라 왔는데, 다시 절벽으로 밀어버리는 형국입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이 진짜로 부처가 되기를 바라는 스승으로서 제자들의 허위를 묵과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가짜 부처에 머무는 것보다는 차라리 수행자로 치열하게 수행하는 것이 더 희망적인 일이니까요.

 

3. 어느 곳에서나 주인이 돼야 부처

 

치열한 참선 끝에 마침내 부처가 되었다고 확신하기에 이른 어느 수행자가 있다고 해봅시다. 승방에서 그는 자신이 이제 주인공으로서 자신의 삶을 당당히 살아낼 수 있다는 확신에 희미한 미소를 띨 정도였습니다. 그렇지만 홀로 있을 때 주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정말로 심각한 문제는 혼자 있을 때가 아니라 타인들과 만났을 때 벌어지니까요. 갑자기 자신을 해치려는 사람을 만났을 수도 있고, 참선을 하고 있는 데 어린아이가 뒤통수를 때릴 수도 있고, 수행자를 유혹하는 매력적인 여인을 만날 수도 있고, 아니면 설법을 해달라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몰려올 수도 있을 겁니다. 아니면 세상에 숨어사는 거사(居士)들로부터 듣도 보지도 못한 난해한 화두가 하나 날아올 수도 있지요. 이렇게 타인과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들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주인으로 우뚝 서 있을 수 있을 때에만, 그 수행자는 자신이 실제로 부처라고 사실을 증명하는 것 아닐까요.

 

임제(臨濟, ?~867)의 말처럼 “어느 곳에서나 주인이 되어야(隨處作主)” 부처입니다. 홀로 있을 때는 주인으로 살 수 있지만 타인과 만났을 때 바로 그 타인에게 휘둘리는 사람이 어떻게 부처일 수 있겠습니까. 결국 혼자 있을 때도 주인이고, 10명과 함께 있을 때도 주인이고, 1만 명과 함께 있을 때도 주인일 수 있어야, 우리는 진정한 주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고 ‘직지인심’과 ‘견성성불’이란 선종의 가르침에는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고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자신의 본래 마음, 혹은 자신의 불성을 제대로 보았다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홀로 있을 때에는 진정한 삶의 주인, 즉 부처가 되었다고 확신하는 사람도 10,000명과 함께 있을 때는 그들에게 휘둘릴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그가 자신이 부처라고 믿고 있을 뿐이지, 사실은 부처가 되었다는 오만에 빠진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자신이 부처가 되었다고 확신하는 것과 실제로 부처가 되었다는 것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가로놓여 있는 법입니다. 남전 스님이 서른네 번째 관문에서 말하려는 것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님은 말했던 겁니다. “마음은 부처가 아니다(心不是佛)”라고 말입니다. 남전 스님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풀 수 있을 것 같네요.

 

아무리 스스로 ‘직지인심’과 ‘견성성불’에 성공했다고 떠들어도 타인과 만났을 때 주인으로서 삶을 영위하지 못하고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그가 터득했다고 하는 마음이나 불성은 모두 가짜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당연히 이런 사람이 부처일 수는 없는 법이지요. 반면 홀로 있을 때나 여럿이 있을 때나 부처로서 당당히 살아가는 데 성공한 사람이라면, 그는 자신의 본래 마음을 잡은 것이고 불성을 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강신주

그렇습니다. 부처가 무엇인지 깨달은 것과 실제 부처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에베레스트 산을 잘 아는 것과 실제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남전 스님은 사족 하나를 더 붙였던 겁니다. “앎은 도가 아니다(智不是道)”라고 말입니다. 이제 가슴 깊이 아로새겨야 할 겁니다. 앎이 도를 대신할 수 없는 것처럼, 마음이 부처를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신주 contingen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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