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여주 봉미산 신륵사
21. 여주 봉미산 신륵사
  • 법보신문
  • 승인 2013.10.31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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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강 공사에 흐트러진 강변 어디에 종 울음 머무는가

‘신기한  굴레’라는 이름
물살 다스린 설화서 유래

  
고려말 유림의 탄압으로
밀양으로 향하던 나옹선사
신륵사 이르러 돌연 입적
선사 흠모한 이들 모이며
조선 초기 명찰로 급부상


“천성산 살려라” 단식하던
지율 스님 몸 의탁 하기도
4대강 토목공사 강 유린에
여주팔경도 수몰 될 운명

 

 

▲신륵사는 ‘신기한 미륵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를 다스렸다’는 창건 설화가 전해질 만큼 여강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절이다. 고려 말 나옹선사가 유림의 탄압으로 낙향하다 이곳에서 입적한 후 선사를 흠모하는 사람들이 모이며 사격이 커졌다.

 

 

신륵사(주지 현담 스님)는 여강(驪江: 남한강 상류) 곁에 있다. 여강은 숱한 이야기를 품고 흘렀다. 여주평야를 적시고 한강을 향해 달렸다. 조선 학자 김수온은 “여주는 산이 맑고 물이 아름다워 낙토라 불리는데 신륵사가 이 형승(形勝)의 복판에 있다”고 칭송했다. 신륵사에서 바라보면 여강의 긴 물줄기와 너른 들, 그리고 점점이 박혀있는 집들이 한 폭의 동양화 같았다. 지금은 4대강 공사로 그 풍경이 바뀌었지만.


강가의 절은 평일인데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경내에는 600살이 넘은 은행나무와 향나무가 서 있다. 은행나무는 나옹선사의 지팡이에서 싹이 났다고 하고, 향나무는 무학대사가 스승인 나옹선사의 향기로운 삶을 그리며 심었다고 한다. 은행나무는 언젠가 벼락을 맞았는데 불에 탄 가지가 관세음보살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이를 본 사람들 더러는 그 신묘함에 합장을 했다.

 

 

▲벼락 맞은 은행나무가 관세음보살 같다.

 


여강에 붙어있는 강월헌(江月軒)이 있다. 마을 앞 정자와 똑같은 모습이다. 그 위에서 여강을 굽어보면 홀로 물 위에 떠 있는 느낌이다. 또 수수만년을 흐른 물길을 보면 흡사 역사를 깔고 앉아있는 듯해서 황송했다. 당대에 문명을 떨쳤던 시인묵객들은 이 강월헌에서 여강과 신륵사의 정경을 담아냈다.


이 강월헌 위로는 고려시대 것으로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벽돌탑(전탑)이 있다. 그래서 신륵사는 벽절로 불리기도 했다. 강가의 사찰에는 8개의 보물이 있다. 선사의 영정을 봉안한 조사당, 나옹화상의 사리를 봉안한 석종부도, 석종비, 석등과 대리석 다층석탑, 다층전탑, 대장각기비, 그리고 최근에 보물로 지정된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 등이다. 특히 조사당에는 지공, 나옹, 무학 대사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나옹과 무학 대사는 각기 다른 왕조에서 왕사를 지냈다. 가장 가까이서 권력을 지켜본 두 분은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을런지.


신륵사는 신라 시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절 이름은 ‘신기한 미륵(彌勒)이 신기한 굴레(勒)로 용마를 다스렸다’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여강은 물길이 사납고 곧잘 범람했다. 큰비가 오면 물살은 강가의 모든 것을 쓸어가 버렸다. 옛 사람들은 거센 물살을 용마(龍馬)에 비유했다. 따라서 이런 용마(거대한 물살)를 막아주는 초인적인 존재가 나타나기를 염원했을 것이다. 신륵사는 이런 염원이 모아져서 세워졌을 것이다. 그래서 ‘물을 다스리는’ 창건설화도 생겨났을 것이다.


신륵사는 고려 말 왕사 나옹선사(1320~1376)의 인연이 깊이 박혀있다. 나옹은 공민왕의 절대 신임을 받았다. 왕의 지원으로 양주 회암사를 중창하던 중 공민왕이 죽었다. 우왕이 즉위했어도 나옹은 여전히 왕사로 있었고 마침내 262칸의 당우에 15척 불상이 7구나 되는 회암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낙성식을 거행하는 날 사람들이 구름처럼 밀려들었다. 나옹은 살아있는 부처나 다름없었다. 회암사와 그 속의 나옹을 보기 위해 절 문이 미어졌다. 나라에서는 관리를 보내 부녀자들은 오지 못하게 했고, 끝내 절문을 닫으라했지만 인파를 막지 못했다.

 

 

▲고려시대의 유일한 전탑이 남아 있다.

 


이 장엄한 광경을 흘겨보는 무리가 있었다. 바로 우왕을 둘러싸고 있는 새로운 집권세력이었다. 회암사 중창이 과도한 토목공사라며 공민왕의 정책을 공격했다. 인파로 붐비는 회암사와 부처님처럼 떠받들리는 나옹은 집권층에게 커다란 부담이었다. 결국 우왕은 나옹을 탄핵하여 회암사에서 추방했다. 밀양 영원사로 가라고 명했다.


쫓겨나는 선사를 보며 백성들이 통곡했다. 길 위의 나옹은 병을 얻었다. 한강에 다다르자 병세가 심해졌다. 이레 동안 물길을 거슬러 신륵사에 도착했을 때는 더 이상 거동하기 힘들었다. 신륵사에 머물고 있는 선사에게 호송관이 떠날 것을 독촉했다.


“그건 어렵지 않소. 허나 나는 곧 세상을 뜰 것이오.”


선사는 그렇게 말하고 그날 입적했다. 그러자 신륵사 뒷산에 오색구름이 나타났다. 법체 다비를 마쳤을 때는 맑은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신륵사에는 나옹선사의 부도가 세워지고 입적 전후의 신비로운 이야기들이 온 나라에 나돌았다. 이후 선사의 문도들이 여말 선초의 불교를 이끌면서 신륵사는 일약 명찰로 부상했다. 선사의 ‘최후’로 신륵사는 다시 태어난 것이다. 선사의 최대 불사였던, 그 위용이 동양에서는 으뜸이라던 회암사는 폐사의 운명을 맞았지만 신륵사는 아직도 우뚝하다.


쇠락하던 신륵사는 억불정책을 펴던 조선시대 다시 일어선다. 세종대왕 영릉이 여주로 옮겨오면서 신륵사가 능침사찰이 되었기 때문이다. 영릉이 들어서고 절을 세우려 하자 한명회 등이 예종에게 간했다.

“신륵사는 일명 벽절로 옛 현인들이 놀던 자취가 완연하옵니다. 선왕의 능과 거리가 매우 가까워 종소리가 들릴 정도입니다. 절을 수리하여 옛 것을 새롭게 만들면 일은 절반이지만 공은 갑절이나 될 것입니다.”(김수온이 지은 ‘보은사중창사액기’에서)


이렇게 해서 신륵사는 영릉의 원찰이 되었다. 옛 것을 수리하고 새로 지어 대찰을 이루었으니 모두 200여 칸이었다.

 

 

▲여강을 굽어 보고 있는 강월헌의 풍경.

 


필자에게도 신륵사는 작은 인연이 서린 곳이다. 2005년 겨울 단식 중인 지율 스님을 신륵사에서 뵈었기 때문이다. 천성산을 살려달라며 단식 투쟁을 벌이던 스님이 어느 날 홀연 사라졌다. 모든 언론 매체들이 촉각을 세우고 추적했지만 스님의 행방은 알 수 없었다. 스님이 곡기를 끊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죽음을 부르고 있다는 소문은 이미 퍼져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스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여주 신륵사에 한번 들려달라고 했다. 지체 없이 스님을 찾아 나섰다. 2005년 12월 8일이었다.


스님은 신륵사 작은 방에 숨어있었다. 손을 만지니 뼈만 잡혔다. 당시 주지 세영 스님이 용태를 전해주었다. 여주 시내에서 의사를 불러왔는데 젊은 의사는 살가죽이 뼈와 붙어있는 스님의 배를 보고는 흐느껴 울었다고 했다. 물도 제대로 넘기지 못한다니, 음식을 갈망하던 세포들이 이제는 음식을 거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스님은 밤 새 앓다가 아침햇살을 받으면 통증이 멎는다고 했다. 아침햇살에는 형용 못할 많은 것들이 들어있는 듯했다. 80일을 굶은 스님을 일으켜 세울 수 있다니 말이다. 그러니까 나는 가장 평화로운 시간에 스님을 찾았다. 스님은 그냥 얼굴 한번 볼라고 연락을 했단다. 스님과는 이런 저런 인연이 있었다. 아마 스님의 얘기를 깊이 들었던 사람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스님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죽음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스님의 바람과는 달리 죽음은 더디게 오고 있었다. 콩팥기능이 거의 정지되고 항문에서부터 세포가 굳어가고 있음에도 죽음은 아주 느리게 오고 있는 듯했다. 스님에게 왜 이리 서두르시냐고 물었다.


“저는 희망을 얘기하러 가는 겁니다. 어느 순간 세상이 긍정적으로 비쳐졌어요. 세상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변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어제 사숙(자광) 스님을 뵈었더니 마음이 편합니다. 사숙 스님께서 역정을 내시며 '천성산 천 개가 있어도 네 목숨보다 작다'고 하시더군요. 저는 천성산을 위해 처음부터 목숨을 내놓았기 때문에 묵묵히 듣고만 있었습니다.”


지율 스님은 혼잣말처럼 말을 이어갔다.


“저도 살고 싶습니다. 네 차례 단식을 했고, 300여일을 굶었습니다. 얼마나 먹고 싶었겠어요. 제가 뜻한 바를 이루고 평범한 여인으로 돌아간다면 밥장사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못먹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고 싶습니다. 하지만 저보고 천성산을 놓으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하는 일이 어찌 천성산에만 국한되겠습니까. 제가 우리나라 이곳저곳을 다녀봤는데 가는 곳마다 자연의 신음소리가 들렸어요. 이렇듯 우리 자연이 죽어 가는데 왜 그만하면 됐다는 건지 모르겠어요. 하나도 된 것은 없는데….”


“저는 이제 노를 놓고 가는 배입니다. 제 몸한테 미안합니다. 수행자처럼 걷다가 죽으려 했지만… 20일 굶으면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맘대로 되질 않더군요. 내 명은 나도 모르는가 봅니다. 요즘 신륵사 강변을 걸었는데 너무 아름답더군요. 아니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요.”


대화가 끊기면 바로 침묵이었다. 만남의 반가움이 엷어지자 오후는 허허로웠다. 이대로 스님을 보내야 하는가. 스님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일주문을 나서며 여강을 쳐다봤다. 강가에 눈이 쌓인 아름다운 강을 차마 오래 보지 못했다. 함께 자리를 지킨 수경 스님이 "꼭 살려내야 한다"고 했다. 어찌하면 살릴 수 있을까. 궁리를 거듭했다. 그것은 거처를 알리는 것이었다. 경향신문에 스님의 단식 기사를 싣기로 했다. 상경하며 지율 스님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그렇게 믿었는데 이제 어찌하라고….”


스님의 탄식이 너무 아팠다. '세상에 쫓기는 스님에게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마음이 놓이지 않아 다시 신륵사에 전화를 했다. 세영 스님은 지율 스님이 방금 떠났다고 했다. 세영 스님은 전화에 대고 한참 동안 통곡을 했다. 지율이 불쌍하다고 꺼이꺼이 울었다. 다음 날 스님을 충주에 내려줬다는 택시기사가 나타났다. 충주에는 여동생이 살고 있었다.


여주팔경이 있다. 그중 첫째가 신륵사의 저녁 종소리이다. 신륵사에서 퍼지는 종소리는 모든 것들을 제자리로 보내고 조용히 저녁을 불러왔을 것이다. 모두가 평화스러웠을 것이다. 그런데 생명평화를 깨는 무식한 토목공사가 벌어졌다. 강을 유린하는, ‘강 같은 평화’를 깨는 4대강 공사였다. 이곳 여강도 강 풍경이 완전히 바뀌었다. 여주팔경도 수몰되어가고 있다. 팔경에 들어가는 마암 근처의 고기잡이 등불이나 제비여울을 돌아가는 돛배의 풍경을 어찌 볼 수 있겠는가. 벌써 여강에서는 물비린내가 나기 시작했다. 여주 시내에는 이름 모를 곤충들이 하늘을 덮을 정도로 난비하고 있다. 이제 여강에서 생산된 이야기들도 사라질 것이다.


이 야만의 시대에도 신륵사의 저녁종소리는 여전히 강물에 떨어지고 있다. 아마도 잠들지 못하는 생명붙이와 흐르지 못하는 강물을 보며 울고 있을 것이다.

 

본지 고문 김택근 wtk222@hanmail.net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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